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8> 감문국의 山城-속문산성<상>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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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6-24   |  발행일 2015-06-24 제13면   |  수정 2021-06-16 17:54
속문산성서 끝까지 항전…백성들의 원혼은 흰구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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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낙동강 방면의 모습. 속문산성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백운산에 위치해 사방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다.

 

 해발 600여m에 흙·돌로 쌓은 산성 
 향토사학계 “삼한때” 학계 “삼국때”
 감문국 멸망 전후로 축조시기 異見

 

“감문국 4천 인구로는 축성 불가능”
 기와 파편 등 유물 ‘신라의 城’무게
 향토사학계 “勝者역사에 가려” 반론


◆ 스토리 브리핑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의 주요유적 중 하나는 산성(山城)이다. 김천시 개령·감문면 일원에 위치한 속문(俗門)·고소(姑蘇)·감문(甘文)산성이 감문국의 대표적인 산성 유적지다.

김천지역 향토사학계는 산성의 축조시기를 감문국이 존재했던 삼한시대(三韓時代)로 추정한다. 대부분 군사방어용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천시 개령면 일대의 평야로 외부세력의 침입이 있을 때, 주변 산성을 거점으로 대항했다는 것이다.

반면 학계는 산성의 축조시기를 감문국 멸망 이후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가 축조했거나 그 후대에 지어졌다고 추측한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개·보수를 거치며 사용되다 현재의 형태로 남아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축조시기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이들 산성이 감문국 역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1천년을 훌쩍 넘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기와 파편 등 삼국시대 유물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성벽과 그 부속건물의 흔적은 옛 시대상을 엿보는 자료로 활용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8편은 감문국의 유적으로 알려진 산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속문산성에 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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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백운산악회 조규철씨가 속문산성 주변에 흩어진 기와 파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감문국 멸망의 역사와 함께한 산성

속문산성은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白雲山, 해발 618.5m)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백운산은 소나무가 무성해 ‘송문(松門)’이라 불렸으며, ‘속문산(俗門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향토사학계는 ‘감문국 산성의 정확한 축조시기를 알 수 없다’면서도, 속문산성을 감문국의 주요 유적으로 보고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의 존재는 신라와 같은 승자의 역사에 의해 가려졌다. 지방을 근거로 존립했던 소국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 흔적을 찾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문산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문헌에는 “석축 주위 2천455척, 고 7척, 내유 2천2지 유군창(石築周圍二千四百五十五尺 高七尺 內有二泉二池 有軍倉)”이라며 속문산성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산성의 규모와 샘, 연못의 수까지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속문산성의 현재 모습도 문헌의 기록과 거의 흡사하다. 속문산성은 백운산 정상부를 기준으로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내려가는 계곡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상당 부분이 무너져내렸지만 산 정상부 능선을 따라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토석 혼축성’이 이어져 있으며, 옛 문헌에 기록된 샘도 발견할 수 있다.

속문산성이 위치한 백운산의 지명은 감문국 멸망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천지역에는 감문국의 최후와 관련된 구전이 전해지는데, 그 이야기의 배경에 백운산과 속문산성이 있다.

구전에 따르면 서기 231년, 신라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감문국 백성과 군사들은 속문산성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른다. 감문국으로 쳐들어온 신라군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영남지역 소국을 연이어 정복하고, 잦은 전투를 경험한 신라의 전투력은 여타 읍락국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라군의 수장은 신라 이사금의 동생이자 정복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석우로 장군이었다.

이미 예견된 전쟁이었지만, 감문국 백성들 역시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 비록 소국의 백성이었지만 죽을 각오로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했다. ‘감문국 군사 80여 명이 백운산 속문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묘사한 구전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최후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감문국은 망국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백운산’은 이때부터 불려진 지명이라고 한다. ‘속문산성에서 죽은 감문국 백성들의 영혼이 흰 구름이 되어 산 주변을 떠돌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감문국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구전일 뿐이다. 삼국사기를 제외하고는 구체적 기록이 없다.

김천시민들은 감문국 멸망의 역사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평소 백운산을 즐겨 오른다는 김천 백운산악회 총무 조규철씨(64)는 “어린 시절 신라군이 (백운산에서) 감문국 군사를 모조리 다 죽였다고 (어른들에게) 들었다. 감문국이 신라에 병합되지 않고, 하나의 나라로 이어지고 번성했다면 김천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 신라 방어의 최전선

김천 향토사학계의 주장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속문산성이 감문국 멸망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영남지역 산성을 연구한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속문산성의 축조시기는 5세기 말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6~10세기 신라 기와가 (속문산성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거점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특히 신라와 백제의 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김천지역 산성들이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조 연구사는 “김천 지역을 둘러싼 양국(신라·백제) 간 갈등은 이른 시기부터 있었기에 신라의 입장에서는 군사목적용 산성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사는 학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실제로 신라와 백제는 6세기 들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진흥왕 15년(554)에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의 목숨을 빼앗고 영남 서북지역을 힘으로 압박했다. 그러나 진지왕 2년(577)에는 백제가 신라 서쪽의 영토를 침략하는 등 백제의 저항도 매우 거셌다.

신라 입장에서 김천지역 산성은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김천 북쪽에는 신라의 제2도성으로 불리던 사벌주(상주)가 있었고, 추풍령은 백제·고구려·가야 세력이 만나는 접점이었다. 신라는 고구려·백제·가야를 견제하기 위해 김천지역이 꼭 필요했고, 부속 산성들은 세력 확장의 최전선이었다. 이 때문에 김천지역 산성은 효율적인 방어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고구려·백제·가야가 연합해 신라로 진격한다면 김천지역은 서라벌(경주)로 향하는 가장 짧은 진격로였기 때문이다. 김천지역 산성만 지켜낸다면 능히 서라벌을 지킬 수 있었다.

# 조선시대까지 활용된 산성

김천지역 산성들이 ‘신라의 성’이라는 주장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전문가들은 “감문국과 같은 작은 나라의 규모로는 성을 쌓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삼십인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중략)…’이라는 동사(東史)의 기록을 볼 때 감문국의 인구는 기껏해야 4천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축성에는 대규모 인원 동원이 필요한데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는 그 소요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신라 정도의 규모를 갖춰야 산성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역시 ‘신라의 성’이라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속문산성에서 발견된 기와 대다수는 삼국시대 신라의 것으로, 돌로 된 성곽의 축조방식 또한 신라의 양식으로 알려졌다. 특히 전통시대의 기와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관청이나 사찰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서야 널리 사용됐다.

한편, 김천을 비롯한 전국의 산성들은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한반도 대부분의 산성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다시 사용되었는데, 속문산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5년 김천시와 경북대박물관이 발행한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에 따르면 속문산성의 주요 역할은 평상시에는 교통의 거점으로 백성을 감시 관리하는 것이었다. 전시에는 인근 주민의 대피지 내지 방어 거점의 역할을 담당했다.

글·사진=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도움말=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학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공동기획 :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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