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3> 개령·감문면 古塚(고총)의 조성 내력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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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5-20   |  발행일 2015-05-20 제13면   |  수정 2021-06-16 16:45
신라에 병합된 후(4∼6세기) 권력 위임받은 토착세력이 勢 과시 위해 큰 무덤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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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개령면 양천리의 석실고분. 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천리 석실고분은 감문국 장군의 무덤으로도 알려져 있다. 학계에 따르면 신라가 감문국을 정복한 이후에도 감문국 토착세력들은 여전히 영토를 다스리는 세력으로 남았다.

 

 

스토리 브리핑

김천시 개령면과 감문면 일원에는 수많은 고총(古塚·오래된 무덤)이 산재해 있다. 대부분이 감문국(甘文國)의 유적으로, 삼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천의 옛 지명인 금릉(金陵)이 감문국 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금효왕릉(金孝王陵)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김천의 향토 문화 원류로 감문국을 꼽고 있는 사실도 근거가 되고 있다.

반면 사학계에서는 다소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사학계는 “출토된 유물을 볼 때 삼한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감문국 멸망 후인 삼국시대에 조성된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총의 조성시기에 대한 주장은 다소 엇갈리지만, 감문국 지배 세력의 무덤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이에 대해서는 사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3편은 감문국 유적지내 고총의 조성 시기와 그 배경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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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리 석실고분의 입구. 석실의 규모는 길이 2.5m, 너비 1.2m, 높이 1.2m로 직사각형의 상자 모양이다.



#. 패망 후에도 독립성 유지한 감문국 지배세력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의 금효왕릉과 개령면 양천리의 석실고분은 감문국의 대표적 고분이다. 금효왕릉은 감문국의 마지막 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양천리 석실고분 또한 감문국 장군의 무덤으로 불리고 있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양천리 석실고분은 감문국 장군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다. 1967년 양천리 석실고분에서 출토된 금제이식(귀고리), 화살통 장식, 토기 등의 유물은 지배층 계급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양천리 석실고분은 개령면의 고분 중에서는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반면 사학계는 김천시 개령면 일원의 고총은 감문국이 독립된 국가로 있었던 삼한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보고 있다. 감문국이 신라에 병합된 이후인 4~6세기경 정치적 상황에 의해 고총들이 조성됐다는 것.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감문국) 고총의 유물을 살펴보면 삼한시대 형식과는 차이가 있다. 현재 발견된 고총들의 유물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감문국 대표고분’금효왕릉·장군석실
사학계 “출토된 유물 삼국시대 양식”
삼한시대에 조성됐을거란 추정 일축

나말여초 영웅 꿈꾸던 토착세력들은
혼란기 역사적 명분·정체성 확립 노려
“내 조상은 읍락국가 수장” 명분 삼아


김천지역에 고총이 만들어진 이유는 6세기 전까지 신라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3세기 전후 감문국과 같은 경북 일원의 읍락국가들은 신라에 병합되었지만, 신라의 지배력은 지방의 구석까지 미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신라는 각 지역의 읍락국가를 병합했지만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감문국을 다스리던 기존 지배세력에 통치권을 위임해야 했다.

주 교수는 “신라 군사에 의해 하루아침에 나라가 망해버린 터였지만 기존 감문국 지배세력의 힘은 유지됐다. 독립적 군주 체제는 아니었지만 하루아침에 독립성을 잃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신라는 지방 세력을 통한 간접지배를 선택했고, 이 때문에 감문국 지배세력은 패망 이후에도 자신들의 세(勢)를 이어갈 수 있었다.


#.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큰 무덤을 만들다

신라에 병합된 이후 권력을 위임받은 각 지방의 토착세력들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감문국도 마찬가지였다. 감문국의 토착세력들은 큰 무덤을 만들어 신라의 권위를 위임받은 권력자임을 과시하려 했다. 비록 자신들의 나라를 무너뜨린 신라가 부여해준 권력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독자적 세력을 과시하고, 여전히 자신들이 그 지역의 주인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때문에 감문면 삼성리의 금효왕릉과 개령면 양천리 석실고분이 군주나 장군의 무덤이 아니고, 감문국 지배세력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사학계의 의견이다.

비슷한 시기 감문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큰 무덤을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신라의 지방 세력자들은 중앙에 대항하기 위해 부를 축적하고 무덤을 만들었다. 이러한 지방세력의 무덤은 곳곳에 생겨났다. 대구의 경우 달성공원과 비산·내당동 등지에도 오래된 무덤이 있다. 물론 독립 세력이 아닌 지방 토호세력의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 세력들이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만들던 현상은 6세기에 이르러서야 멈춘다. 신라의 중앙집권화가 어느덧 완성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신라는 각 지방에 지방관을 직접 파견했고, 더 이상 신라 서라벌의 것과 비슷한 모양새의 무덤은 생기지 않았다. 반독립 상태의 지방세력을 제압한 신라가 비로소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 나말여초 시대 감문국…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나말여초(羅末麗初·신라말 고려초)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은 감문국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한 번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통일신라가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하고 후삼국 시대에 접어들 즈음 경북지역을 포함한 한반도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때 각 지역의 토호세력들은 중앙정부가 약해진 틈을 타 스스로를 장군으로 칭하고 삼국의 쟁패자가 되려 했다. 이러한 지방 세력 중 잘 알려진 사례가 바로 상주 호족 아자개(阿玆蓋)의 아들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이다. 또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의 아들로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나 스스로 건국의 길을 택한 궁예(弓裔)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 외에도 북원의 양길(梁吉), 서남해의 해상세력으로 견훤의 편에 선 능창(能昌·일명 수달) 같은 지방세력이 있었다. 또한 고려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송악의 왕륭(王隆)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력이 신라와 거리를 두고 스스로 살 길을 도모했다. 바야흐로 분열의 시대가 도래했고,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는 시기였다. 감문국의 지배세력도 마찬가지였다.

나말여초의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각 지역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확립해야 하는 계기가 됐다.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 했던 토착세력들은 독립의 명분을 찾기 위해 읍락국가의 역사를 명분으로 삼았다. 자신들의 조상 또한 서라벌과 같은 읍락국가의 수장이었으니 왕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논리였다.

‘감문국 유적지의 오래된 무덤들이 삼한시대에 조성된 것이다’라는 주장이 나온 이유도 나말여초의 정치적 혼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낙동강 유역에서 여러 세력이 발호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김천의 토호세력 또한 신라에 의해 진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발호한 세력들이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고려가 건국됐고, 견훤의 후백제는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참고문헌= ‘(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 자문단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학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공동기획 :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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