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청송 .6] 청송 유림의 학풍과 학맥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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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7-27   |  발행일 2015-07-27 제13면   |  수정 2015-07-27
이황의 본향인 까닭에 퇴계학파가 주류…최대 계파는 학봉계(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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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의 정맥인 학봉 김성일의 학통을 계승한 이상정·김종덕·유치명을 배향하고 있는 부강서당. 청송군 부동면 상평리에 있다.

#1. 청송지역 사림의 활발한 학문 교류

청송의 지역민들은 중첩된 산수로 인해 자칫 고립된 삶을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청송의 탁월한 산수는 자연과 더불어 살기에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런 가운데 골짜기와 들에 흩어진 마을 간 소통이 비교적 잘 이루어져 이를 통한 학문의 교류도 활발했다. 예부터 이 지역의 유림들과 관련이 있는 명소와 누정(樓亭)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1937년 청송향교가 발간한 ‘청기지(靑己誌)’에는 80개소나 소개되어 있다.

청송에는 일찍부터 다양한 토착 성씨들이 터를 잡았다. 그리하여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면서 도학적 학풍을 고스란히 지켜왔다. 특히 안동과 가까워 도학적인 학풍의 바람을 곧장 수용할 수 있었다. 안동지역 유림과의 연결은 바로 영남사림과의 연결로 이어졌고, 이런 광범위한 수용을 통해 학문과 덕행을 적극적으로 심화해나갔다.

‘청기지’에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말기까지 청송에 거주한 인물들을 열거하고 있다. 선정(先正)·유현(儒賢)·학행(學行)·유행(儒行)·문행(文行)·행의(行誼) 등 20개 항목에 걸쳐 열거된 인물이 833명이나 된다.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한 유림의 성씨는 36성에 달한다. 이 중 청송심씨와 함안조씨가 각각 138명과 175명이 수록되었다. 이들 두 가문 외에 영양남씨(80명)를 비롯해 안동·의성·경주김씨(85명), 진성·가평·경주이씨(85명)와 달성서씨(37명), 아산장씨(22명), 평산신씨(20명) 및 밀양·경주박씨(27명), 경주·해주최씨(21명) 등이 꼽힌다. 이 밖에 안동권씨(16명), 여흥민씨(13명), 파평윤씨(9명), 장수·창원·상주황씨(17명), 청주·동래정씨(12명), 전주·풍산유씨(10명)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청송지역 유림의 학문적 경향 및 학맥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이 지역의 서원과 사우(祠宇)의 건립 양상을 짚어본다.

청송 진보는 퇴계 이황의 본향이다. 이 때문에 선조대 이후 퇴계학의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선조 35년(1602) 이황의 족증손이자 문인이기도 했던 이정회가 주도해 이황을 제향한 옥동서원(뒤에 봉람서원으로 개칭)을 창건했다. 또 안덕의 당저에 이황과 김성일을 배향한 송학서원이 건립되어 뒤에 장현광을 추향했다. 또한 고종 11년(1874)에는 서병화·병수·성희·문희 등 달성서씨의 핵심 인물들이 공론을 주도하며, 김성일의 학통을 계승한 핵심 인물들인 이상정·김종덕·유치명을 제향한 부강서당을 건립했다. 모두 퇴계학을 주축으로 한 남인계 서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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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과 노론의 종장으로 꼽히는 이이·김장생 등을 배향한 병암서원. 청송은 서인의 정치 이념을 계승해온 자생 노론도 일정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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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청송향교가 발간한 청기지(靑己誌).

안동과 가까워 영남사림과 학문 교류도 활발
이황∼김성일 계승 남인계 서원 잇따라 건립

학문적 폭 넓히려는 향토유림의 열망 때문에
율곡학 수용한 서인계열도 나름의 입지 확보

忠·孝 실천하는 학풍은 의병 봉기로 표출돼
임진·병자 양란때 분연히 일어나 순절하기도

유림 우국충정 정신 대한제국 말까지 이어져
의병 활동 기록 ‘적원일기’에 고스란히 담겨


그런 가운데 숙종 28년(1702) 정덕조·조시민·조시형 등에 의해 서인과 노론 학통의 종장으로 꼽히는 이이·김장생 등을 제향한 병암서원이 건립되어 사액까지 받았다. 서인 세력과 청송지역과의 관계는 엷지만, 서인의 정치 이념을 계승해온 자생 노론이 일정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학문적인 관심의 폭을 넓히려는 청송지역 유림의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영남 사림은 퇴계학파를 주축으로 형성됐다. 이황의 성리학적 정신을 이으면서도 퇴계학의 계파 간에는 조금씩 학문의 현실 적용과 실천하는 방법상에 있어서 차이를 드러냈다. 이에 따라 계파의 분화가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이들은 나름의 독자성을 갖고 학문을 심화시켜 나갔다. 여기에다 율곡학을 수용한 서인계도 나름의 입지를 확보했다. 청송의 학문이 한곳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성을 가지고 있음을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중 청송유림의 학풍을 사실상 주도한 최대 계파는 퇴계학파의 학봉계였다. 서애계가 하회와 안동의 서부지역을 무대로 성장한 것과는 달리, 학봉계는 천전(川前)을 중심으로 해 청송과 가까운 동부지역을 발판으로 성장했다.

특히 청송지역은 재령이씨를 중심으로 한 영해의 학봉계와 안동지역 학봉계를 연결해주는 교량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나아가 김성일의 아버지 김진이 청송의 여흥민씨와 혼맥을 형성한 데다 그가 세운 부암서당에서 배우며 문인이 된 민추가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것도 그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배경에 의해 남두문이 김성일의 제자가 된 이래로 남시훈·권두경·이현일·권렴·남탄·이재·권이부·조상·조상언·조상기·이상정·서활·김종덕·신진운·권오규·심응지·심태지·심응규·이응협·서병화·서효원·남병인·남석영·황린수·유치구·유치명·권상술·신상극·김진성·권상술·김흥락·조성태·이상일·서석화 등이 학봉계를 잇는 문인으로 활약하며 청송지역의 학풍을 주도해 나갔다.

동시에 퇴계학파의 첫 번째 문인록인 ‘계문제자록(溪文諸子錄)’편찬을 주도한 권두경을 필두로 김성탁·권렴·권이부·조우각·유범휴·서락·황윤중·신진운·유치구·유치덕·서효원·심응지 등 청송과 연고를 갖고 있는 유림들이 다시 그들의 제자를 각각 양성해냄으로써 청송지역 학봉계가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며 저변을 확대해 나갔다.


#2. 충과 효를 숭상한 학풍…의병으로 이어져

청송은 예로부터 충절과 예절, 효행을 숭상해왔고 실천해왔다. 이 지역의 학문과 유림들의 기질이 발휘된 탓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의병이 창궐했는데, 이에 청송 지역의 유림들도 분연히 일어났다.

임란 당시의 의병활동에 대한 이 지역의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 다만 조수도의 ‘임란일기’와 권응수의 ‘임란동고록’, 조동도의 ‘화왕산회맹록’ 등을 통해 청송 인사들의 명단을 대략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따르면 홍의장군 곽재우의 화왕산 의진에 참여한 이들은 조형도·남윤조·조동도·권준·신지남·권소·안윤옥·권완·김사정·권의립 등이다. 영천의 권응수 의진에 참여한 이들은 김몽린·김몽구·김몽기·김성원·김성달·김몽룡 등이다. 또한 손응현·심정·서사원·서사술·이응의·이정백 등은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키기도 했다. 김응하·김응상·김응주 삼형제는 의성의 중사촌에서 왜적과 싸우다 죽었고, 신예남 역시 단독으로 왜군에 대항했다. 기타 의진에 참여한 이들은 이홍중·최충손·최응삼 등이며, 심정·심호·장후완·정운 등 관군으로 참여한 이들도 있다. 심청은 청송에서 동래까지 군량미와 군수 물자를 운반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에는 쌍령(雙嶺)전투에서 순절한 윤충우와 권일륵이 있으며, 심예달·황충일 등이 창의에 참여했다.

병자호란 당시 쌍령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의사(義士)들에 대한 기록인 ‘쌍령순절록’에는 눈시울을 시큰하게 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쌍령전투의 장군 윤충우의 이야기다. 그는 인조 때 무과로 벼슬에 나가 훈련원 첨정에 올랐으나 바로 사직하고 귀향했다. 이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나라의 부름을 받고 분연히 나서 쌍령전투에 임했다. 이때 그는 아내 염씨에게 편지를 보낸다.

“적세가 매우 시급하니 분명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오. 시체인들 이 전쟁터에서 어찌 찾겠소. 이 편지를 보낸 날이 내가 죽은 날이라 여기시오. 아들이 눈에 선하니 모자가 서로 의지하여 산다면 다행이겠소.”

그는 바로 이 전투에서 순절한다. 이 순절록에는 신수가 쓴 제문이 있다. 제문은 “윤공께서는 선봉장으로 병졸 100여명을 이끌고 적진으로 진격한 후 소식을 알 수 없다”고 쓰고 있다.

또한 훈련원 첨정으로 쌍령전투에 참가한 권일륵의 이야기도 전한다.

그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가운데 말 위에서 전사했다. 이에 말이 그를 실은 채 멀고 먼 길을 달려서 집에까지 이르렀다. 집안에서는 놀라움과 비통함이 컸다. 사람들은 그 말을 두고 의마(義馬)라 했다.

이러한 우국충정의 정신은 청송의 기운을 크게 일으켜 세워 한말에까지 이어졌다. 1896년 청송의 의병활동 기록인 ‘적원일기(赤猿日記)’는 청송지역 의병활동을 잘 보여준다. 청송의 유림과 학문이 충의와 정의 구현에 기초되어 있고, 놀라운 실천력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아닐 수 없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 설석규 ‘조선 후기 영남사림의 학풍과 청송사림의 학맥’
공동기획=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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