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은
1915년 온가족 압록강 건너 만주로
굶주림·혹한과 싸우며 묵묵히 헌신
열세살 때 석주 이상룡 손자와 결혼
공장 일감 얻어 독립투사 음식 장만
1995년 '아직도 내 귀엔…' 책 출간
허은(許銀, 1909∼ 1997) : 구미→충북 영동 추풍령역→압록강→만주 합니하→압록강→안동
"멀리 낙동강이 흘러가고 갯벌에는 갈대숲이 무성했다. 바람이 부는 날엔 온통 은빛 갈대가 꼭 춤추는 듯한 그림 같은 곳이었다. 동네에서 사금파리를 주워 소꿉장난을 했고, 이웃집 앵두를 따 먹다 그 집 어른에게 들켰을 때 혼날까 무서워 해질녘까지 숨어 지내기도 했다."
1915년 4월 어느 날, 6세 소녀 허은이 온 가족과 함께 압록강 너머 만주로 가는 망명길에 오를 무렵의 구미 임은동 풍경이다. 그때 어린 나이에도 소녀는 어렴풋이 '과연 내가 살아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날, 허은은 신발을 스스로 찾아 신었다. 아버지 허발과 어머니 이태순, 할아버지 허형과 할머니 영천이씨, 작은할아버지 허필과 작은할머니 벽진이씨 등등 수많은 어른들이 곁에 있었지만, 어린 여자아이 허은을 돌봐줄 여유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 어린 남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경황이 없다. 압록강 너머 합니하(哈泥河)까지 가는 중에 굶어죽고 얼어죽지 않으려면 먹을거리며 입을거리 등 이고지고 가야 할 짐들이 산더미처럼 많은 탓이다. 뒷날 동북항일연군 활동 중 1942년 전사하는 허형식을 세 달밖에 안 된 뱃속아기로 품고 있는 그의 어머니도 한 몸 가누기가 힘겹다.

구미 왕산로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옆 허위 선생의 묘소에서 본 임은동 전경. 1915년 6살 허은은 일족과 만주로의 망명길에 오르기 전 이곳에 살았다.
자정 넘어 2시가 되기 전까지 임은동에서 거의 100리 밖에 있는 추풍령역에 닿아야 한다. 그래야 신의주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다. 일제에 붙잡히지 않으려면 심야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고, 또 한적한 시골역 대합실로 드나드는 것이 좋다.
"가까운 구미역을 이용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그리 먼 길을 선택했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런 우문에는 도저히 현답이 불가능하다. 구미역은 그때 없었다. "그렇다면 김천역으로 가야지"라는 추궁도 현실 사정과는 동떨어진 질문이다. 손님 많은 큰 역은 일제의 감시가 극심하므로 호랑이 굴이나 다를 바 없다.
오늘도 허은 어린이는 종당에는 어른에게 업혀서 가겠지만, 몇 달 전에도 아버지 허발의 등에 얹혀 고모가 사는 안동을 다녀왔다. 그 왕복은 "앞으로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지도 모르는 우리 외동딸 허길, 어쩌면 좋단 말인가"하고 허은의 할아버지 허형과 할머니 영천이씨가 한탄을 거듭한 데서 비롯됐다.
칠순까지 넘긴 노부부가 구미에서 안동까지 걸어서 오가고, 연이어 압록강을 건너는 강행군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노부부는 아들 허발에게 네 살 아래 여동생 허길을 만나 "대가족 전체의 만주 망명 계획을 알리라"했고, 허발은 역시 외동딸인 허은을 데리고 길을 나섰었다.
그때 허발이 어린 딸 허은을 업고 나선 데에는 여동생 허길의 아들 이육사가 제 다섯 살 아래 외사촌동생 허은을 유난히 귀여워해온 내력도 크게 작용을 했다. 중국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자 허은은 "오빠가 보고 싶다"면서 울어댔고, 달래다 못한 아버지 허발은 결국 아이를 들쳐업고 안동으로 출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구미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이 자리한 허은의 생가터. 왕산 허위의 종손녀 허은은 1922년부터 가사 지원 및 군복 배급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모두들 서둘러라." 72세 노인 허형의 무거운 목소리가 구미 임은동의 오후를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사촌동생 의병대장 허위가 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가 돼 순국한 지도 어언 7년이나 지났다. 그 뒤로 허씨 문중은 언제 일제 군경과 그 앞잡이들에게 살해당할지 모르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그래서 허겸이 동생 허위의 유족들을 이끌고 먼저 압록강을 넘었다. 오늘은 허씨 문중의 두 번째 대규모 망명길이다.
오늘따라 밤하늘은 허씨 대가족의 망명을 도와주려는 듯 별 하나 없이 캄캄하다. 모두들 추풍령 역사가 바라보이는 기와집 옆골목에 몸을 숨긴 채 역 안팎을 정찰하러 간 허발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 허형은 만감이 교차한다.
"나의 자랑스러운 사촌동생 왕산(허위)은 정미년(1907) 경기도 연천을 근거지로 활약하면서 서울 탈환의 큰 포부를 이루려 했었지…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순국하고 말았는데, 살아남은 우리 일가들은 아득한 망명길을 떠나게 됐구나…."
이윽고 허발이 돌아왔다. 그가 허형에게 "소가족 단위로 나눠서 표를 끊으면 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윽고 둘씩 셋씩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뿔뿔이 열차에 올라 각각 다른 객차로 들어간다.
그렇게 서간도로 들어갔지만 6세 이후에도 허은의 길은 거칠고 험난했다. 3천 마지기나 되는 농토를 독립운동에 바친 허씨 가문도 언제 굶어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궁핍과 혹한 앞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허은 가족보다 앞서 만주로 옮겨온 독립지사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안동의 이상룡 가문은 4년 전인 1911년 1월 망명했다. 그때 남녀노소 온 가족이 안동에서 추풍령역까지 일주일 동안 밤낮으로 걷고 노숙을 해가며 이동했다. 큰 역인 대구역으로 갔다가는 금세 붙잡힐 염려가 컸으므로, 한적한 시골역을 찾아 그렇게 굶주림과 한겨울 야영의 험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룡이 압록강을 건널 당시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는 의병대장 허위보다 4세 연장이었고, 허겸 지사보다는 7세 연장이었다. 다들 대단한 독립지사들이었고, 이른바 명문거족 출신의 학자들이었다. 그 인연이 마침내 허은을 이상룡의 손자며느리로 만들었다. 1922년 당시 허은은 13세였고,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는 16세였다.
친가의 아버지와 숙부들과 당숙들은 물론 시할아버지 이상룡, 시아버지 이준형, 남편 이병화도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남자들은 모두가 항일투쟁에 참가하느라 매일같이 집을 비웠다. 허은은 시할머니 김우락, 시어머니 이중숙과 함께 날마다 산비탈로 올라 돌땅을 개간해야 했다.
그녀는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는 것도 모르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르고 지냈다." "어디 가서 죽었으려니 생각하고 있던 남편이 감옥에 있다는 연락을 받아도 가볼 여유가 없었다."
"중국인들이 사료로도 사용하지 않는 썩은 조밥 한 덩어리와, 콩기름에 절인 콩장 두어 개가 날마다 식사의 전부"였고, 독립운동가들이 회의차 집으로 찾아오면 그녀는 "중국 사람이 경영하는 피복공장에서 단춧구멍 만드는 일감을 가져다가 (완성해주고 받은 삯으로) 음식거리를 장만해야" 했다.
게다가 독립군들이 입을 군복도 매일같이 만들어야 했다. 뒷날 그녀는 "김동삼 등 지사들에게 내 손으로 옷을 지어 드렸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개가 헤아릴 길 없다"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살던 중 시할아버지 이상룡과 작은할아버지 허필이 1932년 세상을 떠났다. 시할머니 김우락은 1933년, 재종조부 허겸은 1940년, 시아버지 이준형은 1942년, 시어머니 이중숙은 1944년 타계했다. 고종사촌오빠 이육사도 1944년 순국했다. 할아버지 허형은 허은이 결혼한 1922년에 이미 하세했다.
아버지 허발과 남편 이병화만 살아서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일제에 당한 오랜 옥중 생활과 악랄한 고문 후유증은 두 사람의 삶을 1952년과 1955년에 각각 멈춰버렸다. 자주독립의 환호도 잠시, 허은의 울타리였던 두 사람은 동족상잔의 핏물 가득한 격랑 속에 끝내 묻히고 말았다.
시할아버지 이상룡이 타계했을 때 허은은 시아버지, 그리고 남편과 함께 안동으로 귀국했다. 3년상을 치르는 그녀를 일제 경찰은 내내 박해했다. 제문(祭文, 제사를 지낼 때 읽는 글)까지 검열했고, 조상들 산소의 비문 연호가 단기로 새겨진 것을 트집 잡아 결국 쪼아서 없어지게 했다.

허은은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혼인했다. 허위와 이상룡의 일가는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한 명문거족 출신의 학자였다. 사진은 이상룡의 생가인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
일제는 1942년 임청각(이상룡 생가)에도 참담한 위해를 가했다. 1515년(중종 10) 건립된 '보물'의 코앞 7m 지점에 철길을 개설하면서 일제는 여러 부속채들을 철거해 임청각의 규모를 반감시켜 버렸다.
그렇게 사람도 잃고 집도 잃으며 여든넷이 된 허은은 1993년 회고 작업을 시작해 1995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출간했다. 그 2년 뒤인 1997년 향년 88세로 타계했다.
독립 63년 뒤, 타계 21년 뒤인 2018년 대한민국은 그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를 포상하는 일이 지나치게 더디다. 우리는 누구나 서간도 바람소리를 듣는 일에 진심이어야 한다.
글=정만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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