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9]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집 가실성당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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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12   |  발행일 2014-09-12 제11면   |  수정 2014-11-21
붉은 벽돌 쌓아올린 성당…모진 풍파에도 자리를 지켰다

‘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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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의 가실성당(佳室聖堂)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로, 1895년 9월경 설립되었다. 오랫동안 ‘낙산성당’으로 불려오다 2005년부터 마을의 본래 이름을 따 가실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 스토리 브리핑

가실성당(佳室聖堂)은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에 있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의 천주교회로, 1895년 9월경 설립되었다. 낙산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오랫동안 ‘낙산성당’으로 불려오다가 2005년 가실(佳室)이라는 마을의 본래 이름을 되살려 가실성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초대 본당 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의 파이아스 가밀로(C. Pailhasse, 한국명 하경조) 신부이다. 가밀로 신부는 한국에 입국, 칠곡군 지천면 신나무골 근처에 천주교회를 세울 장소를 물색하던 중, 낙동강 수로를 이용해서 대구·안동·부산 방면으로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장소인 왜관읍 낙산리를 택해 가실성당을 설립하였다. 천주교 조선교구로서는 11번째이자 대구교구에서는 계산성당 다음이다. 특히 주보성인(主保聖人) 안나의 상은 1924년 이전에 프랑스에서 석고로 제작되었는데, 안나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또한 성당과 사제관은 2003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다.


#1. 복음의 시작, 성섭

여름내 웃자란 풀을 베어 쌓아둔 뭉치에서 섬 냄새가 났다. 그 곁을 사람들이 분주히 오고 갔다. 왜관의 낙동강 가에 있는 작은 마을 낙산리는 조선시대부터 가실 나루터와 강창 나루터가 있어서 해상 교통이 빈번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의 소박한 어느 집. 대나무 창창한 사랑채에서 책을 읽던 한 사내의 시선이 문지방으로 가 닿았다.

“귀뚜라미다!” 그의 자글자글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사람들이야 하 수상한 세월 속에 시달리든 말든 자연은 무심한 듯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는구나.” 성섭이었다. 성섭은 17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시에 이곳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창녕성씨(昌寧成氏) 집안의 실학자이다. 그런데 당최 과거 운이 따라주지 않는지라 몇 번이나 낙방한 후에야 과거를 포기하고 글공부에만 전념하던 중이었다.

성섭은 다시 성경으로 눈을 돌렸다.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인 후 그의 일과는 성경에서 시작해 성경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복음은 그의 집안 전체에 단단히 새겨지고 있었다. 그렇게 언제나 복음에 매진하던 성섭은 1788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후손들의 신앙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와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에 걸쳐 그의 후손 일부가 성주 홈실로 피란을 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가실에 남아서 조용히 신앙생활을 계속하던 집안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성섭의 증손자인 성순교(成舜敎, 1792∼1858)였다. 그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와 막역한 친구 사이로 독실한 신자였다. 젊은 시절,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갔을 적에는 홀로 남아서 세계일주를 하였는데, 심지어 이스라엘까지 다녀왔다는 행장이 남아있다. 이런 사실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성순교는 경신박해(庚申迫害, 1859) 때 가실을 떠나 상주로 피란 갔다가 1860년 순교(殉敎)하였다. 순교(舜敎)와 순교(殉敎), 이름을 꼭 닮은 삶이었다. 하여 현재 성당의 이름인 ‘가실(佳室)’은 마을의 본래 이름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집’, 즉 성순교 가문의 집을 뜻하기도 한다.


#2. 성당의 시작,낙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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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실성당 내 성모당의 모습. 1995년 100주년 기념사업 때 조성되었다.

“제가 물색해 보니 경상도 곳곳을 순회 사목하러 가려면 낙동강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더군요. 게다가 이곳은 성순교의 순교를 담은 곳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제 이곳을 통해 복음을 넓고 깊게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제법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동학혁명도 끝이 났으니 저희들도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신부님.”

신자들이 너도나도 입을 모았다. 그들은 신자이기도 했지만 동지이기도 했다. 동지란 목적이나 뜻이 서로 같은 그런 사람을 일컫는다. 좀 더 풀자면 ‘동지’에서 ‘지’를 눈여겨보면 되는데, 그것은 같다는 의미의 ‘동(同)’보다 뜻·마음·본심이라는 뜻을 품은 ‘지(志)’가 훨씬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파란 눈의 신부 앞에서 그들은 그렇게 하나가 되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형제, 자매여!”

그리고 이어진 기도. 신부의 간절함이 절절했다. 바로 파이아스 가밀로 신부였다.

파리외방선교회의 파이아스 가밀로는 초대 본당 신부로 한국이름은 하경조이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층 자유롭게 포교활동을 하던 시기인 1894년, 조선으로 나와 칠곡 신나무골에 도착하였다. 그곳엔 이미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현재의 칠곡군 지천면 연화2리에 위치한 신나무골에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을해박해(乙亥迫害, 1815) 때, 청송 노래산·진보 머루산·일월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오면서부터이다. 당시 가족들과 신자들이 대구와는 하루 거리로 가까우면서 임진왜란 때의 피란지인 신나무골에 와서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옥바라지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정해박해(丁亥迫害, 1827)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1836년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나와서 포교 활동을 할 때 한반도 남쪽 지방을 맡은 샤스땅 신부가 순회 선교를 하였는데 이때 나무 밑에 움막을 짓고 얼마간 살았기에 ‘신부님이 나무 밑에서 움막을 짓고 피란을 했다’고 하여 신나무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전한다.

이곳에서 파이아스 가밀로 신부는 신자들의 적극적인 도움에 힘입어 1895년 9월, 낙산에 정식으로 천주교회를 세웠다. 천주교 조선교구로서는 11번째, 대구교구에서는 계산성당 다음으로 설립된 성당이었다. 그리고 본당 관할로 칠곡·성주·김천·선산·상주·문경·예천·군위·영천 지방 등 31개 공소를 두고, 본당 신부가 매년 적어도 말을 타거나 도보로 2회 이상 순회하면서 사목을 했다.

현재의 가실성당 건물은 1922~23년에 지어졌다. 건축양식은 신(新)고딕 양식을 띤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설계자는 프랑스인 박도행(V. L. Poisnel) 신부이다. 박도행 신부는 1896년부터 1925년까지 무려 30년 동안이나 대구 계산성당과 왜관성당을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의 많은 교회 건축물을 설계한 사람이다. 특히 가실성당의 공사는 중국 기술자들이 붉은 벽돌을 현장에서 구워서 사용했다. 당시 본당 신부였던 프랑스인 여동선(Victor Louis Tourneux, 1911~44) 신부가 망치로 벽돌을 한 장씩 두드리면서 일일이 다 확인을 하며 세웠다고 전해진다. 제일 좋은 벽돌은 성당에, 그다음 것은 사제관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버린 것이다. 그리고 주보성인(主保聖人) 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로서, 석고로 제작된 안나상은 프랑스에서 들여왔으며 안나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3. 성당, 그리고 전쟁

본당 왼편 백일홍 나무가 붉디붉은 어느 날, 비가 거칠었다. 창고 양철지붕에선 마치 총알이 튕겨나가는 듯 땅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제로도 전쟁은 치열했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그렇게 수많은 것을 파괴했고, 마을 또한 초토화되었다. 나루터의 배들까지 박살이 난 마을은 처참했다. 성당도 위험했다. 피란을 떠나면서 신자들은 저마다 성당을 염려했다. 하지만 가실성당 건물은 온전히 살아남았다. 인민군의 병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1952년부터의 사목은 전쟁을 피해 월남한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신부들이 맡았다.


#4. 복음의 진행형

홀연 하늘에 실이 나타났다. 가늘고 하얀빛이었다. 그 빛이 동쪽에서부터 시작해 서쪽으로 달려가더니 해의 한가운데를 뚫었다. 한창 바느질 중인 옷감 같았다. 흰 비단실을 귀에 꽂은 바늘이 옷감을 통과해 지나가듯 말이다. 그러더니 돌연 해 위쪽에서 붉은 계통의 색실이 곤두서고, 해 아래쪽에서 푸른 계열의 색실이 삐져나왔다. 어, 하는 동안 위쪽의 것은 해를 오른쪽으로 돌아 아래로 내려가 흩어지고, 아래쪽의 것은 해의 왼쪽을 거쳐 위로 올라가 뭉그러졌다. 그리고는 곧 샛별만 한 붉은 점 두 개가 귀처럼 해의 양쪽에서 돋았다. 순간 성당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고, 빛과 진동으로 성당 안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나지막이 출렁거렸다. 곧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육화(肉化)하고, 종내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사명을 띤 신자들 말이다.

가실성당과 사제관은 2003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으며, 대형 십자가는 1964년에 안나상 대신 성당 안 제대에 모시고 있다. 그리고 가실성당은 1990년, 설립 100주년 기념관을 설립하였고 2005년부터는 마을의 본래 이름을 되살려 가실성당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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