[정만진의 문학 향기] 생각하는 동물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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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27   |  발행일 2022-05-27 제15면   |  수정 2022-05-2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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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소설가)

1947년 5월27일 우리나라 소설가 곽의진이 태어났다. 그는 삼별초의 투쟁을 그린 '전사의 길', 명량해전을 다룬 '민', 제목만으로도 내용이 짐작되는 '초의 선사' 등 장편 다수를 발표했다. 역사소설 갈래의 작품 경향이 주는 선입견과 달리 곽의진은 여류 작가이다.

'꿈이로다 화연일세'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예인 허련을 주인공으로 한 세 권짜리 장편소설이다. 미모와 정염의 여인 은분은 작자가 창조해낸 허구의 인물이지만, 허련은 조선 후기를 풍미했던 실존 예술가이다. 작가는 허련이 58세 때 진도에 머물며 써둔 회고록을 토대로 긴 호흡의 이 작품을 썼다.

허련의 회고록은 그가 가상 손님에게 생애를 술회하는 대화체로 기술된다. 따라서 시골 출신 선비 화가였던 허련 자신이 직접 겪었던 꿈같은 인연들이 실타래처럼 적혀 있다. 소설에도 초의선사의 제자였던 허련이 추사 김정희의 문하로 들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허련은 초의선사에게 고요와 정결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을 배웠다. 추사는 손끝 재주가 아니라 인문적 교양과 지고한 인성의 바탕이 갖춰져야 비로소 훌륭한 예술이 창조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허련은 지극정성을 다해 배우고 익힘으로써 새 스승으로부터 "압록강 남쪽에서는 너를 따를 자가 없다"라는 극찬을 듣는다.

'압록강'이라면 1388년 위화도 회군과 1946년 발표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저절로 떠오른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정치적 사건인 까닭에 그 내용을 살핀다 해서 가슴이 설렐 일은 없다. 역시 사람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평온과 감흥의 맛깔스러운 무늬를 가미해주는 것은 예술이다.

'압록강은 흐른다'에는 이미륵의 생애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고향의 유년기, 서당 공부, 서울 유학, 식민지 경험, 3·1운동, 중국 망명이 이어진다. 그 과정을 보며 흔히들 '이미륵의 시대는 격변기였구나!'식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짓는 사유 습관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기원전 500년 무렵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시냇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어떤 삶도 본인에게는 초 단위 분 단위가 모두 격변이다.

인생은 꿈같이 쌓인 인연을 흐르는 물에 불가항력으로 띄워 보낸 시간의 축적이다. 은분도 예술도 한결같이 소중하다. 곽의진과 이미륵처럼 소설을 창작하진 않더라도 허련처럼 회고록은 꼭 쓸 일이다. 그래야 인생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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