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덕(金尙德, 1892∼1956?) : 고령→서울→일본 도쿄→중국 상하이→만주→중국 난징→중국 충칭→서울→평양
고령군 대가야읍의 평지는 외적 침공시 왕성으로 쓰이는 주산성(主山城)을 가운데 놓고 그 앞뒤에 펼쳐져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천을 따라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산 앞의 들판만 기억한다. 그 너머의 논밭은 장엄한 고분군으로 능선을 장식하고 있는 주산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북 고령 대가야읍 중화리에 있는 중화저수지는 낫질못이라고도 불린다. 고령 김상덕 선생의 생가터로 가는 길목으로 길도 끝나고 들판도 끝나는 듯한 지형을 하고 있다.
35년만에 찾은 독립, 친일파 청산
제헌국회 반민특위 위원장 역임
권력 유지 집권세력의 방해받아
늑약 폐기 투쟁 이두훈 선생 제자
"新학문 익혀라" 선생의 가르침
조선유학생학우회 결의문 공포
3·1운동 기폭제 '2·8선언' 주도
대가야읍 중심부에서 성주 방향으로 350m가량 지점에 작은 다리가 있다. 쾌빈교를 건너는 즉시 왼쪽으로 접어들면 이내 커다란 못둑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길도 끝나고 들판도 끝나는 듯한 지형이다. 하지만 좁은 산비탈 길을 따라 안으로 쑥 들어가면 예상 불허의 평평하고 광활한 분지가 나타난다.
벌판의 중심은 저전리이고 그 밖, 내상리와 신리도 있다. 지금은 합천 야로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산길이 개설됐지만, 웬만해서는 그 길을 오갈 일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 사람들은 대처에 나와야 해결되는 일이 있으면 낫질못 물가를 밟고 대가야 읍내로 나오는 도리뿐이다.

고령 대가야읍 저전리 김상덕 선생의 생가터. 산으로 못으로 가로막힌 이 곳에서 김상덕 선생이 태어났다. 기본적인 현창 시설인 안내판 하나 없이 터만 남아 황량하다.
그렇게 산과 물로 가로막힌 저전리에서 1892년 태어난 김상덕은 낫질못을 지나 일본과 중국까지 갔고, 무덤은 평양에 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시작된 고령 대가야읍 저전리 558번지를 찾아본다.
◆임정 문화부장·반민특위 위원장 지내
텅 빈 맨 땅이다. 본래 가옥이 있었지만 터만 남고 아무 것도 없다. 여름철에 가면 마당 오른쪽 구석에 커다랗게 개화한 흰독말풀이 눈길을 끌 정도로 황량하다. 폐허 같은 집터 앞뒤는 논밭을 지나 푸른 산이 둘렀고, 좌우는 작은 교회와 집 한 채가 호위병처럼 서 있다.
김상덕은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아는 항일지사이다. 특히 1948∼1949년에는 그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 아니라 외국인이었다. 그는 임시정부 문화부장(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했을 만큼 대단한 독립지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35년 만에 독립을 되찾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반민족행위자, 즉 통칭 친일파 문제는 그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초미의 관심사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줄을 대어 일제강점기의 권력과 지위 유지에 성공한 처벌 대상자들은 반민특위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와해되도록 만드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당연히 김상덕은 온 국민의 주목을 받았다.
이제는 기억할 가치가 없는 과거의 일로만 여겨지는 것일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는데, 김상덕 집터에는 기본적인 현창 시설인 안내판 하나 없다. 6·25때 납북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자신의 출생지가 지금처럼 버려진 줄 그가 알 리 없지만, 생가 현장을 찾아간 역사여행 답사자들은 못내 아쉬울 뿐이다.
◆내산서당서 이두훈 가르침 받아
1897년, 긴 세월 내내 저전리 주민들을 아쉽게 해왔던 크나큰 숙원 하나가 해결됐다. 곽종석, 이승희, 이정모, 장석영, 윤주하, 허유, 김진호와 더불어 '주문팔현(洲門八賢, 조선 후기 영남 성리학을 대표하는 한주 이진상 문하의 여덟 현인)'으로 꼽히는 이두훈이 마을 뒤쪽 사월봉 자락에 내산서당을 열었다. 깊은 산골 마을이었던 탓에 향교도 서원도 옛날부터 존재하지 않아, 자녀교육에 골머리를 앓아 왔던 이곳 주민들은 환호작약하며 아이들을 앞다퉈 내산서당에 등록했다.
다섯 살 상덕을 대뜸 이두훈 문하에 보냈던 김성옥-김상익 부부도 교육기관이 집 가까이 개교한 기쁨을 날마다 누리게 됐다. 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조그마한 입으로 서당에서 배운 것을 종알거릴 때면 논밭에서 일하느라 아팠던 온몸이 저절로 시원하고 평안해지는 것 같았다.
"대가야 시절 낫질못 아래에 우륵이라는 음악인이 살았는데, 나라가 망할 때 신라에 항복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합니다. 그런 자를 본받으면 안 된다고 스승님께서 강조하셨습니다."
"정유재란(1597) 때 이곳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이 낫질못 안 들판에 진을 쳤다가 주산을 넘어 공격한 정기룡 장군 군대에 몰살을 당했습니다."
어른들은 본인들도 금시초문인 지역 역사를 아이가 안다는 사실이 그저 신비롭기만 했다.
이두훈은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떨어진 뒤(1896), 그리고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1905) 두문팔현들과 함께 상경해 '매국 적신 처단과 늑약 폐기'를 주장하며 투쟁했던 인물이다.
일제 만행을 규탄하는 '포고 천하문'을 만들어 각국 공사관에 배포했고,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 고령군 대표로도 활동했다. 1914년에는 중국 봉천(지금의 심양)을 다녀왔다. 경술국치 이전인 1908년 일찌감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 활동 중인 9년 선배 이승희를 만나 망명에 대한 상의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두훈은 노령에 따른 건강 악화로 망명을 실행하지 못한 채 1918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두훈은 제자 김상덕이 그 이듬해 '2·8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으로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조선독립청년단 발족해 2·8선언 주도
이두훈이 중국 방문을 생각 중이던 1913년 여름 어느 날, 저전리 논에서 피를 뽑고 있던 21세 김상덕이 문득 허리를 편다. 누가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내 김상덕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부리나케 길로 올라선 김상덕이 다시 허리를 피 뽑을 때처럼 깊숙이 굽힌다.
"스승님! 분부를 주셨으면 제가 바로 내산서당으로 찾아뵀을 터인데, 이 무더위에 어찌 이곳까지 친히 오셨습니까?"
스승이 제자에게 말한다. "너는 다섯 살부터 지금까지 무려 14년을 내산서당에서 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공부를 놓아버렸으니 참으로 아깝구나. 시대가 변한 만큼 이제는 신학문을 배워 나라와 민족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스승은 이어서 말한다. "네가 아는, 보성전문 남형우 교수도 내가 그 학교에 진학하라고 권했다. 너보다 두 살 아래인 변희용도 일본 유학을 준비 중이다. 너는 일단 중등학교를 졸업해 대학 입학 자격부터 갖추도록 해라. 나도 나이가 많지만 불원간 중국을 방문해 새로운 앞날을 도모할 계획이다"라고.
1915년 4월 김상덕은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형편이 돼서가 아니라 고향의 청년계가 도와준 덕분이었다. 청년계는 김상덕과 문상직에게 '복국지사 장학금'을 줬다.
문상직은 학교를 1년 만에 그만두고 중국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김상덕은 수공부(手工部) 목수일을 맡겨 학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신경써준 학교의 배려에 힘입어 졸업을 이뤘다.
1917년 3월 김상덕은 일본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거쳐 게이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내산서당에서 동문수학한 변희용도 당시 같은 대학 이재과에 다니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 유학생 사회는 국제정세 변화와 우리나라 독립 사이의 연관성에 큰 관심을 가졌다. 1919년 1월6일 유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민족운동 전개 방안을 숙의했다.
김상덕 등 11명의 실행위원이 발족시킨 조선청년독립단은 2월 8일 조선유학생학우회 임시총회를 열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공포했다. 2·8선언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1년 동안 투옥됐다가 1920년 2월 9일 풀려난 김상덕은 그 길로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분단된 조국의 운명, 6·25 때 납북
김상덕은 1922년 3월 임시정부의 문제점 해소를 목표로 결성된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위원장 남형우)에 경북도 대표로 참가해 대표회의가 채택할 선서문과 선언문의 수정위원으로 선출됐다.
1936년 1월엔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을 도모해 창당한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민족혁명당은 난징에서 우한, 구이린을 거쳐 충칭에 도착했다. 김상덕도 조직을 따라 옮겼다. 그러나 이동 중에 막내딸을 잃고, 충칭 도착 직후 부인까지 잃었다.

임시정부의 문화부장과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반민특위 초대 위원장을 맡은 김상덕 선생은 6·25전쟁때 납북됐다. 사진은 고령 대가야읍 대가야교육원 앞 김상덕선생기념비.
1945년 3월19일 임시정부 문화부장을 맡았고, 11월23일 김구 주석을 비롯한 15명과 함께 귀국했다. 1948년 1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초대 위원장이 됐지만, 반민특위를 해체하려는 이승만의 집요한 방해와 탄압으로 1949년 7월 사임했다.
1950년 6·25 때 납북됐다. 독립을 하고도 분단과 전쟁을 겪은 조국의 운명이 그의 삶을 그렇게 끝내버렸다. 대가야읍 주산길 37 대가야교육원 앞에 있는 선생의 기념비에 참배한다. 묘소는 평양에 있으니 가볼 수가 없다. 아, 이 답답함을 어이하리.
글=정만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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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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