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강, 형산강] 10. <끝> 교류와 산업의 중심, 천년의 삶을 간직한 강

  • 박관영·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 |
  • 입력 2025-12-09 19:10  |  발행일 2025-12-09
강 이쪽 부조장터, 저쪽은 동강서원…밥벌이·삶의 품격 만나 흐르다
형산강 역사문화관광공원 일대는 형산강 본류가 경주에서 포항으로 방향을 틀며 가장 넓게 숨을 고르는 지점으로, 강동-안강-연일을 잇는 옛 교류의 길이 시작되던 자리다.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는 과거의 물길과 현재의 도시 동선을 겹쳐 보여준다.

형산강 역사문화관광공원 일대는 형산강 본류가 경주에서 포항으로 방향을 틀며 가장 넓게 숨을 고르는 지점으로, 강동-안강-연일을 잇는 옛 교류의 길이 시작되던 자리다.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는 과거의 물길과 현재의 도시 동선을 겹쳐 보여준다.

형산강 역사문화관광공원 일대는 형산강 본류가 경주에서 포항으로 방향을 틀며 가장 넓게 숨을 고르는 지점으로, 강동-안강-연일을 잇는 옛 교류의 길이 시작되던 자리다.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는 과거의 물길과 현재의 도시 동선을 겹쳐 보여준다.

형산강 역사문화관광공원 인근

조선 3대 시장 꼽히던 부조장터

보부상 김이형 공 기리는 비석

도로 하나만 건너면 동강서원

경제·학문을 한몸처럼 품은 강

"로이 끄라통(Loy Krathong)이라고 들어봤어? 태국 사람들은 음력 12월 보름날 밤이면 강물 위에 작은 바구니를 띄워 보내. 바구니가 흘러가는 방향이나 속도, 바구니 안의 불빛이 얼마나 오래 남아 있는지를 보고 새해의 길흉을 점치곤 하지."


벌써 12월이다. 이곳은 형산강 역사문화관광공원. 경주 토박이 화가가 강물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을 꺼내자 연말연시 이벤트에 일가견이 있는 문화기획자는 기다렸다는 듯 세계의 연말 풍습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고대 바빌론 사람들은 미래를 묻기 위해 별을 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건 유프라테스강의 흐름이었대. 강이 어느 방향으로 갈라지고 어디서 불어나느냐에 따라 도시가 번영할지, 전쟁이 닥칠지, 왕조가 교체될지 예언자들이 그 징조를 읽었다는 거야."


어디 그뿐일까. 이집트에는 '나일미터(Nilometer)'라고 해서, 나일강의 수위를 정밀하게 측정해 한 해의 풍년과 흉년은 물론 세금의 수준과 축제의 날짜까지 예측했다고 한다. 강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다가올 운명을 드러내는 창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경주의 2026년은 어떨까. 어쩌면 도시의 미래는 도시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만든 강이 이미 선택해 놓은 길을 제대로 읽어내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다시 강을 바라보았다. 거기, 미래의 풍경이 있다.


형산강 역사문화관광공원 한쪽에는 형산강을 따라 내륙과 해안을 오가던 보부상의 발자취가 조형물에 새겨져 있다. 이 물길은 영일만-부조장-안강-경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교역망의 실제 노선이었고, 소금장수의 배와 포목장수의 걸음이 도시의 생업을 움직이던 경제의 동맥이었다.

형산강 역사문화관광공원 한쪽에는 형산강을 따라 내륙과 해안을 오가던 보부상의 발자취가 조형물에 새겨져 있다. 이 물길은 영일만-부조장-안강-경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교역망의 실제 노선이었고, 소금장수의 배와 포목장수의 걸음이 도시의 생업을 움직이던 경제의 동맥이었다.

◆동해로 열린 수로, 부조장


"175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여기 큰 시장이 섰다는데 우리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강에는 황포돛배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뭍에선 짐을 운반하는 말이 수백 필이요, 소가 끄는 마차에 마부들만 수백 명,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은 무려 3천 명이나 됐대. 장이 서는 날이면 뭍이고 물이고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하지."


형산강이 포항 쪽으로 몸을 틀며 가장 넓게 숨을 고르는 곳, 지금은 형산강 역사문화관광공원이 자리한 이 인근(경주 강동면)에 대구장, 김천장과 함께 경북의 3대 시장으로 손꼽히던 부조장(扶助場)이 있었다.


바다에서 출발한 소금과 해산물은 형산강을 타고 안강과 양동, 경주 읍성까지 깊숙이 운반됐고, 내륙의 곡물과 삼베·목화·목재는 같은 강길을 따라 동해로 실려 내려갔다. 겨울이면 포항에서 올라온 소금 포대들이 강가에 쌓이고, 여름 장에는 경주의 들에서 난 참깨·콩·삼이 강가의 창고에 그득했다. 경주에서 온 농부와 안강의 상인, 포항의 어부, 양남·양북에서 올라온 보부상들이 뒤섞여 어찌나 붐볐던지 나중에는 영일만 형산강 포구에도 시장을 분설(分設)했다는 기록(경주부읍지, 1789~1791년)이 있다.


"그래서 처음 들어섰던 경주의 부조장을 윗부조장이라 하고, 분설된 포항 부조장은 아랫부조장이라 했대. 시장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큰 배도 드나들기 쉬운 영일만에도 장이 서게 된 건데, 한때 조선의 3대 시장으로 불릴만큼 전국적 규모로 성장했나 봐."


강가에는 물건을 잠시 맡기는 '객주(客主)'와 보부상이 머무는 여관들도 줄지어 들어섰는데, 이쯤되면 이 장터에도 질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부상들의 우두머리가 등장한다. 부조장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보부상 김이형이다.


부조장터 유적지와 좌상대 도접장 김이형유공비. 연일 부조장은 조선 3대 시장으로 기록된 대규모 교역지였다. 유공비는 시장 질서를 지키고 상권을 보호했던 보부상 지도자 김이형의 공을 기린 것으로, 장터와 물길 그리고 공동체가 서로를 지탱하며 형산강 유역의 경제 문화를 만들어냈음을 보여준다.

부조장터 유적지와 좌상대 도접장 김이형유공비. 연일 부조장은 조선 3대 시장으로 기록된 대규모 교역지였다. 유공비는 시장 질서를 지키고 상권을 보호했던 보부상 지도자 김이형의 공을 기린 것으로, 장터와 물길 그리고 공동체가 서로를 지탱하며 형산강 유역의 경제 문화를 만들어냈음을 보여준다.

"좌상대, 도접장, 김이형, 유공비!"


형산강 역사문화관광공원 한 쪽, 한자로 쓰여있는 그의 비석을 몇 번이나 읽고 검색한 뒤에야 가까스로 띄어쓰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보부상(褓負商)은 보자기에 물건을 싸서 팔러다니는 봇짐장수인 '보상(褓商)'과 부피가 큰 짐을 지게에 지고 다니는 등짐장수인 '부상(負商)'으로 나뉘는데, 부상을 '좌상(在商)'이라고도 부른다. 또 그 좌상들의 조직을 좌상대(在商隊)라고 한다.


도접장(都接長)은 모든 보부상을 통솔·지휘하는 대표를 뜻한다. 한마디로 모든 보부상을 대표하는 사람의 비석이 이곳에 세워져 있다는 것은 당시 경주 부조장이 전국 보부상 네트워크의 본부급 거점이었다는 뜻이다. 1864년에 건립된 유공비의 비문은 그의 인품에 관해 이렇게 증언한다.


'부조에는 물이 차고 넘치고 은혜로운 나루엔 물결이 양양하구나. 덕은 쌓여서 어질고 두터우며 성품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했다. 더러운 것은 남김없이 묻어 버리고 항상 떳떳하게 장사를 했나니 상과 벌을 중하게 여겨 법과 규율이 바로 서고 빛나더라…'


그 시대 형산강의 보부상들은 단순한 짐꾼도 상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물건을 옮기며 경제 정보, 정치 소식, 타지의 문물까지 함께 운반했다. 김이형은 그렇게 벌어들인 재산을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기부했고, 보부상 단체를 넘어 지역주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형산강이 만든 장터와 수로, 그것은 그 자체로 경주만의 향촌문화를 형성했다.


동강서원은 경주가 배출한 성리학자 우재(愚齋) 손중돈(1463~1529)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5도 유생이 뜻을 모아 창건한 곳이다.  고종 5년(1868) 훼철됐다가 1960년 묘우와 강당이 다시 세워졌으며  1986년 동재·서재·신도비각, 1999년 탁청루가 복원됐다. 강을 사이에 두고 장터와 서원이 마주 선 풍경은 형산강이 경제의 강이자 학문의 강이었던 이중의 삶의 공간임을 증명한다.

동강서원은 경주가 배출한 성리학자 우재(愚齋) 손중돈(1463~1529)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5도 유생이 뜻을 모아 창건한 곳이다. 고종 5년(1868) 훼철됐다가 1960년 묘우와 강당이 다시 세워졌으며 1986년 동재·서재·신도비각, 1999년 탁청루가 복원됐다. 강을 사이에 두고 장터와 서원이 마주 선 풍경은 형산강이 '경제의 강'이자 '학문의 강'이었던 이중의 삶의 공간임을 증명한다.

◆강이 만든 향촌의 학교, 동강서원


형산강 역사문화관광공원에서 도로 하나를 건너면, '왜 이런 곳에 서원이 있지?' 싶은 도롯가에 동강서원(東江書院)이 있다.


이 서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1695년, 조선 숙종 21년. 경주의 유생들은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을 기리기 위해 강을 마주보는 이 자리를 택했다. 경상·충청·전라·함경도 관찰사와 한성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내며 청백리로 이름 났던 손중돈은 관직보다 학문과 후학 양성을 삶의 중심에 둔 인물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 서원의 이름이야. 동강, 말 그대로 '동쪽의 강'이라는 말인데, 경주의 서원들 중 '강(江)'을 이름에 넣은 곳은 여기 뿐일 걸? 전국적으로 봐도 서원은 대체로 산이나 바위, 누각, 덕·도·인·성·문과 같은 유교적 가치를 따라 이름 짓는데… 사실 강은 어찌보면 고정된 형태가 없잖아? 동선이나 흐름과 관련된 의미가 커서 서원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는 못 본 것 같은데."


서원 마루에 앉아 문화기획자가 의외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름 자체가 강을 품고 있고, 서원과 장터가 강을 매개로 마주보는 위치라니!


"생각해 봐, 서원이 향촌의 지적 중심지라면 장터는 향촌의 경제 중심지잖아? 강을 따라 장터가 생기고 강을 따라 상인들이 모였다면, 동강서원은 그 강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공간 아니었을까?"


강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시장이, 다른 한쪽에는 서원이 서 있는 풍경. 부조장과 동강서원을 함께 바라보면 형산강의 역할이 한층 입체적으로 보인다.


낮에는 장터에서 물건과 정보가 오가고, 밤에는 서원에서 학문과 의리가 논의된다. 형산강은 '경제의 강'이자 '학문의 강'이기도 했던 이중의 삶의 공간이었다. 그 강을 건너다니며 사람도 자연스럽게 경제의 언어와 삶의 언어, 이익의 세계와 의미의 세계를 오가게 됐을 것이다. 형산강은 그렇게 한 도시의 '밥벌이'와 '삶의 품격'을 동시에 떠받친 강이었다.


형산강 중류를 잇는 강동대교는 경주·포항을 연결하는 주요 산업축으로, 조선 후기 보부상 이동로와 거의 동일한 선형을 따라 놓여 있다. 과거의 보부상들이 형산강의 물길을 따라 짐을 옮겼다면, 오늘날의 화물차와 산업시설은 강을 가로지르는 교량과 도로를 따라 물자를 주고 받는다.

형산강 중류를 잇는 강동대교는 경주·포항을 연결하는 주요 산업축으로, 조선 후기 보부상 이동로와 거의 동일한 선형을 따라 놓여 있다. 과거의 보부상들이 형산강의 물길을 따라 짐을 옮겼다면, 오늘날의 화물차와 산업시설은 강을 가로지르는 교량과 도로를 따라 물자를 주고 받는다.

◆천년의 강이 선택한 미래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어. 흘러가는 물은 과거-현재-미래가 한몸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에 강을 '시간의 형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지. 너무 멋진 표현이지 않아? 흐르는 물은 지나간 시간이면서,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불러오는 흐름이기 때문에, 이 강을 미래가 현재에 도달하는 통로로 이해한 거지."


올해의 마지막을 앞두고 우리가 다시 형산강을 바라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경주 형산강은 이미 천 년 동안 도시의 중심이었고, 습지와 수변공간을 통해 이제 다시 지속가능한 '도시 성장축'으로 돌아오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강을 통해 미래를 점쳐 보지만, 미래는 예견의 개념이 아니라 선택의 개념이다. 그리고 선택은 언제나 '오늘'에 일어난다. 오늘의 경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지금 이 순간의 기준점이자 미래를 보여주는 물결. 그곳에 '미래의 형상'으로, 형산강이 있다. 그 미래는 오래된 미래이면서, 오늘을 바꾸는 미래이며, 다가올 미래다.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주시>


기자 이미지

박관영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경북지역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