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상주 .2] 상주 북천전투와 임란북천전적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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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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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들 거침없는 공세 막아라” 상주서 북상 저지 배수진

상주시 만산동에 위치한 상주임란북천전적지 전경. 전적지가 들어선 곳은 임진왜란 때 조선 중앙군과 의병이 왜군 선봉주력부대에 맞서 최초로 싸운 장소로, 당시 900여 명이 순국한 호국의 성지다.
상주임란북천전적지에는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윤섬, 권길, 김종무, 이경류, 박호, 김준신, 김일, 박걸과 무명 열사들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가 들어서 있다. 매년 순국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제향 행사를 열고 있다.
전적지에 자리한 임란북천전적비(壬亂北川戰跡碑).
상주는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이자 호국의 성지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에 벌어진 상주 북천전투는 호국의 상징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상주 북천전투는 조선 중앙군과 상주에서 창의한 의병들이 북상하는 왜군의 선봉 주력부대를 맞아 최초로 접전을 벌인 전투다. 1592년 4월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물밀듯이 북상한다. 이 소식을 듣고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중앙군은 4월23일 상주에 도착한다. 중앙군은 불과 60여 명뿐. 이러한 가운데 상주에서 800여 명의 민초들이 창의해 의병으로 나선다. 하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1만7천여 명의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순변사 이일은 도주하고, 상주 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의병장 김준신 등과 상주 의병들은 죽기로 맹세하고 역전 분투하다 순국한다. 전세가 불리했지만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당시 격전이 벌어진 상주 만산동 일대에는 지금 임란북천전적지(壬亂北川戰跡地)가 조성돼 있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다. 상주의 혼을 일깨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호국의 성지 상주’ 2편과 3편에서는 상주북천전투를 두 차례에 걸쳐 다룬다.

#1. 밀려드는 왜군, 바람 앞의 등불 경상도

1592년 4월13일 경상도 가덕도의 응봉(鷹峰)봉수대가 급박하게 움직였다.

“보고합니다.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으나 대략 90여 척의 왜선이 가덕도 남쪽에서 부산포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파발을 띄우고 하루 뒤인 4월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선은 무려 여덟 배에 달하는 700여 척으로 불어나 있었다. 관군과 백성들이 아연실색하는 가운데 1만7천여명의 왜군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조선 침략 선봉군 제1군이었다.

“성난 말벌떼가 따로 없지 않은가.”

실로 그러했다. 배에서 내린 왜군의 진격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대나무가 단박에 끝까지 쪼개지는 것 같은 날카롭고 맹렬한 기세였다. 경상감사 김수(金)의 명이 전군에 떨어졌다.

“전쟁 돌입이다. 작전은 약속된 제승방략 전법에 따른다.”

당시 조선에서는 왜군의 공격에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다. 일본이 명나라 침공을 도모하고 있다는 1589년의 첩보에 따라 길목에 해당하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방어 대책을 세운 것이다. 이른 바 제승방략(制勝方略) 전법이었다.


조선 관군들의‘제승방략’ 전법 무너져
전쟁 발발 이틀만에 상주에 倭침략 소식
상주목사 김해, 2군 선봉장으로 대구行
예상 웃도는 왜군 전력에 지휘부 동요
진군 포기하고 다시 상주로 회군하자
백성들은 보따리 싸들고 상주 탈출 러시
순변사 이일 중앙군 도착땐 상주는 텅텅


제승방략 전법은 중앙군과 지방군의 긴밀한 협조를 필수조건으로 삼은 군사작전이었다. 우선 침공 지점에서 가까운 관군들이 1차 거점지역으로 이동해 방어를 한다. 그러는 동안 후방의 관군들이 중요 거점지역에 집결해 방어 태세에 돌입한다. 이후 급파된 중앙의 장수들과 정예장교들이 지역의 군을 지휘하면서 적과의 전면전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관군은 세 갈래의 방어선을 따라 구축된 지휘계통에 의해 이동하게끔 설정되어 있었다. 제1방어선은 동래부사와 김해부사가, 제2방어선은 경상도 지역사령관인 좌·우병사(兵使)가, 제3방어선은 중앙에서 파견된 순변사가 지휘한다는 내용이었다.

“수령들은 군사를 이끌고 지정한 장소에 집결해 대기하라.”

경상도 각 지역의 관군은 신속하게 진지로 향했다. 경상좌도의 관군들은 동래성이, 나머지 지역의 관군들은 울산병영이, 경상우도의 관군들은 김해성이 목적지였다. 하지만 동래성은 관군이 당도하기도 전인 4월15일에 왜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왜군의 북상 속도가 예상보다 너무 빨랐던 것이다. 이어 4월18일에는 김해성이 무너졌다. 속도뿐만 아니라 화력에서도 압도적인 왜군 앞에서 조선 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희망은 제2방어선, 즉 4월18일과 19일 양일간에 걸쳐 울산좌병영에 집결해있던 경상좌·우도 소속의 관군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지 않아 함락되고야 말았다. 왜군의 기세가 지축을 흔들었다. 중앙군의 도움이 절실했다.

#2. 시작부터 위기, 중앙군에게 닥친 어려움

경상도 관군이 절체절명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 전쟁 발발을 전하는 파발이 도성을 향해 새처럼 날았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왜군 침공 사흘째인 4월17일에서야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 앞에서 조정은 다급해졌다.

“경상도를 방어할 중앙군 사령관으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하삼도(충청·전라·경상도)의 군대 전체를 총괄할 최고사령관으로는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을 임명한다. 즉시 전쟁에 임하라.”

아울러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삼아 죽령 방면을,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추풍령 방면을,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璣)를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각각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을 지키게 했다.

순변사 이일은 바로 병력 차출에 들어갔다. 함경도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난을 진압한 바 있는 명장 이일의 계산에 의하면 정예병사가 적어도 300명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모아놓고 보니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다.

“이래서야 무슨 전투가 되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군사 경험이라곤 전무한 오합지졸이었다. 심지어 어떻게든 안 가려고 기를 쓰는 서리(胥吏)들과 과거장에 시험이라도 치러 가는 듯한 유생(儒生)들의 작태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사흘이 지난 20일에도 쓸 만한 인원은 군관(軍官)과 궁사수(弓射手) 60여명이 전부였다. 필요한 병력 300명의 고작 5분의 1 수준이었다.

“어쩔 수 없다.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일단 도성을 출발한다.”

말에 오르며 별장(別將) 유옥(兪沃)에게 덧붙여 명했다.

“병사를 하나라도 더 모아 내려오라.”

이어서 경상도 11개 역의 찰방들에게 역마 동원령을 하달했다. 군사와 군수품을 원활히 수송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다.

#3.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주

상주에 전쟁 소식이 전해진 때는 4월14일이었다. 경상감사 김수의 명도 함께 당도했다.

“수령들은 군사를 이끌고 지정한 장소에 집결해 대기하라.”

상주목사 김해(金懈)는 기절초풍했다.

“김준신 그 자가 옳은 소리를 하지 않았는가.”

김해의 기억이 한 달 전인 지난 3월로 거슬러 올라갔다. 일본에서 돌아온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 그럴 필요 없다, 상반된 보고를 올림으로써 조정이 시끄럽던 즈음이었다. 청도 사람 김준신(金俊臣)이 김해를 찾아왔다.

“왜적을 방어할 계책을 세워야 합니다. 의병을 일으켜….”

김해가 김준신의 말을 끊었다.

“이리 태평한 때에 민심을 소동시키려 하다니 죄가 크다.”

그러고는 옥에 구금했다. 그런데 그 김준신의 말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김해는 신도 제대로 챙겨 신지 못하고 옥으로 달려갔다.

“김공, 그대가 옳았소. 이를 어쩌면 좋겠소?”

“전일 사또께서 제 충언을 새겨들었던들 상황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하나 이제 와 따진다고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임금이 위태로우면 신하도 욕되게 마련이고, 임금이 욕된 지경에 이르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절개입니다.”

“하니 마땅한 계책이 있소?”

“우선은 군사를 정비해 대구로 보내야 합니다. 제게 그 일부를 맡겨주시면 앞장서겠습니다.”

이에 김해는 김준신에게 전투부대 제1군의 통솔을 맡기는 한편 판관(判官) 권길(權吉)에게는 수송부대 제3군의 지휘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함청현령(縣令) 이국필(李國弼)과 함께 지원부대 제2군의 선봉이 되어 상주를 출발했다. 제1·제2군은 대구를, 제3군은 창원을 향해서였다.

4월18일에서 19일경, 제2군이 석전(칠곡)에 도착했다. 군대가 요동했다. 석전과 대구를 잇는 길이 피란민과 패잔병으로 가득한 까닭이었다.

“이게 다 무어냐? 피란민은 그렇다 치고 패잔병들은 다 어찌 된 게냐?”

“대구에서 순변사의 도착을 기다리던 중 왜군의 화력이 엄청나다는 전황을 듣고 지레 겁을 집어먹으면서 순식간에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김해는 당황했다. 모든 상황이 예상을 웃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불안에 휩싸였던 군대는 지휘부의 동요에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군사들의 사기는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더는 군대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김해와 이국필은 진군을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 그리고 4월20일 상주에 도착했다.

제1군과 제3군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제1군의 지휘관 김준신은 대오를 바로잡기 위해 애를 썼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살겠다고 도망가는 군사를 잡아 세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김준신과 권길도 말머리를 돌려야 했고, 4월21일에서 22일 사이에 상주에 도착했다.

소득 없이 돌아온 지휘관들을 보고 상주 지역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하더군.”

“이젠 별 수 없잖은가. 앉아서 죽을 거 아니면 다들 빨리 뜹시다.”

“사방이 왜군 천지일 텐데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오.”

“소백산맥이라면 그래도 안전할 게요. 높고 험한 곳이니.”

하나둘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상주는 빠르게 비어갔다. 4월23일,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중앙군이 상주에 도착해 맞닥뜨린 풍경이 바로 텅 빈 상주 읍내였다. <하편에 계속>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김성우의 논문 ‘임진왜란 초기 제승방략전법(制勝方略戰法)의 작동 방식과 상주 북천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공동기획지원 : 상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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