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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 중심에 선 대구·경북인 .8] 혜성단의 3·1운동과 자제단의 방해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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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진관기자
  • 201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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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학교 학생·최재화가 만든 비밀결사 혜성단, 친일파 동족에 붙잡혔다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 어귀에 ‘최재화사건’의 주인공 백은 최재화 목사의 기념비가 서있다.
100년 전 3월8일 대구에서 시작된 3·1운동은 5월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까지 108회, 2만1천여 명이 참가했다. 대구경북에선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70명이 부상했으며 700여 명이 체포됐다. 이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이규환(15세)을 포함한 학생 피검자는 222명이었다. 대구경북의 3·1운동은 학생이 앞장섰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계성학교와 대구고보 학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3·1운동 후 광복이 될 때까지 계성학교 출신 서훈자는 32명, 대구고보 출신 서훈자는 5명이다. 대구고보는 3·8만세시위 당시 전교생 239명 가운데 200명이 참가했다. 신암선열공원에 묻혀있는 백기만을 포함, 48명이 체포됐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나 서훈받지 못했다. 대신 일제당국은 대구고보생 피검자 48명 중 20명에게 퇴학, 정학, 근신의 처분을 내렸다. 대구고보 학생은 동맹휴학으로 맞서 1919년 5월20일에야 정상수업이 가능했다. 이후 대구고보는 1920~30년대 중반까지 계속해 지하·반일조직을 만들어 10차례 가까이 동맹휴학으로 저항했다.

◆대구 학생 비밀 결사 혜성단

백은 최재화 목사 초상.
혜성단의 연락계였던 이명건(이여성), 그의 동생 이쾌대가 그린 초상이다.
‘혜성단(慧星團)사건’은 일명 ‘최재화사건’으로 불린다. 일제는 ‘관공리사직협박 및 폐점위협사건’으로 지칭하고 있다. 혜성단은 3·8대구만세운동 후 대구부 상점 주인에겐 폐점하지 않으면 불을 지르겠다는 격문을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탄압한 대구경찰서장, 박중양, 백응훈 등 친일관리와 자제단 간부에겐 암살하겠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송했다.

격문에는 “서양인 신문기자가 대구에 와서 시내를 순시하므로 조선인은 독립 자유를 바라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철시, 폐점하라! 또 상인은 일본 상인과 금전, 물품거래를 하지 말라! 신문지에 전해지고 있는 총독부의 유고나 기타 경찰관의 말은 거짓이므로 믿지 말라! 폐점하지 않는 자에게는 강제 수단을 쓸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4월1~2일 경정(현 종로) 일대 상점들은 폐점을 하고 2일에는 큰장 점포 80여 곳이 문을 열지 않았다.

4월8일 대구경찰서장에게 보낸 격문에는 “너는 왜 3월8일 독립만세를 부른 무고한 동포를 검거하였는가! 너희들 같은 자는 암살당할 때가 있을 것이니 각오하라!”고 썼다.

혜성단은 계성학교 학생들과 독립지사 최재화가 깊숙하게 관련된 비밀결사체다. 1919년 3월16~18일 대구만세시위에 참가했던 계성학교 학생 김수길이 같은 학교 이영식, 허성도, 이기명, 이종헌 등과 항일투쟁 방안을 논의하다 선산 해평 출신 전 경신학교 교사 최재화 집사를 지도위원으로 모셨다. 최재화는 이갑성과 함께 서울에서 3·8대구만세운동의 배후 연락책으로 활동했으며 4월3일 해평에서의 만세운동과 만주 신흥무관학교 생도모집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상주경찰서에 체포됐으나 일경 두 명을 때려눕히고 탈출해 이듬해 중국 상해로 망명, 의열단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중국에서 기독교에 투신했다.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돼 중국에서 한인교회를 세웠다. 31년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해 현재의 대구 중구 남성로 제일교회를 건축, 목회활동을 이어갔다. 또 계명대의 전신인 계명기독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에 그의 추모비가 있으며 성서 계명대에 그의 호를 딴 ‘백은관’이 설립됐다. 현재 4남 최성구 전 안과원장(89)이 대구 달서구에서 살고 있다. 구정모 대백회장의 부인 최정숙 아이에스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가 손녀다.

이영식(현 대구대 설립자)은 3월12일 고향인 선산군 인동면 진평동에서 인동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독립운동으로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됐다. 그는 서문교회 목사, 간도 제일교회 목사 등을 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다 광복 후 교육과 복지사업에 투신했다.

혜성단 창단은 1919년 4월17일이다. 김수길과 최재화는 이날 대구 남산동에서 이명건, 이덕생, 이수건, 이영옥을 추가로 가담시켜 만주 등 해외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이를 위해 인쇄계(최재화·김수길), 배달계(허성도·이덕생·이종식·이종헌·이기명), 출납계(이수건), 만주 출장계(이영옥), 연락계(이명건)를 두는 등 조직과 기능을 확대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섰다.


대구서 만주 등 해외까지 활동범위 넓혀
독립운동참여 독려하고 자금지원 호소
박중양 등 친일관료에 ‘암살’ 경고문도

日, 만세시위 들끓자 자제단으로 맞불
대구서 전국 첫 결성…관민 72명 참석
기존 보안법 5배 강화시켜 혜성단 옥죄



이튿날 근고동포(謹告同胞), 경아동포(警我同胞),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 제목의 선전물과 인쇄물을 시내에 붙여 대구부민에게 독립운동참여를 독려하고, 민족자산가에 우편물을 발송해 독립운동자금지원을 호소했다. 4월22일·4월27일·5월7일에도 선전물을 뿌렸다.

경고관공리동포에는 “조선인 관공리가 일제의 편에 서서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동족의 원수가 되는 것이니 속히 각성하여 사직하고,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백은 최재화목사’ 전기에 따르면 선전물은 최재화가 기초했다고 나온다. 이명건은 이여성(李如星)이란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대 최고의 화가 이쾌대의 형으로 그 역시 대구화단(畵團)의 개척자였다. 그는 동아일보 조사부장 때 손기정과 관련한 일장기 말소사건에 개입돼 해직된다. 광복 후 건국동맹 활동을 하다 47년 월북했다.

대구 수성동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8살 때 서울로 가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중앙학교 동기생 김원봉과 김두전을 만나 의형제를 맺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의했다. 셋의 멘토는 약산의 고모부인 밀양출신 독립지사 황상규다. 황상규는 셋에게 ‘별과 같이, 산과 같이, 물과 같이 오직 민족을 위해 지조를 지켜라’는 의미로 각각 여성(如星), 약산(若山), 약수(若水)란 호를 지어줬다. 이명건은 1917년 부친 소유 땅을 팔아 4만5천원으로 중국 길림성 신장에서 농장을 마련해 독립운동거점으로 삼으려다 도적의 습격을 받아 수중의 돈을 거의 다 뺏기는 바람에 실패하고 낙향해 있던 중 김수길 일행과 합류했다. 그는 최재화의 경신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3·8만세시위에 참가한 이덕생은 계성학교 졸업 후 혜성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뒤 장성희와 결혼하고 중국 상하이로 가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남산교회 이문주 목사의 아들이다. 이덕생은 이후 임시정부 우파 민족당 한국독립당 기관지인 ‘진광’의 주필을 했다. 그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을 역임하다 39세에 사망했다.

혜성단의 활동이 일제가 만든 자제단과 충돌하자 일제는 혜성단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결국 5월14일 대구 경정의 여인숙에서 김수길을 체포한 이후 11명의 단원이 줄줄이 잡혔다. 1919년 7월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김수길은 징역 2년6월, 이종식은 징역 2년, 이명건 외 8명의 동지는 각각 1년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10월9일 고등법원격인 대구복심법원에서 형량이 늘어나 김수길은 징역 4년, 이명건, 이영옥, 이종식은 징역 3년에 처해졌다. 중국으로 탈출한 최재화는 궐석재판에서 도합 8년형을 선고받았다.

◆3·1운동 방해공작 단체 자제단

자제단(自制團)은 혜성단과 대척점에 선 단체였다. 3·1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퍼진 가운데 탄압과 폭력에도 숙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제가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었다.

‘스스로 억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각 지역의 민간유지자를 참여시켜 관제 성격을 띠고 있어 자제회라고도 불렀다. 지역에 따라 자위단(경기도), 자성회(전북), 자위회(청도)라는 명칭을 썼다.

부끄럽게도 대구는 1919년 4월6일 전국에서 처음 대구부청에서 관민 72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제단이 결성됐다. 이어 청주(4월15일), 평북 정주(4월18일), 안동·성주·경주·칠곡·김천·선산(4월26일), 평양·전주(4월26일이전), 울산(5월6일), 황해도 재령(5월9일), 춘천(5월18일), 군산(5월21일) 등으로 퍼졌다. 하지만 6월 이후부터 활동이 중지돼 자취를 감췄다.

당시 대구경북지역에서 발기인으로 참여한 유지는 67명으로 대구를 대표할 만한 지주나 자산가였다. 지금의 상공회의소 상공위원급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부윤이 이들을 직접 선정했으며, 모임은 대구부청에서 했다. 자제단은 아래 구장을 두고 자제단원의 관리원을 맡게 했다. 구장은 몇 사람의 찬성원을 임명해 해당 구의 주민 전체를 자제단 단원으로 가입토록 강요하는 역할을 맡았다.

내용은 소요를 진압하고 불령선인을 잡는데 협조해 달라는 것과 시위참여를 자제시키라는 일종의 강제규약이었다. 특히 그해 4월 기존의 보안법보다 5배나 강화된 조선총독부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을 시행해 이들을 옥죄었다.

우현서루를 설립해 대구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던 소남 이일우도 이때 일제의 강요로 자제단에 가입됐다. 그는 자제단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 제령 7호를 위반해 주요 사찰 대상이던 조카 이상정의 행방에 관해 일경으로부터 심문을 받기도 했다.

1919년 4월 대구부청에서 조사한 대구지역 총 호수는 4천28가구였는데, 이 중 3천787가구가 가맹부에 가입했다. 10가구 중 9가구가 가입한 셈이다. 지역내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제단에 포섭되고 겉으로는 협조한 것처럼 보였으나 부민들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때 당시 혜성단의 활약도 한몫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자제단에 가입되고 운영됐지만 식민통치에 영합해 민족을 배신하고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도모한 부역자도 있었다. 대구 최고의 친일관료인 박중양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제단 단장으로 뽑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의 아들 서병조, 적극적인 자제단 활동으로 강원도지사, 경북도지사가 된 신석린, 대구부호 이병학, 정재학, 정해붕 등은 만세운동 시위를 진정시킨 공로를 이어받아 1920년 이후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발탁됐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참고=대구독립운동사, 경북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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