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일의병기념공원은 청송의진(의병부대)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청송군 주왕산면 화전등에 있다. 2011년 개관했다 리모델링 후 2023년 다시 문을 열었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관. 임진왜란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의병사와 청송지역 의병 관련 문헌, 영상,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관의 내부. 임진왜란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의병사와 청송지역 의병 관련 문헌, 영상,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화전등 전투지에 기념공원 건립
매년 6월1일 '의병의 날' 기념행사
올해는 경북지역 산불 탓에 취소
의병정신, 독립운동정신의 모태
광복 후에는 민주정신으로 계승
항일의병기념공원은 청송의진(의병부대)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청송군 주왕산면 화전등에 조성됐다. 1990년대 청송의진 진중 기록인 '적원일기'가 주목을 받으면서, 청송지역 의병 선열들에 대한 포상이 이뤄지고 기념사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2000년 화전등 유적지 성역화 사업 계획이 확정됐고, 2007년에는 화전등 항일의병기념공원 조성사업이 착공됐다. 2011년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 및 항일의병공원 개관식이 개최됐으며, 2022년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2023년 재개관했다.
기념공원 맨 위쪽에는 전국 2천여 의병유공선열 전원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인 충의사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에는 임진왜란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의병사와 청송지역 의병 관련 문헌, 영상,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는 의병기념관이 있다. 충의사와 기념관 사이 마당 양쪽으로 인의예지재(仁義禮智齋)와 효제충신재(孝弟忠信齋) 두 재실이 있고, 기념관 아래에는 강당으로 사용되는 창의루가 서 있다. 부대시설로는 전국 의병유공선열 전원의 이름과 훈격을 도별 가나다 순으로 새긴 명각대, 무명 의병용사 충혼탑, 청송의진 심성지 대장이 밤 병영에서 읊은 시 '영야음(營夜吟)'을 새긴 자연석 시비, 의병장과 우국지사들이 남긴 말과 글을 금속판에 새긴 전시물 등이 있다.

청송 독립유공 항일의병 포상선열 명각대. 전국 의병유공선열 전원의 이름과 훈격을 도별 가나다 순으로 새겼다.
◆고종 밀지 따라 운봉관서 청송의진 출범
청송의진은 전기 의병(1894 갑오의병, 1895 을미의병, 1896 병신의병)에 해당한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의병을 근왕병으로 추인하며 격려하는 고종의 밀지 '애통조(哀痛詔)'가 청송지역에도 전해졌다. 1896년 3월12일 청송의 유생들은 운봉관에 모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소류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15일 부장 조성박, 좌익장 권성하, 우익장 김상길 등을 임명해 부대의 진용을 갖췄으며, 16일에는 대장기를 세우고 찬경루 앞 용전천 백사장에서 첫 훈련을 실시했다.
청송의진은 주변 의진들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5월14일 청송·이천·의성 세 의진이 연합해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에서 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관군 10여명을 사살했다. 피란을 떠났던 마을사람들이 돌아와 보니 관군의 방화로 마을이 모두 불타고 단지 예닐곱 가구만 남았다고 한다.
이후 청송의진은 관군의 추적과 고종의 의병해산 칙유(포고문)에 따라 5월25일 본진을 해산했으나, 군내 8개 면으로 진영을 분산해 저항을 이어갔다. 의병들은 이천·의성의진과 함께 경주연합의진에 참여해 6월18일 벌어진 경주성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6월22일 대구부 소속의 관군과 안강 주둔 안동친위대(安東親衛隊)가 연합해 경주성을 공략하자 6월23일 경주연합의진은 3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났다. 감은리 전투 이후 설치한 청송의진의 흥해, 영덕출진소는 7월 13일과 14일에 벌어진 영덕전투에도 참여했다. 첫날은 의병이 승리했으나 이튿날 수백 명의 일본군이 들이닥치자 의진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천의진 김하락 대장은 탄환 2발을 맞아 중상을 입고 강물에 투신해 자결했고, 청송의진의 홍병태도 전사했다.
영덕전투 후 영덕출진소는 청송으로 돌아온 청운역에 진을 치고 있었고, 김하락 대장을 잃은 이천의진은 청송 부남면 화장동에 진을 치고 있었다. 7월20일쯤 관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한 이천의진을 돕기 위해 청송의진은 화장으로 가던 중 주왕산면 마평의 화전등(꽃밭등)에 이르러 관군의 기습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청송의진은 6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흩어졌으며,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각처를 전전하다가 해산했다. 한편, 전기의병 시기, 진보서는 왕산 허위의 형인 허훈이 1896년 4월 진보의진을 결성해 안동의진의 배후역할을 수행했다.
◆산남의진 청송지역 의병전쟁 선도
중·후기 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고종 강제퇴위, 군대해산 등의 사태가 이어지면서 일어났던 의병을 말한다. 학연·혈연으로 이어진 유림이 중심이었던 전기 의병에 비해, 지역을 기반으로 유능한 의병장과 해산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중·후기 의병 시기에 청송지역의 의병전쟁을 선도한 부대는 영천에서 편성된 산남의진이었다. 이 의진은 1906년 3월부터 1908년 7월까지 청송을 비롯해 영천, 영일 일대에서 정용기, 정환직, 최세윤이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산남의진이 처음 편성되던 1906년 봄부터 50여명의 청송 사람이 가담했으며, 부서장으로 추대된 인물은 선봉장 홍구섭, 후봉장 서종락, 우영장 김태언, 좌포장 이세기 등이었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에는 우재룡, 김성일 등 수십 명의 진위대 군인들이 청송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산남의진에 들어가 전력이 크게 보강됐다. 1907년 8월 편제 개편 때는 청송지역에 김진영을 유격장으로 하는 유격대가 편성됐다.
산남의진은 1907년 9월21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벌어진 안덕 신성에서 일본군과 혈투를 벌였다. 이후 영일 죽장면 입암전투에서 정용기 의병장이 순국하고, 그의 부친 정환직이 의병장을 이어받았으나 영천에서 순국했다. 1908년 3월부터 최세윤이 산남의진을 이끌면서, 서울 진군 계획을 중단하고 주로 동해안지역과 청송일대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유격전을 구사했다. 이 무렵 청송지역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산남의진의 별진이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청송 동부는 서종락이 지휘하며 주왕산 일대에서 활동했고, 청송 서부는 남석구가 지휘하며 철령 일대에서 활동했다.
산남의진은 최세윤 의병장이 1908년 7월 체포된 후 구심력을 잃고 해체되기에 이르렀으나, 청송지역은 서종락, 남석구 부대가 유격전을 계속했다. 이세기는 본진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동대산을 중심으로 1909년까지 활동을 지속했다. 그 후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거나 투항함으로써 청송지방의 산남의진 잔여세력은 점차 해산돼갔다.
서종락이 이끌던 산남의진 별진은 1910년 부남면 고와실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해산했다. 경주·영천·의흥·청송의 일본군 수비대 합동토벌대가 양손을 묶어 세워놓은 의병을 향해 사격을 해 백석탄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전한다.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우국지사들은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겨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산남의진에 참여했던 청송 출신의 김성극·이규환·홍구섭·남정철·남규철·김남준 등도 만주로 건너갔다.
◆독립 운동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해마다 6월1일이면 이곳 청송의진의 마지막 전투지에 조성한 항일의병기념공원에서 의병의 날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올해는 경북 북부지방을 휩쓴 산불피해 복구와 지역 분위기를 고려해 행사가 취소됐다. 항일의병기념공원을 위탁운영하고 있는 경상북도호국보훈재단은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체험학습 가족프로그램 '함께놀아휴(休)'를 개최하고 있으나, 5월에는 신청자가 없어 열리지 않았다. 충의재 앞에서 건너편 산들을 둘러보니 검은색과 갈색의 얼룩이 군데군데 보인다.

청송 독립유공 항일의병에 세워진 무명 의병용사 충혼탑.
충의사에서 내려오니 의병정신선양회가 세운 비석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의병정신은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정신의 모태정신이다. △광복 후에는 정의수호를 위한 민주화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항일의병운동은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일어났다. 위정척사란 올바름(正)을 지키고 그릇됨(邪)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위정척사 사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주희의 화이론에 닿는다. 금나라에 밀려난 남송에서 주희는 중화(正)와 오랑캐(邪)가 함께할 수 없다며 주전론을 폈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에서도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강조됐다. 특히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대륙을 차지하게 되자,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가 아니라 조선이 중화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소중화(小中華)론이 위정척사 사상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옳고 그름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며,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것은 '앎'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의병운동의 과정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중·후기에는 사상적으로 좀 더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 3.1운동 이후에는 조선왕조를 재건하려는 복벽주의 거의 힘을 잃고 독립운동가들도 미래에 어떤 나라를 건설해야 하느냐를 두고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스트 등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위정척사를 한말 유생들이 믿었던 화이론·소중화론으로 이해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만 본다면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위정척사론자들이다. 단지 각기 옳다고 믿는 것이 달랐을 뿐, 올바른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의병정신이 독립운동정신의 모태라는 말은 이렇게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의병정신이 민주화정신으로 이어진다는 말도 독재정권이라는 불의(邪)에 맞서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통한다. 근래에 의병정신, 독립운동정신을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이런 의미의 위정척사는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과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이익이나 편안함을 위해 그렇게 믿어버린 것은 아닌지 늘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 '옳음: 그름'이 아니라 '이익: 손해'인 것처럼 보인다. 2023년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가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어버린다는 뜻인데, 논어에 나오는 '견리사의'를 패러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왼손 약지 끝마디가 잘린 손바닥 도장이 찍힌,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의 유묵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으로 잘 알려진 구절이다. 눈앞의 이익을 보고 자신이 그것을 갖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먼저 생각하는 사람, 예나 지금이나 그리 흔치는 않을 듯싶다. 그런데 이제는 견리망의를 넘어 견리즉의의 시대, 이익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이 바로 '옳은 것'이 되는 시대, 이익을 위해서 거짓을 만들어 진실이라고 퍼뜨리는 시대가 온 것 같다. 무거운 마음으로 항일의병기념공원을 둘러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김광재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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