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6]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의 충신’ 김성미(金成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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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수정 2016-07-14  |  발행일 2016-07-14 제면
태종때 문과 급제(일부 문헌에서는 태조때 급제했다는 기록도 있음)
“나 여기서 늙어죽으리” 매일 아침 단종 유배된 영월 향해 큰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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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방 출신 김성미가 사위 이맹전과 함께 낙향해 머물렀던 구미시 고아읍 오로리 전경. 김성미는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다시 출사하지 않고 ‘나는 이곳에서 늙어 죽는다’ 하여 마을 이름이 ‘오로(吾老)’로 불리고 있다. <영남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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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리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가좌골. 김성미는 가좌골에 오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영남일보DB>
선산 장원방(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마을, 옛 영봉리,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재가 김성미(金成美)다. 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의 장인으로도 유명하다. 김성미는 1378년(고려 우왕 4) 장원방에서 태어나 조선 태종 때 문과에 등제됐다. 일부 문헌에는 ‘태조 때 급제했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 때 수많은 공적을 남겼고 문종과 단종을 차례로 섬기며 벼슬이 예문관직제학 겸 군기시판사에 올랐다.

특히 김성미는 충절의 상징으로 꼽힌다.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이후 사위 이맹전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출사하지 않았다. 그가 낙향해 정착한 마을은 오로촌(吾老村,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오로리)이라 불린다. 김성미가 정착하면서 ‘나는 이곳에서 늙어 죽는다’고 말한데서 유래됐다. 오로촌은 장원방과는 지척에 있는 마을이다. 매일 아침 뒷산에 올라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을 향해 절을 하며 곡을 한 김성미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가 절을 하며 곡을 했던 뒷산 골짜기는 직학곡(直學谷)으로 불린다. 오로리 마을 끝자락에 자리한 가좌(佳座)골에 들어가 오로재(吾老齋)를 짓고 후학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1. 명문가에서 태어난 아이

1378년은 가히 ‘왜적’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권51 ‘고려기(高麗紀)’를 살펴보면, 정월에 연안부(延安府) 침략을 시작으로 12월 하동현(河東縣) 노략질에 이르기까지 한 해 동안 왜적이 헤집은 곳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가장 낭패인 건 역시 백성들이었다. 안 그래도 가난했던 하루는 더 궁핍해졌고, 편치 않던 생활은 더 불안해졌다. 무엇이 어찌 되어 가는지 알아챌 겨를조차 없이, 어수선한 시간들이 되는 대로 흘러갔다. 나라에서도 나름 애를 쓰기는 했다. 왜적이 날뛰는 곳에는 장군들을 보내고, 일본 본토에는 사신들을 보내느라 한밤에도 관의 불이 꺼질 줄 몰랐다. 하지만 혼이 나간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는 한입으로 한탄했다.

“말세야.”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그 와중, 삼사좌윤(三司左尹, 종3품) 김천부(金天富)가 아들을 보았다. 삼사(三司)란 고려시대에 나라 전곡(錢穀, 돈과 곡식)의 출납과 회계를 관장하던 아주 중요한 기구였다. 게다가 김천부의 아비인 김득자(金得資)도 삼사우윤(三司右尹)을 지냈으니, 김씨 집안은 명실상부 명문가였다.

선산 영봉리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김성미(金成美)였다. 김성미는 어려서부터 눈에 띄게 영특하고 총명했다. 난세에 태어난 선비 집안의 아이답게 철도 일찍 들었다. 그런 김성미가 열 살이 되던 1388년, 나라가 뒤집어졌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왕이 갈린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392년에는 아예 나라 이름이 바뀌고 말았다.

丙申/十七日丙申, 太祖卽位于壽昌宮(병신/십칠일병신, 태조즉위우수창궁). 1392년 7월17일, 태조가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조선이 시작된 것이다. 집안 공기가 어지러웠지만, 김성미는 그저 공부에만 전력을 다했다. 열네 살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선천적인 영특함에 후천적인 성실함이 보태지면서 김성미는 어렵지 않게 문과에 급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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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종과 세자 지키겠다 약속
어린 단종이 도성서 쫓겨나던 여름
통곡하며 정3품 벼슬 던지고 귀향

하루도 빼먹지 않고 간절히 기도
김성미가 낙향한 마을은 오로촌
절 올린 뒷산은 직학곡이라 불려

생육신 이맹전의 장인으로 유명
가좌골서 몰려드는 제자 가르쳐


#2. 그것은 의리로소이다

그것은 충신(忠信)이라기보다는 의리(義理)의 문제였다. ‘충신’이 상대에게 ‘바치는’ 것이라면 ‘의리’는 상대와 ‘나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김성미의 입장에서 세종(世宗, 재위 1418~1450)과 문종(文宗, 재위 1450∼1452)은 분명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인 임금이었다. 하지만 세종과 문종은 동시에 한 사람의 아비이기도 했다. 그것도 그냥 아비가 아닌 것이, 세종은 보위를 물려받을 아들(문종)이 너무나 병약해서 근심이 넘치던 아비였고, 문종은 왕위를 넘겨받을 아들(단종)이 너무나 어려서 슬픔이 넘치던 아비였다. 그래서 김성미는 신하로서뿐만 아니라 같은 아비로서 세종과 약속했고, 뒤이어 문종과도 약속했다. 동감(同感)하고 공감(共感)하였으니 의리를 지키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치게 험했다. 문종은 채 3년을 채우지 못했고, 단종은 간신히 3년을 넘겼을 뿐이었다. 문종이야 일찍부터 병약하였으니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해도, 단종의 경우는 설마가 역시가 된 경우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왕권을 노리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피의 숙청으로 수많은 이들이 잔인하게 목숨을 빼앗겼으며, 단종의 안위 일체는 그 즉시로 경각에 매달렸다. 앞일은 불을 보듯 빤해서, 단종은 결국 1455년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강원도 영월로 쫓겨갔다. 어린 왕이 도성을 나가던 윤6월의 그 날, 김성미는 망연자실하며 통곡했다.

“내 너무 오래 살았다. 못 볼 것을 너무 보았어.”

당시 김성미는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정3품) 겸 군기시판사(軍器寺判事)였다. 예문관직제학 자리는 주로 도승지(都承旨)가 겸하도록 되어 있었던 바, 김성미는 공식적인 도승지는 아니더라도 도승지만큼의 명예와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승지는 말하자면 왕의 비서장 격이었다.

“내 죽을 때도 눈을 편히 감지 못할 것이다.”

김성미는 당상의 벼슬을 미련없이 내려놓았다. 사실 그의 나이 일흔일곱이었으니 이른 은퇴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양대군(세조)의 입장에서 보면, 명망 높은 원로가 그렇게 빠져나가는 것이 명분 상 도움이 될 리 없었다. 여기저기서 말리고 나섰으나 그렇다고 아랑곳할 김성미가 아니었다. 벼슬을 내려놓고 그가 향한 곳은 바로 고향 선산이었다. 휘적휘적 궐을 나서는 김성미의 마른 등이 더없이 꼿꼿했다.

#3. 단종을 향한 간절한 기도

“이제 이곳은 오로촌이네.”

“뜻을 어찌 풀리이까? 장인어른.”

“나 오(吾) 그리고 늙을 로(老).”

“나 여기서 늙어죽으리, 그리 알면 되겠습니까? 장인어른.”

“그렇지. 내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네.”

사위 이맹전(李孟專)은 다 알아들었다. 이맹전은 그의 선친인 병조판서 이심지(李審之) 때부터 선산에서 살다가 1427년(세종 9)에 문과에 급제해 거창현감을 지내던 중, 단종의 일을 겪으면서 벼슬을 버리고 장인 김성미 곁으로 내려온 터였다. 그래서 이맹전 또한 김성미의 상심과 분노와 체념과 결기를 같이하고 있었다.

사실 작은 산골에도 이름은 있게 마련이어서 김성미가 고향 선산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곳도 이래저래 불려온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산골의 이름이란 것이 대개 편의상 주먹구구식으로 갖다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 전국을 다니다 보면 겹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이제 오로촌은 아니었다. ‘오로’가 품은 뜻이 오로촌을 세상에서 유일한 곳으로 만들 것이었다.

김성미는 낙향 후 매일 아침 조용히 산길을 올랐다. 마을 뒷산에 오른 김성미는 이내 몸을 가다듬고 자세를 고쳤다. 뒤이어 진심을 다한 절이 이어졌다. 강원도 영월 쪽을 향해서였다. 어린 임금 단종이 갇혀있는 곳, 영월 말이다.

“전하. 심지를 굳건히 하시고 부디 살아만….”

채 마무리 짓지 못한 인사가 비통했다. 곡소리가 뒷산 골짜기를 타고 길게 이어졌다.

김성미의 이른 아침 산행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선산으로 내려온 이후 단 하루도 빼놓지 않은, 단종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성미가 올라 절을 올린 그 뒷산을 직학곡(直學谷)이라 부르며 곧은 뜻을 알아주었다.

이후 김성미는 오로리 끝자락에 자리한 가좌(佳座)골에 들어가 오로재(吾老齋)를 짓고 칩거에 들어갔다. 다만 찾아오는 제자들을 물리치지 않고 힘써 가르치니 선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제자들은 가좌골 오로재를 가리켜 ‘즐거움을 더해 주는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사위 이맹전은 청맹과니에 귀머거리 행세까지 하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까닭에 훗날 생육신(生六臣)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 참고문헌=선산의 맥락, 선산군지,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공동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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