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한국어는 나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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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02   |  발행일 2019-05-02 제30면   |  수정 2019-05-06
쨍그랑·클링킹·가쨘…
유리잔 소리의 표현 다르듯
다른 언어가 다른 문화 형성
한국인들의 생각과 숨결은
한국어에 그대로 담겨있어
20190502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자유’라고 한다. ‘자유’(自由)란 스스로의 뜻에 따라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절대로 스스로의 뜻에 따라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태어날 나라를 선택할 수 없고, 태어날 때를 선택할 수 없다. 스스로 부모와 나라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모국어를 선택할 수도 없다. 모국어는 태어날 때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배워,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한국어는 숙명이자 운명인 것이다.

우리가 숙명적으로 받아들여 배운 모국어에는 우리의 삶과 생각 그리고 문화가 담긴다. 언어는 인간 문화를 담는 그릇이며, 한국어는 한국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독일의 철학자 훔볼트는 언어의 차이가 곧 사고방식의 차이를 만들고, 나아가 세계관이 서로 달라지는 결과를 만든다고 하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국가나 종족들은 각기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서로 다른 문화를 일구어왔다. 다양한 언어들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다양성이 인류 문명을 풍부하게 꽃피워 온 것이다.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색채를 표현하는 색채어, 맛을 표현하는 미각어 등과 같은 감각 표현에 언어 차이가 적지 않다. 한국인은 ‘따르릉’이란 말로 전화소리를 표현했었다. 요즘 ‘똑똑전화’(스마트폰)가 널리 쓰이면서 어린 세대에게 ‘따르릉’은 전혀 실감나지 않게 되어 버렸다.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를 한국어에서는 ‘쨍그랑’이라 표현한다. 영어에서는 이 소리를 clinking(클링킹)이라 하고, 일본어는 がちゃん(가쨘)으로 표현한다. 각각의 모국어를 쓰는 사람은 다른 언어의 낱말을 듣고서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를 연상하기 어렵다. 한국인은 ‘쨍그랑’이란 낱말이 유리 부딪치는 소리의 느낌을 가장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소리가 주는 느낌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청각과 시각 능력이 없는 헬렌 켈러가 ‘water(물)’란 단어를 배울 때의 일화가 있다. 가정교사 앤 설리번이 차가운 물을 헬렌 켈러의 손에 흘려주면서 ‘water’라는 글자를 손바닥에 써 줘 이 낱말을 가르쳤다. 손에 닿은 물의 느낌과 ‘water’라는 글자가 손바닥에 써지는 느낌이 실감나게 결합하면서 ‘water'라는 글자와 낱말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모국어란 이렇게 몸으로 느끼고, 귀로 들으면서 가슴에 젖어들고, 뇌세포에 새겨지는 것이다. 한국어를 이미 모국어로 익힌 사람에게는 ‘물’이란 소리를 들어야 물이 주는 부드러우면서도 윤택하고 미끄러운 느낌을 실감할 수 있다. ‘방울’이란 낱말의 소리를 들으면서 매끈하고 동글하게 느껴지는 방울의 실체를 느낀다. 말을 통해서 사물을 느끼고 세상을 이해한다는 말은 이래서 맞는 말이다.

말에 대한 감각적 차이와 문화 다양성의 산출은 한국어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같은 한국어라 해도 태어난 지역에 따라 사투리 차이가 있다. 한국어 안에는 지역 방언이 오랜 역사 동안 발달해 왔고, 연령과 성별, 교육의 정도에 따른 사회 방언도 존재한다. 지역 방언과 사회 방언의 다양성이 한국어의 다양성을 만들어 낸다. 오늘날 교육과 방송 매체의 영향으로 표준말이 귀에 익숙해졌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사투리를 여전히 쓴다. 사투리로 소설과 시 같은 문학작품이 쓰이기도 하며, 이것을 읽으며 우리는 색다른 정서의 깊이와 말의 질감을 느낀다. 전라도이든 경상도이든 서울이든 한국인은 태어난 곳 특유의 사투리를 입말에서 사용하고, 글말에서 접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국어와 사투리, 한국어로 표현된 문학작품에는 한국인의 생각과 정서, 사투리를 쓰는 토박이들의 숨결이 서려 있다. 우리는 한국어와 한국 문학 속에 녹아든 생각과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고 밝혀, 오늘날의 우리의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 데 한 삽 흙을 보태고자 한다.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BK21플러스 사업단에서는 영남일보의 협조를 받아, 우리가 공부해온 한국어와 한국문학에 대한 지식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마당을 열게 되었다. 이 마당이 우리가 받은 사회적 지원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터가 되기를 바란다.

백두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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