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 6. 6·25전쟁 최후의 보루 형산강 전투(하)

  • 박관영·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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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6-12 06:20  |  수정 2025-06-11 18:24  |  발행일 2025-06-11
국군·유엔군 2천301명 전사 ‘피로 물든 형산강’…최후의 방어선 지키다
포항 해도근린공원 연제근 상사 특공대상. '형산강 도하 작전'의 호국 영웅인 연제근 상사를 포함한 13명의 특공대원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포항 해도근린공원 연제근 상사 특공대상. '형산강 도하 작전'의 호국 영웅인 연제근 상사를 포함한 13명의 특공대원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해도동 형산강 물길 너머로 포스코가 뿌듯하고 웅장하게 펼쳐진다. 바로 저기 강 하류에는 형산교와 형산큰다리, 신형산교가, 강 상류에는 형산강 철교와 섬안큰다리가 고요하고 평화롭게 강물을 가로지른다. 강변의 해도 도시 숲에는 수국이 한창이다. 신발을 벗고 뒷짐을 지고는 수국길을, 동백길을, 단풍길을, 마가목길을 발 닿는 대로 누빈다. 그러다 뜨거운 햇살 고스란히 쏟아지는 잔디밭에 놓인 커다란 바윗돌을 본다. 거기에는 '여기는 형산강 6·25전쟁 최후의 방어선(Walker Line)'이라 새겨져 있다. 형산강은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 시작점이었다. 낙동강 방어선 곳곳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0년 8월, 기계안강지구 전투가 한창이던 그 때 이곳 형산강 일대 역시 격전의 전쟁터였다.


압도적 화력의 북한군과 형산강 사이 두고 대혈전

연제근 상사 특공대 지휘로 적의 기관총 진지 파괴

8시간의 도하작전 성공, 22·23·26연대 협공으로

포항탈환하고 파죽지세 북진…영덕 거쳐 강릉 수복

◆빼앗긴 포항, 형산강 전투의 서막


포항 해도근린공원.  '여기는 형산강 6·25전쟁 최후의 방어선(Walker Line)'이라 새겨져 진 바윗돌이 놓여있다. 1950년 8월11일부터 9월23일까지 44일 간 벌어진 '형산강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 2천301명이 전사했다.

포항 해도근린공원. '여기는 형산강 6·25전쟁 최후의 방어선(Walker Line)'이라 새겨져 진 바윗돌이 놓여있다. 1950년 8월11일부터 9월23일까지 44일 간 벌어진 '형산강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 2천301명이 전사했다.

북한군 12사단이 청송-기계 축선을 따라 남하하는 동안 북한군 제5사단, 제766유격대, 제945육전대 등은 동부축선을 따라 무서운 속도로 남하 중이었다. 8월2일 영덕에서 철수한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포항 방향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영덕을 방어 중인 국군 제3사단 제22연대와 23연대는 치열한 근접전투를 반복했지만, 제23연대 진지가 돌파되면서 방어선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투력이 저하된 국군 제3사단은 역습과 철수를 반복하면서 영덕 남쪽 강구를 거쳐 10일에는 장사동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8월11일, 북한군 제766유격연대의 일부가 포항시내까지 진입했다. 전투 3시간 만에 포항시 북구 우현동 소티재를 빼앗겼다. '소티재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부대원은 전체 180명 중 160명이다. 여기에 소속된 학도병은 전원 숨졌다. 그때 제3사단의 후방지휘소가 위치해 있던 포항여자중학교에는 학도병 71명이 상황을 지켜보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북한군은 소티재를 넘어 중화기와 장갑차를 앞세워 전진해 왔다. 화력의 차이는 너무나 분명했다. 학도병들은 북한군을 11시간 동안 네 차례나 막아내며 실탄을 다 쓸 때까지 분전했지만 방어선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 전투가 영화 '포화 속으로'를 통해 알려져 있는 '포항여중 전투'다.


국군과 유엔군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포항의 상황을 보고받은 제8군사령관은 연일비행장 확보를 위해 미 제19연대 제3대대로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포항에서 연일비행장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했다. 포항 북방에서는 북한군 제5사단 일부가 흥해까지 진출했다. 국군 제3사단은 장사동 일대에서 포위됐다가 17일 오전 6시쯤 유엔 해군 함정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구룡포로 철수했다. 승기를 잡은 북한군이 계속 남하하자 그대로 포항을 내줄 수 없었던 한국군은 북한군의 주둔을 막기 위해 포항 전역을 포격하여 폐허로 만들었다. 예상대로 북한군은 포항 주둔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 틈을 노려 8월 15일 영천에서 전투 중이던 민기식 부대(민부대)에게 포항 탈환 임무가 주어진다. 민부대는 18일 새벽 포항 시내로 진입해 북한군 180명을 포로로 잡고 포항을 탈환했다.


포항 수복 이후 제3사단의 첫 반격이 이뤄진다. 제23연대는 북한군을 포항 북쪽으로 밀어내면서 흥해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천마산 삿갓봉 고지를 탈환했다. 포항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고지전의 시작이었다. 삿갓봉은 비록 높이는 낮았으나 주변 일대의 야산 지대를 감시 통제할 수 있고 흥해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접근로를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고지였다. 국군 제3사단은 8월21일부터 9월5일까지 북한군 제5사단과 이 고지를 놓고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벌였다. 삿갓봉 고지의 주인은 16번이나 바뀌었다. 수많은 학도병들이 이 고지에서 전사했고 시신은 산처럼 쌓였다. 지역민들은 '무당골 전투'라고도 부른다. 결국 국군은 이 고지를 지키지 못하고 형산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된다. 포항이 또다시 북한군에 함락된 것이다.


◆반격의 불씨가 된 형산강 전투


9월5일, 수세에 몰린 한국군은 형산강 남쪽으로 물러나 강변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고 경계에 들어갔다. 북한군은 강 건너 연일읍 유강리 일대를 장악하고 방어선의 약점을 찾는데 집중했다. 방어선은 구축된 지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7일 늦은 밤 제8사단 제10연대장이 교대를 위해 오던 제3사단 22연대의 도착 전에 부대를 철수시켜버린 것이다. 약 5㎞ 구간에 걸쳐 방어 공백이 생기자 북한군은 곧바로 진격했다. 한국군은 형산강을 건너 남쪽으로 수 킬로 밀려난 곳에 다시 방어선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국군은 도하 시도를 계속했다. 형산강을 건너야 포항을 되찾을 수 있었다. 수심은 깊었고, 하필 나흘 동안 비까지 내려 물은 더 불어난 상태였다. 북한군은 제방 하단부까지 개인호 및 중화기호를 구축해 여하한 지상 및 공중공격에도 견뎌낼 수 있도록 진지를 편성해 맞서왔다. 강변까지 도하에 성공해도 후속 병력이 강을 건너지 못해 다시 되돌아오는 일이 반복됐다.


"우리는 9월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도 모르고 포항의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혈전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거짓말 같지만 이때 형산강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어요. 목까지 닿는 강물을 헤치며 도하하려다 총에 맞아 쓰러지면 그대로 떠내려가곤 했으니까요." 당시 23연대장이었던 김종순 대령의 증언이다. 17일에는 23연대 예하 5중대 병력 150명이 도하작전을 전개 했다가 37명만 복귀했을 만큼 도하작전의 실패는 심각했다.


그러던 9월18일, 육군 3사단 22연대 1대대 소속 분대장 연제근 상사는 형산강 도하 작전의 가장 위협적인 장애물인 적의 기관총 진지를 격파하기 위해 13명의 대원들로 편성된 특공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수류탄을 몸에 달고 형산강을 헤엄쳐 나아갔다. 22연대와 23연대 대원들은 자세를 낮춘 채 특공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공대원 9명이 적탄에 쓰러졌다. 연제근 상사는 어깨 관통상을 입은 채 대원 3명과 함께 기어이 강을 건넜다. 그리고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 2개 연대는 특공대가 열어놓은 길로 뒤따라 왔고, 효자동 쪽 공격을 계속하여 현재 포항 공대 쪽 위치를 확보했다. 형산강 다리 쪽에서 도하작전을 시행한 26연대도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도하에 성공하여 포항 시내로 진입했다. 새벽 4시 경 시작된 도하 작전은 작전 구역 일대 형산강을 모두 붉은 피로 물들인 낮 12시가 돼서야 끝났다. 작전은 승리였다. 포항을 탈환한 것이다. 이 형산강 도하 작전에서 연제근 상사는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포항 해도근린공원 포항 무공수훈자 전공비. 포항에 거주하는 호국 노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포항 해도근린공원 포항 무공수훈자 전공비. 포항에 거주하는 호국 노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포항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과 포항 출신 호국 영웅들의 이름을 새긴 포항 해도근린공원 6·25참전유공자 명예선양비.

포항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과 포항 출신 호국 영웅들의 이름을 새긴 포항 해도근린공원 6·25참전유공자 명예선양비.

포항 해도근린공원 6·25 한국전쟁 최후의 방어선 표지석.

포항 해도근린공원 6·25 한국전쟁 최후의 방어선 표지석.

해도 도시 숲의 워커라인 표지석 뒤편에는 '형산강 도하 작전'의 호국 영웅인 연제근 상사를 포함한 13명의 특공대원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연제근 상사는 서울 현충원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무공포장을 추서했다. 특공대원들의 동상 곁에는 포항에 거주하는 호국 노병들의 이름을 새긴 '무공수훈자 전공비'와 포항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과 포항 출신 호국 영웅들의 이름을 새긴 '6·25 참전유공자 명예선양비'가 높게 서 있다.


형산강은 '혈(血)산강'이라 불린다. 1950년 8월11일부터 9월23일까지 44일 간 벌어진 '형산강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 2천301명이 전사했다. 한국군은 사활을 걸고 싸웠고, 끝내 이겼다. 포항을 탈환하고 승기를 잡은 한국군은 파죽지세로 북한군을 몰아붙였다. 대대적 반격에 나선 한국군은 9월23일부터 30일까지 그대로 북진해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서 영덕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강릉지역을 수복했다. 그리고 10월1일, 제3사단은 우리나라 국군 최초로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치고 올라갔다. 이날이 바로 '국군의 날'이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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