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中 근현대사를 흔든 쑹씨 가문의 세 자매…돈을, 권력을, 조국을 사랑한 그녀들

  •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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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7-01   |  발행일 2022-07-01 제38면   |  수정 2022-07-01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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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쑹메이링·쑹아이링·쑹칭링.
◆3세기 중국 역사에 영향을 끼친 아버지의 교육법

쑹자수(宋嘉樹)는 청나라 광둥성 원창(하이난성 원창) 객가(客家)인으로 본래 한(韓)씨였으나 외가로 입양되어 쑹(宋)씨가 되었다. 소년기에 동인도제도에서 생활하다가 미국으로 가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고 감리교 선교사가 되어 1886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스무 세 살 청년으로 부패한 서태후의 청나라 타도를 위해 비밀결사단체에 가담해 중국어 성서 인쇄, 담배, 면화 등 사업을 벌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中 성서인쇄·면화 등 각종 사업으로 떼돈 번 쑹자수…자식들 모두 미국 명문대 유학 보내
산시성 대부호 쿵샹시와 연을 맺은 쑹아이링, 부 이용해 권력 중심에서 아동복지 등 관여
중화민국 대총통이 된 쑨원과 결혼한 쑹칭링,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 '정치 행보'
큰 언니의 독려로 쑨원의 후계자 장제스의 후처가 된 쑹메이링 외교활동하며 권력 쟁취


1894년 상하이에서 쑨원(孫文)을 만나 중국동맹회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재정을 책임지는 자리를 맡았다. 그의 영어식 이름은 찰리 존스 쑹(Charles Jones Soong). 그의 자식들 3남 3녀는 모두 20세기 초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세 딸 아이링(靄齡), 칭링(慶齡), 메이링(美齡)은 '쑹씨(宋氏) 세 자매'로 중국은 물론 세계 근현대사와 일정 부분 우리나라 현대사에도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세 자매는 각각 '돈을 사랑한' '중국을 사랑한'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란 별명으로 지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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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사랑한 여인, 쑹아이링(宋靄齡)

쑹자수는 중국에서 거의 최초로 신학문을 접한 사람답게 자식들을 모두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특히 세 딸에게 큰 관심을 기울여 '여자도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다'며 일찌감치 공부를 독려했다. 쑹아이링은 미국 조지아주 웨슬리언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1909년 중국으로 돌아와 1911년부터 후베이성 우창에서 반청기의를 일으켜 최초의 혁명정부를 세운 아버지의 친구 쑨원의 비서로 일했다.

1913년 공자의 후손이자 산시성 대부호인 쿵샹시(孔祥熙)를 만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결혼했다. 1925년 쑨원이 죽은 후 장제스(蔣介石)가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도록 후원하고, 동생 쑹메이링과의 결혼을 독려해 성사시킨다. 중화민국의 상무장관,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를 맡은 쿵샹시와의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중국 부호들과 사교계를 이끌며, 부를 이용해 권력의 중심에서 아동복지 사업 등에 관여하였다.

그 후 중일전쟁 부정축재 혐의로 쿵샹시가 실각하고 장제스의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여 타이완으로 퇴각하자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4년 제2대 타이완 부총통으로 출마하려 했던 쿵샹시는 장징궈의 '낡은 사회의 권세 있는 집안'이라는 극심한 비판으로 정치의 꿈을 완전히 접은 채 1967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1973년 쑹아이링이 위독해지자 타이완의 영부인이었던 동생 쑹메이링이 급히 전용기로 뉴욕으로 가 큰언니의 임종을 지켰다.

◆중국을 사랑한 여인, 쑹칭링(宋慶齡)

1911년 우창봉기를 시작으로 한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고 1912년 쑨원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중국 전체의 분쟁은 곳곳에서 진행 중인 상황이었고 인민들의 사상(死傷)을 우려한 쑨원이 북양신군의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1913년 스스로 황제라고 칭한 위안스카이와의 협조 체제 붕괴로 일본으로 도피를 하게 되었고, 언니 쑹아이링이 맡았던 비서 일을 동생 쑹칭링이 맡게 되었다.

쑹칭링은 15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언니와 같은 대학에서 영문학사 학위를 받아 막 귀국한 참이었고, 도피 생활로 실의에 빠진 쑨원의 연설문이나 원고를 영어로 번역하는 등 일을 돕다가 아버지의 친구이자 유부남인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 사실을 알고 격노한 그녀의 아버지가 결혼 허락을 받으러 온 딸을 집안에 가두어 버리지만, 탈출해 밀항선을 타고 도쿄로 가 쑨원과 바로 결혼식을 올려 버린다. 쑹자수는 1918년 위암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의 친구이자 사위인 쑨원을 만나지 않았다.

쑹칭링은 1차 호법운동, 호법전쟁, 2차 호법운동 중에 쑨원의 곁에 있었으며, 1922년 영풍함 사건으로 아이를 유산하면서 불임이 되는 비극을 겪기도 한다. 이후 요페회담 등에 참여하며 1차 국공합작을 지지했다. 하지만 1925년 3월20일, 장쭤린과의 회담을 위해 베이징에 갔던 쑨원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는 죽으면서 모든 재산을 아내 쑹칭링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재산은 책 2천여 권과 상해의 집 한 채가 전부였으나, 쑨원의 미망인이라는 자격은 이후 평생 그녀의 정치인생 밑천이 된다.

1926년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1927년 쑨원의 직위를 물려받은 장제스와 동생 쑹메이링의 결혼을 극렬하게 반대하여 사이가 소원해진다. 게다가 쑨원에 의해 창설된 국민당이 좌·우파로 나누어지자, 그녀는 장제스의 우파에 반대하여 좌파를 지지해 정치적인 입장이 더욱 달라져 중국을 떠나 소련에 2년간 머물게 된다.

1937년 쑹칭링은 중국방위동맹을 조직해 의료와 아동복지 활동을 폈고, 1948년 장제스의 국민당에 반대해 홍콩에서 조직한 분파인 국민당혁명위원회 명예의장이 된다. 1951년 인민공화국의 복지와 평화위원회에서의 활동으로 스탈린평화상을 받았다. 마오쩌둥의 특사로 수많은 나라를 방문했고,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저우언라이의 보호를 받았다. 국민당 쪽에서 그녀의 공산당 치하 숙청과 폐단에 대한 철저한 침묵과 대약진운동의 대기근 일조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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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시인
1981년 인민공화국 명예주석으로 지명되었고, 백혈병으로 위독해졌을 때 동생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쑹메이링은 그 초청을 거절해 결국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타이베이전신국은 베이징에서 보내온 쑹칭링의 사망 급전을 수신 거부하였다.

◆권력을 사랑한 여인, 쑹메이링(宋美齡)

1908년 쑹메이링은 둘째 언니인 쑹칭링과 함께 유학을 떠나 웰즐리 칼리지 영문학과 철학 학위를 취득했다. 조기유학으로 유창한 영어 실력 외에 6개 언어를 구사할 정도였다. 중국화와 피아노 연주에도 뛰어난 미모의 재원으로 일찌감치 유명세를 얻었다. 1927년 장제스의 야망을 미리 알아챈 큰 언니 쑹아이링의 강권으로 여성 편력이 심했던 장제스의 후처가 되었다.

1936년 시안사건으로 남편 장제스가 억류당하자 직접 그곳으로 가서 장쉐량과 담판하여 사건을 해결, 중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직접 전선을 방문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1943년 2월 중국인 최초 미국 의회 연설로 중일전쟁 지원 확대를 호소하고 큰 호응을 끌어냈고, 같은 해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장제스의 카이로회담에서 남편의 통역관으로 같이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을 정식으로 주창하기도 했다.

특히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로로 195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과 별개로 그녀가 1932년 윤봉길 의거 당시 한인애국단을 지원하고 1940년 광복군 후원, 1942년 광복군 출정군인 가족 지원 등으로 1966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2019년 유관순 대한민국장 수훈 전까지 유일한 여성 수훈 사례다.

1949년 국부천대(國府遷臺) 이후 장제스의 영부인으로서 계속 활동했던 쑹메이링은 장징궈의 세습을 반대하며 마찰을 일으키며 주로 외교 쪽으로 활동했다. 대중국 영국연합원조기금 명예의장, 권리장전 기념회원으로 1960년대 말까지 미국의 가장 존경하는 10인의 여성에 포함되었다. 1975년 장제스가 죽자 미국으로 떠나 최소한의 공식행사 외에는 두문불출하다가 2003년 후사 없이 106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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