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전태일과 조영래

  • 김신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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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29 06:41  |  수정 2022-11-29 06:44  |  발행일 2022-11-29 제23면

"내가 죽어야만 해결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전태일 열사(1948~1970)는 1970년 11월 분신 이틀 전 짝사랑하던 고향 대구의 소녀를 만나 이 말을 남겼다. 그리곤 기계처럼 일하는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얘기한 뒤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분신 항거했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6·25 때인 두 살 때 피란을 갔다가 15세 때 중구 남산동으로 돌아와 2년 정도 살았다. 그는 대구에서의 생활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전태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대구 출신 고(故) 조영래 변호사(1947~1990)다.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하고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1년6개월간 수감생활을 한 그는 인권변호사의 대명사로 불린다. 사법시험 준비 중 분신사건이 터지자 그는 '전태일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3년에 걸친 평전 집필 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오늘날 전태일 정신이 이어지는 것은 그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다. 평전 집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나머지 그는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87년 6월 항쟁 이후 자신이 전태일 평전의 저자임을 밝혀도 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저자임을 밝히지 않을 정도로 겸손했다. 그는 사회적 불의에 항거한 삶을 살면서도 교조주의적인 사고로부터 자유로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균형 감각이 있는 인격의 소유자였다. 최근 <사>전태일의친구들은 우여곡절 끝에 전태일 열사 옛집 복원 기공식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시공간을 초월한 교감으로 많은 울림을 주고 있는 이들의 삶이 대구의 소중한 정신자산으로 빛나길 바란다.

김신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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