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9> 감문국의 山城-속문산성<하>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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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7-01   |  발행일 2015-07-01 제13면   |  수정 2021-06-16 17:56
1천여년 시간의 힘으로도 난공불락의 요새를 허물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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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문산성 남서편에 위치한 성벽의 모습. 1천년이 넘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거의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 스토리 브리핑

산성(山城)은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군사 거점으로 활용됐다.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 정상부의 속문산성(俗門山城) 또한 마찬가지다. 속문산성 곳곳에는 방어목적의 성벽과 함께 군대와 백성들이 머물렀을 법한 공간이 남아있다.

학계는 속문산성을 삼국시대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김천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구전은 다르다.

구전에 따르면 속문산성은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 최후의 방어 거점이다. 감문국은 1천700여년 전(231년) 신라에 병합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김천 역사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9편에서는 속문산성의 성곽과 관련 유적을 직접 살폈다. 속문산성이 신라대에 축조됐다는 학계 의견은 8편에서 다루었기에 따로 논하지 않는다.



# 사방이 탁 트인 전략적 요새

1950년 여름,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북한군은 칠곡군 다부동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였다. 주변 지형 보다 높은 장소를 점령해 전술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고지에서는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쉽고, 공격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옛 군대의 전투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고대 중국의 병법서 손자병법에는 지형과 관련한 전술법이 기록돼 있다. ‘전망이 탁 트인 고지를 점령하는 것(視生處高)’과 ‘적이 고지에 있을 때는 올라가지 말라(戰隆無登)’는 내용이 그것이다. 즉 고지를 선점하는 측이 전투에 유리하다는 설명이다. 특히 고지에다 성(城)을 쌓고 농성(籠城)까지 한다면 난공불락일 수밖에 없다.

역사에서도 산성의 중요성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당 전쟁이 대표적 사례다. 특히 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과 고구려 산성인 안시성(安市城)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세민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요하(遼河) 유역의 산성인 안시성을 넘지 못해 전쟁에서 패했다. 적의 산성을 후방에 남겨둔 당나라 군대는 편히 전투를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입고 후퇴해야 했다. 황제 이세민 또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속문산성과 같은 옛 산성 역시 이러한 전술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속문산성이 위치한 백운산은 618m에 불과하지만 주변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하나다. 주변 지형과 군사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인근 감문산성이 320m 고지에 있는 것과 비교하면 더할나위 없는 요새다. 인근의 고소산성 또한 해발 330m의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속문산성을 삼한시대(三韓時代) 감문국의 것이라 간주했을 때, 속문산성이 지닌 전략적 입지는 더 커진다. 백운산 일대는 감문국의 중심인 개령면 일원에서 서북 방향에 위치해 있다. 백운산은 당시 영남 서부의 맹주인 사벌국(현 상주시)과 경계를 이뤄, 신라군도 함부로 진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군대 배치는 제한적이었고 감문국의 전략적 이점은 컸을 것이다.

향토사학계는 속문산성을 감문국 최후의 결사항전이 벌어진 장소로 보고 있다. 감문국 백성과 군사들 또한 최후까지 결사항전할 장소로 속문산성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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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백운산악회 조규철씨가 백운산 정상부 속문산성에서 홈이 파인 바위를 가리키고 있다. 곡식을 빻는 절구였거나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감문면 송북리 백운산 오르는 길
감천변 개령들과 금오산 한눈에
정상의 능선 감싸듯 이어진 산성
탁 트인 시야에 묘한 긴장감이…



정상부 홈 팬 바위들과 우물 흔적
군대·백성 함께한 결사항전 방증
급경사면 십분활용한 바위 성벽
옛 위용 보여주는 보존상태 감탄

 

 

# 백운산을 오르다 

 

속문산성 입구에 도착하기 전 국도변에서 ‘감문면’이라는 지명이 적힌 교통표지판을 볼 수 있다.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은 그 운명을 다 했지만 국명(國名)은 감문면이라는 지명 속에 녹아 있다. 속문산성 일대가 감문국 최후의 격전지라는 향토사학계의 주장에 언뜻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다.

김천시 감문면 송북리에 도착하면 백운산으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산을 오르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2000년 이후 매년 백운산 정상부에서 해맞이 행사가 열리면서 등산로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등산로 중간에는 탐방객이 쉴 수 있는 벤치가 설치돼 있다. 가파른 오르막에는 나무 계단이 놓여 있어 지친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산 중턱에 오르면 서서히 주변 지형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김천의 젖줄 감천변의 개령들이 한 눈에 보이고,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면 금오산이 손에 잡힐듯 우뚝 솟아 있다.

등산로 입구에서 대략 40분쯤 오르면 백운산 정상부에 도착할 수 있다. 정상부에는 산불감시 초소와 100여명의 인원이 해돋이를 감상할 수 있는 목조 데크가 조성돼 있다. 산불감시 초소는 주변을 감시하기 위한 산성의 망대(望臺)가 있던 곳이다.

백운산 정상부의 탁 트인 풍경은 속문산성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만약 속문산성에 주둔하던 군사가 산 정상에 서 있었다면, 산 아래 병력의 움직임을 일일이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산지가 없는 동남쪽의 풍경이 시원하다.

백운산 정상부에는 평평한 터가 남아 있다. 다소 좁아보였지만 1천㎡ 가량의 면적으로 간단한 군사훈련은 가능해 보였다.

정상부 능선에는 수많은 바위가 흩어져 있는데, 범상치 않은 모양의 돌이 눈에 들어온다. 직경 30㎝ 가량의 홈이 파여 있는 둥근 바위가 눈길을 끈다. 곡식을 빻는 절구였거나 건물의 주춧돌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구멍난 바위 외에도 산 정상부에는 사람이 가공한 듯한 바위가 무더기로 쌓여 있다. 돌의 크기나 모양새로 보아 석성을 쌓고 보수하는데 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사시에는 적을 공격하는 무기로도 사용했을 것이다.

정상부 동북쪽에는 우물 흔적이 남아있다. 김천 백운산악회 조규철씨는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며 우물 터를 가리켰지만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탓에 물은 발견할 수 없었다.

# 옛 위용을 간직한 속문산성

속문산성은 백운산 정상의 능선을 감싸듯이 이어져 있다. 감문국 멸망의 역사를 증언하듯 여전히 긴장감이 흐른다. 속문산성의 성벽은 지형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세워졌다. 산지의 급경사면을 활용해 성을 쌓는 수고를 줄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삼국시대 산성의 축조방식과 같이 각 지형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성을 쌓아올렸다.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에서는 속문산성의 축조방식을 ‘편축법(片築法)’으로 소개하고 있다. 편축법은 ‘ㄴ’자 모양으로 토양을 자른 후 외곽의 경사면을 따라 한쪽 면에만 돌을 쌓는 축성법이다. 산 정상부의 능선에 위치한 산성에 적용하기에 좋다고 한다.

속문산성은 동서(東西)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이 있는 속문산성 남동쪽은 천연의 바위를 그대로 이용했다. 반면 완만한 오르막인 남서쪽의 경우 3~5m 높이의 석성을 쌓았다. 산 정상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가면 헬기장이 있는데, 그 아래에 30~40m 길이의 성벽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1천여년 전인 신라시대나,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온전한 보존상태를 자랑한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속문산성의 석성 대부분은 완전하지 않다. 백운산 능선을 따라 석축이 이어져 있지만 상당부분이 무너져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옛 위용을 보여주려는 듯 전체적인 석성의 형태는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석성(石城)의 모습을 바탕으로 과거 속문산성이 지녔던 군사적 중요성을 상상할 수 있었다.

글·사진=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 도움말=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계명사학 제23집’‘국역 김천역사지리서’‘디지털김천문화대전’‘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김천시사’‘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공동기획 :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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