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대구 달성 하목정, 진분홍 배롱나무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정자…조선 시인묵객들이 詩 읊고 간 단골 명소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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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12   |  발행일 2022-08-12 제16면   |  수정 2022-08-12 07:29
임진왜란 때 팔공산서 의병 일으킨
전의이씨 낙포 이종문이 지어
인조가 왕위 오르기 전 잠시 유숙
훗날 '하목당' 편액 하사하고
내탕금 내어주며 부연 달게 해
배롱나무 개화시기 촬영지로도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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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목정 입구. 정면으로 보이는 사주문 위로 하목정의 지붕이 솟아 있다. 오른쪽 사주문이 있는 경역이 안채, 그 위로 보수 중인 사당이 위치한다.

하빈(河濱)은 강가다. 하산(霞山)은 노을에 물든 산이다. 달성 하빈면 하산리 낙동강 변에 하목정(霞鶩亭)이 있다. '하목'은 '붉게 물든 노을 속에 검은 점으로 날아가는 따오기'다. 담백하고도 뜨거운 순간이 정자 이름에 박제되어 있다. 그래서 물길이 바뀌고 풍경이 변하여도 하목의 순간을 잊어버릴 능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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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진분홍 꽃그늘 아래서 하목정을 본다. 하목정은 2019년 12월30일 보물 제2053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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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목정 대청마루. 인조가 편액을 하사한 후 하목정은 조선의 내로하라는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마루에 묵객들의 여러 시판이 걸려 있다.

◆하빈의 하목정

하목정으로 들어가는 마을길이 차들로 가득하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주변이 온통 장어식당이다. 사이사이에는 들쭉날쭉 지어진 소규모 공장과 폐업으로 문이 닫힌 건물, 모텔 등이 들어서 있어 짧은 길이 어수선하다.

수풀 진 길의 끄트머리에 닿아서야 하목정 초입이 반듯하게 열린다. 오른쪽 사주문이 있는 경역은 안채 자리다. 현재 안채는 소실되었고 관리인의 집이 들어서 있다. 관리사 지붕 위에 높게 자리한 것은 사당이다. 사당 일곽은 지금 보수 중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사주문 위로 하목정의 지붕이 솟아 있다. 하목정은 원래 살림집의 사랑채였으나 안채가 사라진 후 정자로 사용되고 있다. 사주문에 들어서자마자 하목정 대청의 열린 판문 속에 배롱나무 진분홍 꽃이 아슴아슴 흔들린다.

대청마루가 넓다. 생채기가 더러 눈에 들지만 윤을 머금고 있다.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다. 서쪽은 낙동강을 향해 열려 있고 북쪽은 사당으로 향하며 남쪽은 사주문 너머 먼 길 오는 손님을 맞는다. 대청의 동쪽에는 4칸의 방이 덧붙어 있다. 그래서 전체 평면은 'T'자를 이루고 마루에는 팔작지붕을, 방에는 맞배지붕을 올렸다.

하목정은 선조 37년인 1604년 전의이씨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 지었다. 1588년에 생원에 합격한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등과 함께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정유재란 때는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같이 화왕산성을 지켜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이후 그는 1604년에 하목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하목정은 당나라 시인 왕발의 시 '등왕각서'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

정자 뜰에 배롱나무가 여럿이다. 절정으로 향해가는 분홍 꽃이 맑디맑다. 뒤로는 푸른 대숲이 동산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마당 한 편에 사각의 연지가 조성되어 있다. 찰랑이는 물도 고아한 연도 하나 없이 잡풀만 가득하다. 이곳은 지반이 모래라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한다. 예전부터 하목정에서는 물이 나지 않았고 마을 아래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연지는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양반집 사랑채에는 당연히 연지가 있어야 한다고 여긴 듯하다.

멀리 낙동강이 보인다. 여름 수풀이 우거져 낙동강은 손바닥만 한 조각이다. 강변 가까이 보이는 조붓하고 말간 길은 자전거 길일 게다. 주변은 온통 현대의 식당들이지만 정자에서의 감정은 외따로 소쇄하다.

◆인조가 하사한 '하목당' 편액

하목정 처마 아래에 '하목당' 편액이 걸려 있다. 글씨는 인조의 어필이다. 인조가 능양군이었던 시절, 조선의 왕은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인 광해군이었다. 동생 능창군은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 정원군은 그 일 때문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울했던 시기 능양군은 경상도로 향했다. 그는 상주에서 배를 타고 하목정 나루터에 내렸다. 능양군은 하목정에서 유숙했다. 하루라는 말도 있고 제법 머물렀다는 말도 있다. 인조가 하목정에서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이종문의 아들 수월당(水月堂) 이지영(李之英)이 벼슬자리에 올라 경연관으로 대궐에 나타났을 때다. 인조는 이지영을 알아보고 옛일을 회상하며 하목당(霞鶩堂) 편액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내탕금에서 은 200냥을 하사하여 부연(附椽)을 달도록 했다. 원형의 서까래 위에 단면이 사각형인 서까래가 부연이다. 지붕을 크고 웅장하게 하여 건축물의 외형을 훨씬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왕궁에서나 할 수 있는 건축 기법이다.

수월당 이지영은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 여헌 장현광 등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이후 성균관 전적, 직강 예조좌랑을 거쳤으며 광해군 때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이이첨의 전횡이 극에 달하자 사직하고 낙향했고 인조반정 후에는 울진현령을 지냈다.

미수 허목은 이지영의 묘갈명에 '수월당은 광해군 말년에 조정의 정치가 극도로 혼란하자 벼슬을 버리고 하빈으로 돌아가 강 위에 노닐며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공은 평생 명예와 형세를 피하였고 구차한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벼슬을 버리고 떠났고 시골에 탁락(拓落)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름을 드날리지는 못했으나 행실은 더욱 완전하였다'라고 썼다.

하목정 뒤에 있는 사당은 이지영의 증손인 전양군(全陽君) 이익필(李益馝)을 제향하는 곳이다. 무인이었던 이익필은 영조 4년인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고 나라에서 불천위를 내려 사당에 영정을 모시고 영원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사당 앞뜰에 400년 되었다는 배롱나무가 몇 그루 있다. 문 앞에서 기웃대며 배롱나무 꽃 핀 사정만 들여다본다. 돌아서면 하목정 지붕과 시선을 마주하고 관리사의 수돗가 장독대가 내려다보인다. 안채의 사주문 끝에는 겹겹으로 멀어지는 식당들이 있다. 다시 돌아서면 조금 더 큰 낙동강이 펼쳐지고 곧게 뻗은 상주대교가 반짝거린다. 인조가 편액을 하사한 이후 하목정은 조선의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 현종 때 문인인 정두경과 남용익, 이덕형 등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

'강 물줄기와 산세가 길게 뻗었는데/ 멀리 펼쳐진 들판의 아름다움 그리기도 어렵구나./ 새벽안개와 연기와 섞여 물가에 잠겨 있고/ 저녁 석양빛은 강물 위에 출렁이네.' 이덕형이 본 하목정의 풍경이다. 하 세월이 흘러 풍경은 변했지만 대청마루 나뭇결은 더욱 반드러워지고 뜰의 수목들은 더욱 경건히 울창해졌을 것이다. 배롱나무 진분홍 꽃 아래에 앉는다. 하목정은 하빈을 바라보고 나는 하목을 본다. 좋은 그늘이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Tip

30번 국도 달구벌대로를 타고 성주 방향으로 간다. 동곡 교차로 지나 성주 대교 방향으로 약 1㎞ 가다가 오른쪽 하산리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하목정길 따라 약 500m 정도 간다. 길 끝에 강창장어가 나타나면 가게 앞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가게 바로 옆에 하목정 입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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