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지~물병골 2km 남짓한 숲길
농민들 논에 물 대기 위해 만들어
깊은 산 기암절벽·맑은 물 '비경'
울진 팬들만 아는 '보석같은' 길
캠핑장·관공농원서 숙박도 가능
"자연을 보라, 자연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라. 자연은 쉼 없이 아이를 단련시킨다"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말처럼, 인간은 문명 속에서 본래 지니고 있던 순수함과 자유를 잃는다. 문명은 편리함을 주지만 동시에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며 마음의 균형을 흔든다.
루소에게 자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스승이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숨 쉬고 느끼며, 잃어버린 자유와 평화를 되찾는다. '자연으로의 회귀'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 삶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주인공도 세상의 온갖 경험과 배움을 거쳐 마침내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고행도, 부귀도, 쾌락도, 지식도 아닌,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진리를 듣는다. 강가에서 그는 "슬픔과 웃음, 선과 악, 이 모든 것이 뒤엉켜 강물을 이루고, 삶의 음악이 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진정한 깨달음은 외부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됨을 깨닫는 순간 찾아온다.
노자는 "강물이 스스로 흐르듯, 인간도 무위로 자연을 따를 때, 그 길이 드러난다"라고 했고, 장자는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처럼, 세상과 나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고 유유자적할 때 마음은 자유롭다"라고 말했다.
탈속한 은둔자처럼 울진의 왕피천 봇도랑길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나 또한 물처럼 흘러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돌 위를 미끄러지는 물빛,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하나에도 세상의 이치가 숨어 있다.
왕피천의 물소리를 들으면, 루소의 자연, 헤세의 깨달음, 노자의 무위, 장자의 자유가 하나의 노래로 이어진다. 그 선율은 언어 이전의 리듬으로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잔잔한 파문을 남긴다.
울진 왕피천 봇도랑길은 '보'와 '도랑'이 합쳐진 말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만든 인공수로다. 봇도랑길 일부 구간에는 농민들이 돌을 깎아만든 흔적이 남아있다. 그 물길 위에 삶의 고단함과 땀이 배어있는 듯하다.
◆물길 위에 새겨진 삶의 흔적
왕피천 봇도랑길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옛 물길이다. 지금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산책로가 됐다. '봇도랑'은 물을 끌어오기 위해 만든 전통 인공수로로, '보(洑)'와 '도랑'이 합쳐진 말이다. 일부 구간에는 농민들이 정과 망치로 돌을 깎아 만든 흔적이 남아 있어 그 물길 위에는 삶의 고단함과 고통, 피와 땀이 배어 있다.
절벽을 뚫어 만든 '동굴 봇도랑'에 들어서면 좁은 수로 속 어둠과 빛이 교차하며 오랜 세월의 인고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물을 생명처럼 여겼던 사람들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돌벽에 남은 작은 쐐기 자국조차 그들의 숨결처럼 다가온다.
절벽을 뚫어 만든 울진 왕피천 '동굴 봇도랑'에 들어서면 좁은 수로 속 어둠과 빛이 교차하며 오랜 세월의 인고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물을 생명처럼 여겼던 사람들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산이 품고, 물이 노래하는 길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1224'를 입력하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입구에서 "이 길이 맞나?"하고 낮게 읊조릴 수 있다. 좁은 비포장길을 조금 더 가면 왕피천이 모습을 드러내고 작은 주차장이 반겨준다. 길머리에 들어서면 깊은 산과 맑은 물이 맞닿은 별천지가 펼쳐진다.
왕피천 봇도랑길은 성산지에서 물병골까지 이어지는 왕복 2시간, 2㎞ 남짓한 숲길이다. 왼편에는 웅장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드리워지고, 오른편에는 자갈과 모래조차 함께 흐르는 왕피천이 나란히 이어진다.
걷는 내내 펼쳐지는 풍경은 숨이 멎을 듯한 비경이다. 깎아지른 기암절벽 아래, 수정처럼 맑은 강물은 바닥까지 비치며 고요히 숨 쉰다. 햇살이 물결 위를 반짝이며 춤추고,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은 감미로운 세레나데처럼 나그네의 가슴을 파고든다. 그 순간마다 문득 생각한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은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완벽을 노래한다."
계절마다 다채롭게 옷을 갈아입는 울진 왕피천 봇도랑길은 2시간 남짓 이어지는 숲길이다. 왼편에는 웅장한 산줄기가, 오른편에는 왕피천이 나란히 이어지는 비경에 숨이 멎을듯 하다.
봄이면 돌단풍이 바위를 타고 오르며, 여름이면 미루나무 그늘에 은어가 헤엄친다. 가을이면 단풍잎이 물결 위로 춤추고, 겨울이면 소(沼) 위에 눈꽃이 소복이 내려앉는다. '백발소', '까치소', '구보소' 같은 소들이 이어지며 마을의 기억을 전한다. 수로 옆 좁은 흙길에는 옛 돌담이 남아 있고, 바위틈에는 다양한 약초와 야생화가 자란다. 도시의 먼지를 털고 나온 발걸음은 어느새 느려지고, 물소리와 새소리, 자신의 숨소리까지 자연의 일부가 된다.
◆사람과 자연, 서로를 비추는 마음의 길
봇도랑길은 단순한 수로를 넘어 역사의 지층을 잇는 인간의 흔적이자 무위자연을 사유하는 철학적 통로다. 세속의 박물관에서 옛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유물을 바라보듯, 이곳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통해 '지금 여기'의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인위적 구조물은 최소화되고, 벤치와 나무데크만이 놓여, 태고의 순수성이 지배하는 공간 속에서 시간의 깊이는 더욱 명징해진다.
일제강점기, 생존을 위해 바위를 깨며 물길을 열었던 처절한 노동, 풍요를 염원하던 들판의 기억, 지금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호흡이 만날 때, 시간은 선형이 아닌 순환으로 흐른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문명적 의지를 읽고 인간의 내면에서 천지 만물의 질서를 느끼는 순간, 봇도랑길은 영혼의 기록을 담은 아카이브로 승화된다. 걸음이 멈추는 지점마다 헤세의 '강물 소리' 같은 작은 깨달음이 번뜩인다.
태초의 푸른 생명력을 방류하는 울진 왕피천. 왕피천의 흐름은 쉼 없이 생성을 반복하며 사람과 자연을 잇는다.
길의 종점에서 왕피천은 태초의 푸른 생명력을 방류한다. 투명한 수면 위로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구름이 비치고, 그 물빛 속에서 나의 자아는 우주의 일부로 녹아든다. 말이나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침묵의 언어로 자연은 인간의 마음을 위로한다. 돌 위에 각인된 세월의 무늬는 인류의 실존적 노력을 끌어안고, 물결 위에 비친 하늘은 다시 우리의 내면 풍경을 비춘다.
유전(流轉)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내 삶의 시간'이며, 반사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내 마음의 투명도'다. 왕피천의 흐름은 오늘도 쉼없는 생성을 반복하며 사람과 자연, 과거와 현재, 나와 세계를 하나로 잇는다. 그 흐름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존재의 조화를 배운다.
◆숲과 물이 전하는 쉼의 길
봇도랑길을 걸은 뒤, 주변 쉼터에 잠시 머물러 보자. 깊은 산골의 굴구지마을은 맑은 계곡과 금강송 숲이 어우러진 전통 산촌으로, 고요한 환경 속에서 진정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
계곡 옆 숲 속 캠핑장은 물소리를 배경으로 여유로운 하룻밤을 보내기 좋은 힐링 공간이다. 왕피천 관광농원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자연의 품에서 캠핑과 숙박을 즐기며, 가족과 친구와 함께 왕피천의 감동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다.
◆물결 따라, 깨어나는 마음
길의 마지막 구간에 다다르면 왕피천의 물빛은 신비로운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햇살이 물결 위를 산책하고, 그 반사된 빛은 절벽을 타고 숲속으로 스며든다. 청량한 공기 속에서 발끝에 닿는 돌과 자갈, 모래의 감촉, 귓가를 스치는 물소리, 나뭇잎 사이로 잔잔히 흐르는 바람까지 모두 살아 있는 생명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울진 왕피천 봇도랑길의 톨탑. 동해의 품 안에 숨은 울진,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보석이 왕피천 봇도랑길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조화 속에서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머릿속 무거운 생각들은 강물에 흩어지듯 사라진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문득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봇도랑을 만들던 사람들이 물길을 내기 위해 돌을 깼듯, 우리 또한 각자의 삶을 일구기 위해 보이지 않는 벽을 두드리며 나아간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모든 분투가 잠시 멎고, 삶의 무게는 바람 속에 흩어진다. 자연은 말없이 가르친다. 모든 것은 흐르고,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바라본다.
왕피천 봇도랑길은 마음의 물꼬를 트는 길이며, 잃었던 '자연의 시계'를 되살리는 여정이다. 강은 오늘도 유유히 흘러가며, 그 물결 속에서 사람은 만물의 근원과 자신이 닿아 있음을 깨닫는다. 길을 지나 세상으로 돌아설 때, 마음속에는 투명한 강물이 흐르고 삶의 속도를 다시 조정해 주는 태고의 숨결이 머문다. 길의 끝자락, 왕피천은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하다. 돌의 침묵, 물의 악보, 바람의 서사가 하나의 우주로 수렴된다.
동해의 품 안에 숨은 울진,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보석이 왕피천 봇도랑길이다. 손병복 울진군수가 말했듯 "울진 팬들만이 아는 특별한 길"이다. 이곳을 아끼는 사람들은 굳이 소문내지 않는다. 다만 마음이 맞는 이와 함께 걸으며, 강가에서 작은 돌탑 하나를 쌓는다. 그리고 자연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던 순간을 가만히 마음에 새긴 채 천천히 발길을 돌린다. 마음속엔 또 하나의 봇도랑이 흐르기 시작한다.
글=윤일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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