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가을은 천고마비, 등화가친의 계절이라고 부른다. 사계가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고유한 특색을 드러내던 시절에 자주 쓰던 말이다. 예전엔 구월 중순만 넘어도 사색과 책 읽기에 적합한 날씨였지만, 이제 가을이 와도 여전히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렵다.
'X-이벤트(X-event)'는 발생 가능성은 낮지만 일단 발생하면 사회·경제·정치·기술 전반에 거대한 충격과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을 뜻한다. 미래학자 존 피터슨은 그것을 "현재의 연장선상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체제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정의했다. 기록적인 폭우와 폭염, 정치·경제적 충격, 급진적인 기술 발전, 글로벌 팬데믹과 금융위기, AI 기술의 폭발적 발전 등은 단순한 위기가 아닌 패러다임 전환의 징후이기도 하다.
기술은 인간의 삶을 전례 없이 바꾸고 있다. AI는 인간을 보조하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 학습하며 지식과 기능, 심지어 인간의 일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매일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등장하고,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현실이 된다. 변화의 속도는 가파르고, 지금까지 유효하던 지식과 능력은 순식간에 낡은 것이 된다. 이런 시대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 아이는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학교 교육만으로 충분할까?",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지금 아이에게 꼭 길러줘야 할 능력은 무엇일까?"
서용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는 아이들이 갖춰야 할 핵심 역량으로 회복탄력성(Resilience), 기민함(Agility), 미래 문해력(Future Literacy)을 제시한다. 모든 위험을 예측하거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위기와 실패를 얼마나 빠르게 흡수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이다. 회복탄력성은 단순한 인내심이 아니라, 실패를 성장의 자산으로 바꾸는 내적 힘이다. 기민함도 빼놓을 수 없다. 변화가 너무 빠르므로 고정된 지식이나 태도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새로운 정보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사고하며 행동하는 능력은 생존을 넘어 지속적인 성장의 필수 조건이 된다. 이러한 역량은 시험 성적이나 암기로는 절대 길러지지 않는다. 아이가 직접 선택하고 판단하며 도전하는 경험을 반복할 때 비로소 체득된다. 문해력 개념도 확장되고 있다. 과거 문해력이 단순히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했다면, 오늘날의 미래 문해력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자기 주도적으로 가능성을 탐색하는 힘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다룬 SF 소설은 아이들에게 미래를 상상하고 새로운 문제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기민함을 길러줄 수 있다. 또한, 사회적 갈등을 다룬 역사서는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 미래 문해력을 높이는 데 이바지한다. 등장인물의 심리나 사회적 갈등을 다룬 문학 작품도 도움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독서의 힘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독서는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다른 시대와 삶, 다양한 관점과 조용히 마주하며 자신만의 생각을 키우는 과정이다. 책 속 인물들의 실패와 성장 과정을 따라가며 아이는 회복탄력성을 익히고, 낯선 분야의 책을 통해 사고의 틀을 넓히며 기민함을 기른다.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고,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는 힘도 독서에서 비롯된다.
기후변화가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지만, 그래도 가을은 독서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내면을 들여다보기에도 적절한 시간이다. 부모가 먼저 책을 읽고 자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실천만으로도 아이의 사고는 깊어지고 시야는 넓어지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풍성해진다. 책을 통해 질문하고, 공감하거나 반박하며, 스스로 의견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키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자산은 '자기다움'이다. 아무리 AI가 발달해도 인간 고유의 감정과 공감 능력, 윤리적 판단,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대체할 수는 없다. 기술이 급속히 발전해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할지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아이가 자기만의 생각과 방향을 갖고 살아가도록 돕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급변하는 시대,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은 '자기다움'을 지키는 힘이다. 이 가을, 온 가족이 함께 책을 펼치고, 질문하고, 토론하며 아이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도록 도와주자. 문장의 숲에서 길러진 그 힘은 어떤 불확실성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삶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

김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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