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10] 격변기 영남내륙 경제의 중심

  • 임훈 박현주 손동욱
  • |
  • 입력   |  수정 2014-11-21  |  발행일 2014-07-10 제면
서울과 영남 잇는 교통 요지…일제 수탈 저항하던 ‘상인혼’ 서렸네
20140710
1900년대 초 김천시내 전경. 김천시내 한가운데를 경부선 철도가 가로지르고 있다. 경부선 철도 건설을 계기로 일본의 경제침탈은 가속화됐다. <김천상공회의소 제공>
20140710
일제강점기 당시 김천시 모암동 상가의 모습. <김천상공회의소 제공>


김천은 구한말 전후부터 산업화 이전까지 영남 서부권 경제의 중심이었다. 낙동강의 지류 감천을 끼고 형성된 김천장은 ‘전국 5대 장시’에 꼽힐 정도로 번성했다. 1906년에는 서울·인천·부산·목포·마산·평양·대구에 이어 상업회의소의 문을 열기도 했다.

김천의 화려한 과거는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다. 온갖 물산과 사람이 교차하는 중심점에 있었던 것이다. 김천은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주요 길목인 데다, 호남·충청권과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장시가 발달할 천혜의 조건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으로 온갖 물산을 수송하는 등 수운(水運)의 덕도 톡톡히 볼 수 있었다.

전국 최대 규모의 우시장(牛市場)으로 유명했다. 농기구 제작 등 전근대적인 제조업과 유기 등 전통적 가내공업도 발달했다. 전국의 상인들이 김천으로 몰려들었고, 도시는 활력이 넘쳤다.

경제적 성장만큼 시련도 빨리 찾아왔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외세의 경제적 침탈을 먼저 겪었다. 김천의 경제인들은 저항을 다짐하며 민족자본을 지키려 애썼지만 녹록지 않았다. ‘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10편은 격동기 향토경제를 지키려 애썼던 김천 경제사(經濟史)에 관한 이야기다.

동서남북 물산 모이던 김천장
전국 최대 우시장으로도 유명
일제강점기 상권 침탈에 신음
상업회의소 조직으로 대응

◆속도가 붙은 일제의 경제침탈

1900년대 초, 김천은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중심인 김천은 영남은 물론 조선팔도에서도 보기 드문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1908년 김천장의 매출액은 대구 서문시장에 이어 전국 두 번째 규모였다.

김천장에는 영남 북부지역을 비롯해 충청도와 호서지방의 물산이 모여들었다. 보부상들은 제집 드나들 듯 김천을 오가며 이익을 남겼다.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김천우시장 역시 소몰이꾼들의 발걸음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장날이 되면 전국의 농촌에서 모여든 장꾼들로 인해 김천장 곳곳은 인사태(人沙汰)를 이루기도 했다.

일찍이 김천은 동서남북으로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관로가 발달했다. 관로는 찰방역인 김천역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새였다. 김천이 갖춘 여러 조건은 철도의 입지로도 충분했고, 김천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도 자연스레 커졌다.

1901년, 경부선 철도 공사를 위해 일본 건설업체 ‘아라이구미’가 김천장에 사무실을 열면서 일본인의 본격적인 김천 진출이 시작됐다. 같은 해 3월에는 일본인 모리모토가 김천에 잡화점을 열고 철도 건설인부를 상대로 물건을 팔았다. 일본인 쓰지다 역시 일본인을 위한 우편취급소를 김천장에 설치했다.

경부선 철도 김천구간의 공사는 1904년 마무리됐지만 일본인들은 김천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노다지나 마찬가지인 김천의 상권을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대자본을 끌어들인 일본인들은 연이어 김천에 정착, 지역 상권을 속속 장악해 나갔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본인들의 김천지역 상권 침탈은 본격화됐다. 일본인들은 김천장의 규모가 크고 농산물 등 상품이 풍부하다는 점에 착안했다. 실제로 고쿠라라는 일본인은 김천에서 콩을 사들여 일본에 수출해 큰돈을 벌어들였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일본인들에게 김천은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나 마찬가지였다.

김천으로 몰려드는 일본인의 수는 점점 늘었고, 조선 상인들은 점차 시장의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김천장의 토박이 상인들은 현재의 김천시 감호동인 ‘아랫장터’로 밀려나고 말았다.

◆향토경제를 사수하라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소.” 경부선이 개통한 지 1년 남짓한 시기, 김천의 상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간 왕성한 상업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이가 적지 않았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일본 상인들의 공격적인 사업 확장으로 조선 상인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우리가 힘을 합쳐 김천을 지켜내야지요.” 함께 있던 상인들은 목소리를 높였고 곧 뜻을 모았다. 김천 경제인들은 상공인 단체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일본의 침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당시는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수많은 조선 상공인 역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국 규모의 장시를 지닌 김천의 사정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1905년의 화폐개혁은 조선 상인들의 숨줄을 조여왔다. 일본인 재정고문 목하전(目賀田)이 조선경제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을 다지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조선의 상단들은 혼란에 빠졌고, 도산하는 점포가 속출했다.

이에 각 지방의 조선 상공인은 상업회의소를 조직, 일본의 경제침탈에 대응하려 애썼다. 1906년 3월, 김천에서도 김천상업회의소가 문을 열었다. 향토 상공인들을 규합하기 위해서였다. 안타깝게도 김천상업회의소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정확한 해산연도는 알 수 없지만 해산되었다는 기록만 옛 문헌에 남아있다.

아마도 일제의 방해 때문이라는 것이 향토사학계의 추측이다. 이후에도 일본인 상업회의소가 조선의 상업회의소를 통합하는 등 조선의 상공인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김천의 상공인들은 일본인 위주의 상공인단체를 상대로 저항했다. 이들은 조선 상인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쓴 끝에 1945년 광복을 맞았다. 덕분에 현재의 김천상공회의소는 한 세기의 역사를 품은 상공인 단체로 남아 지역 상공인들을 하나로 묶고 있다.

윤용희 김천상공회의소 회장은 “김천상공회의소가 100여년의 역사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상공인들의 숭고한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윤용희 김천상공회의소 회장
참고문헌=‘김천상공회의소 105년史’

20140710
우시장의 번성과 궤를 함께했던 김천 우마차는 황금시장 내 삼화철공소에서 생산됐다. 옛 철공소 주변은 지금도 시장으로 성업 중이다.


우마차 만들던 삼화철공소, 근대화 물결에 자취 감춰

김천은 전국적으로 우시장과 더불어 우마차 생산으로 유명했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우마차는 모두 사라졌지만, 김천지역 원로들의 기억 속에는 김천장을 누비던 우마차의 모습이 생생하다. 우마차 생산은 우시장의 전성기와 궤를 같이한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김천 우마차의 생산은 절정에 달했다.

윤용희 김천상공회의소 회장은 “우마차의 생산은 현재 황금시장 입구 좌측에 있던 삼화철공소에서 이뤄졌다. 삼화철공소의 종업원은 15명가량이었는데,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우마차는 단순한 구조였지만 제작하기에는 까다로웠다. 당시만 해도 금속베어링 등을 우마차에 사용하지 않았기에 사람의 손이 많이 갔다. 우마차 본체는 아카시아 나무로, 바퀴살은 단단한 참나무로 만들었다. 특히 바퀴를 만드는 데 공을 쏟았다. 나무 바퀴살에 일일이 철판을 덧대어 견고한 바퀴를 만들었다. 완성된 우마차의 크기는 2.5~3m의 길이에 1.2~1.3m의 너비였다.

단단한 바퀴살과 관련한 일화도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김천지역은 좌우의 이념 대립이 심했다. 당시 삼화철공소의 바퀴살을 몽둥이 삼아 상대진영에 백색테러를 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1960년대 이전까지 우마차의 인기는 꽤 높았다. 이후 새마을운동 등 본격적인 근대화 물결이 들이닥치면서 우마차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윤 회장은 “우마차가 아니면 직접 등짐을 지거나 비싼 요금을 내고 자동차를 이용해야 했다. 그나마 우마차가 있는 집은 부잣집이었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