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
"너는 잘하겠다는 욕심이 없고 성실하지도 않다. 왜 모든 게 건성이고 매사에 철저하지 않니? 그런 정신 상태로 대학은 제대로 가겠느냐, 제발 정신 차리고 좀 잘해라, 알겠지." 어느 학생이 교문에 들어서면서 받은 엄마의 카톡이다. 6월 모의평가 성적 때문에 엄마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이런 톡을 보냈다. 학생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에 공감한다. 엄마의 말은 격려도 아니고 애정 어린 질책도 아니다. '너는 열등할 뿐만 아니라, 조금의 가능성도 없는 구제 불능의 인간이다'라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못질이다.
욕심 없고 성실하지도 않으면서 매사에 건성이고 철저하지 않은 아들에게 '정신 차리고 좀 잘하라'라고 요구하는 엄마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이에 대해 그런 종합적인 판단을 내릴 정도로 자식의 능력과 성향을 잘 안다면, 아무리 몸부림쳐도 어떤 성과도 없을 것이란 사실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엄마의 문자는 한 인간의 잠재 능력을 사장하고 자발적인 학습 동기 유발을 압살하는 최악의 저주이자 악담이다. 엄마의 말은 자존감을 짓밟아 헤어나기 어려운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언어폭력이다. 성적에 대한 비난은 참을 수 있지만 가능성과 인격 자체를 부정하는 말은 견디기 어렵다. 많은 가정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반복적으로 언어폭력을 당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는 반항하게 된다.
우리의 급한 성격과 분노조절 장애는 역사적 산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식민 지배와 해방 후 좌우 혼란, 6·25, 개발 독재와 압축적 경제 성장기를 거치며 패자 부활전이 없는 사생결단의 처절한 경쟁, 학벌 중시와 결과 중시주의, 승자 독식의 사회 분위기 등이 우리에게서 마음의 여유와 기다림의 미덕을 앗아갔다. 이런 각박한 풍토 속에서 우리는 억울함과 한을 가슴속에 넣은 채 참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끝없이 남과 비교하는 비정상적인 교육 풍토 속에서 엄마는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고 자신도 모르게 화를 냈을 것이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며 슬픔과 기쁨을 함께 공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절망과 좌절, 실의의 순간에 언제나 내 편에서 나를 지지해주는 가족이 있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도 기꺼이 견딜 힘이 생긴다.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 구사해야 한다. 학생 엄마에게 다시 톡을 보내라고 부탁했다. "엄마가 그저께 보낸 카톡은 진심이 아니다. 미안해. 너는 뒤로 갈수록 더 좋아지고 시작보다 끝이 좋은 아이였단다. 너는 어린 시절부터 출발은 조금 느린 편이지만, 가속도가 붙으면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아이였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다만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미루지 말고 차근차근 나아가거라. 힘내라. 엄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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