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지켜온 동해의 붉은 혼] 7. 총을 든 소년들, 학도병

  • 박관영·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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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6-25 20:20  |  수정 2025-06-25 17:59  |  발행일 2025-06-25
71인의 학도병 11시간 포항여중 전투…20만 피란민 후퇴시간 벌었다
포항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와 학도의용 군명비. 포항여중 전투에서 희생된 학도병들을 기리는 포항여중전투 학도의용군명비에는 전사한 학도병의 이름이 적혀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와 학도의용 군명비. 포항여중 전투에서 희생된 학도병들을 기리는 포항여중전투 학도의용군명비에는 전사한 학도병의 이름이 적혀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영화 '포화 속으로'의 그 장면

적군 2천500여명과 새벽의 사투

실탄이 바닥나자 수류탄 투척

빈 총 들고 최후의 백병전 벌여

71명 학도병 가운데 48명 전사

행방불명 4·포로 13·부상 6명

전사자 중 중학생 이우근 포함

시신서 어머니께 쓴 편지 발견

전투 당시 상황 가슴아픈 기록

1950년 7월, 대구역 광장에는 하루에도 수천 명씩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혼란의 아수라장 속에서 소년은 어떤 외침을 보게 된다. "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조국의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그것은 '대한학도의용대'에서 내건 모병 벽보였다. 이에 16세 중학생부터 24세 대학생에 이르는 87명의 학생이 자원해 결의서에 자필서명을 하고 지장을 찍었다. 그 결의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 둘. 나는 이 순간부터 나의 조국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친다.


포항 전몰학도 충혼탑. 김춘식 외 47명, 1천394위의 영령들이 봉안된 공간이다. 처음 충혼탑이 세워진 것은 1957년이다. 전국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고 한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 전몰학도 충혼탑. 김춘식 외 47명, 1천394위의 영령들이 봉안된 공간이다. 처음 충혼탑이 세워진 것은 1957년이다. 전국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고 한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71명의 학도병이 지켜낸 11시간, 포항여중 전투


87명의 학도병은 사단 직할대대에 예속돼 수도사단 후방지휘소인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에서 학도병들은 아군의 후방보호를 위한 고지 전투를 치르고 검문검색 등을 수행했다. 그리고 당시 사단장의 권유로 87명 중 16명이 현지 입대했고, 나머지 71명은 학도병 자격으로 3사단이 있는 포항으로 향하게 된다. 8월9일경 포항에 도착한 그들은 3사단 사령부가 있던 포항여중에 배치됐다. 당시 학교에는 군악대와 행정병 50여 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바로 이 무렵 북한군 12사단이 기계를 점령했고, 포항지구전투사령부가 급편 됐으며, 3사단의 주력부대는 영덕-포항 방향으로 내려오는 북한군 제5사단과 맞서 역습과 철수를 반복하면서 영덕 남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포항은 공백 상태였고, 이는 중동부전선 최고의 위기를 맞은 상태였다.


1950년 8월10일, 워커 미8군사령관은 학도병 71명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이날 즉시 총과 실탄을 보급해 포항 사수에 투입하라고 명한다. 학도병은 미 해병대로부터 M1소총 1정과 실탄 250발씩을 각각 인수받았고, 포항여중 강당에서 현역병 중사로부터 실탄 장전과 발사 등에 대한 간단한 교육을 받은 뒤 밤12시에 취침에 들었다. 바로 그때, 북한군 제766유격연대의 일부가 포항시내까지 진입하고 있었다. 766부대는 북한군 특수부대다. 적 후방으로 침투해서 보급망을 교란시키고 통신을 방해하는 등 전형적인 비정규전을 치르는 부대로, 북한군이 부산으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로 포항 점령을 시도하면서 선발대로 들어온 것이 766부대였다.


8월11일 새벽, 포항 시가지 쪽에서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가 들렸다. 포항여중에는 비상이 걸렸고 사령부의 명령은 "학도병은 사단 사령부를 사수하라"였다. 새벽 3시 학도병 71명은 완전무장을 하고 포항여중의 상록수 울타리에 몸을 감추었고 3사단 소속의 군악대와 행정병들은 학교 뒷산에 포진해 경계에 들어갔다. 새벽 4시, 20여 명의 북한군 척후병들이 학도병들 앞에 나타났다. 학도병들은 그들이 근거리에 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다 일제 사격을 가해 모두 전멸시키는 승리를 거뒀다. 이후 날이 밝기를 기다린 북한군은 6시 선제공격을 가하며 밀려왔다. 2천500여 명의 북한군이 포항여중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공격을 가했다. 사단사령부와 전화마저 끊어진 학도병들은 이제 수십 배에 달하는 중화기까지 갖춘 북한군을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250발의 실탄이 모두 바닥났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MK2 파인애플 수류탄뿐이었다. 학도병들은 코앞까지 접근한 북한군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빈총을 들고 뛰쳐나가 최후의 백병전을 벌였다. "대한민국 만세! 학도병 만세!"를 외치며. 이 전투가 영화 '포화 속으로'를 통해 알려져 있는 '포항여중전투'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학도병 71명 중 48명이 전사했다. 4명은 행방불명, 포로 13명, 부상으로 인한 후송은 6명이다. 3사단 현역 비전투 요원들은 전원 전사했다. 그렇게 포항이 북한군에게 넘어가게 된다. 전투가 끝나고 포로로 잡혔던 학도병들을 향해 북한군 대좌는 "동무들은 악질분자요"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71인의 학도병들은 11시간 동안 북한군의 파상공격을 네 차례나 막아냈다. 그 시간동안 후방지휘소에서는 사단의 기밀문서와 보급물자, 병기탄약 등의 전력을 감포로 철수시켰고, 포항에 머물던 피난민 20만 명이 탈출할 수 있었다. 동시에 미8군이 연일비행장을 확보하고 항공포격을 가하게 되면서 북한군은 포항 점령 3시간 만에 포항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어 전력을 보존한 채로 철수할 수 있었던 우리군은 결국 8월18일 기계를 포함한 포항 전역을 탈환했다. 그사이인 8월 14일 포항으로 진격한 3사단장은 포항여중 학도병들의 시신 수습을 지시했고, 가매장한 후 다음과 같은 표지판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48구의 학도병이 있음. 후일 다시 찾을 때까지 누구도 손대지 말 것.'


포항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옛 포항역 앞 탑산(塔山) 자락에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 자리한다. 6·25전쟁 당시 포항지구 전투에 참가했던 학도의용군을 기리는 곳이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옛 포항역 앞 탑산(塔山) 자락에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 자리한다. 6·25전쟁 당시 포항지구 전투에 참가했던 학도의용군을 기리는 곳이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은 2002년 완공됐다. 전시실에는 교복을 입고 전장에 나갔던 학도병들의 앳된 사진과 사용했던 무기,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은 2002년 완공됐다. 전시실에는 교복을 입고 전장에 나갔던 학도병들의 앳된 사진과 사용했던 무기,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지금은 사라진 옛 포항역 앞 탑산(塔山) 자락에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 자리한다. 6·25전쟁 당시 포항지구 전투에 참가했던 학도의용군을 기리는 곳이다. 학도의용군 생존자들은 1979년 8월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학도의용군 전적물 보존, 추념행사 및 현지 안보교육을 실시해 왔다고 한다. 기념관은 2002년이 돼서야 완공됐다. 전시실에는 교복을 입고 전장에 나갔던 학도병들의 앳된 사진과 사용했던 무기, 노획한 무기들, 전투 상황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지도,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전적지에서 발견된 시계, 모표, 삼각자, 연필, 펜, 노트, '중(中)'이라 양각된 교복 단추가 총알과 나란하다.


'학도의용군'은 6·25전쟁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자진해 참전했던 의용병을 말한다. 당시에는 '학도병'이라고 불렀다. 당시 국군의 모든 사단에 학도병이 있었다. 그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전장에 뛰어들었고 낙동강, 다부동, 기계, 안강, 영천, 창녕, 포항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해 헌신했다. 육군본부의 공식 자료에 의하면 학도의용군 20만여 명이 후방에서 보국에 공헌했으며 전투에 참전한 학생은 2만7천700명에 달한다. 그들 중 7천여 명이 산화했고, 전국에서 제일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가 포항이었다.


기념관 오른쪽으로 난 '역사의 계단'을 오르면 산 정상부에 포항지구 전적비가 서 있다. 1950년 8월9일부터 44일 간에 걸쳐 일어났던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 형산강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려 1980년에 세웠다. 전적비 옆에 맨 머리의 학도병과 철모를 쓴 군인이 나란히 서 있다. 다시 64개의 계단을 오르면 작고 둥근 봉우리에 전몰학도 충혼탑이 서 있다. 김춘식 외 47명, 1천394위의 영령들이 봉안된 공간이다. 처음 충혼탑이 세워진 것은 1957년이다. 전국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단체, 시민들의 기부로 탑은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탑산에서는 포항시 전체와 영일만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포항지구전투의 격전지가 아름답고 평화롭게 펼쳐진다. 군복도 군번도 없이 교복을 입은 채로 자신의 고장을 위해 총을 들고 싸웠던 이들이 지금 저곳을 바라보고 있다. 학도병의 처절했던 전투는 전사에 기록돼 있다. 또한 포항여고(옛 포항여중), 포항 동지중고, 포항 해양과학고 등지에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많은 비들이 서 있다.


포항지구 전적비.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지구 전적비.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 호국학도 충의탑.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포항 호국학도 충의탑.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6·25 전쟁 당시 동성중학교 3학년이던 이우근 학도병(1934~1950)은 1950년 8월11일 포항여자중학교 앞 벌판에서 전사했다. 그의 시신에서 발견된 수첩에는 핏자국에 얼룩진 편지가 남겨져 있었다. '1950년 8월10일, 쾌청.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괴뢰군은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71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학도의용군 이우근이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중)' 이 편지는 지금 탑산 꼭대기 돌비에 새겨져 있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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