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 원류.지류를 찾아 .8] 신라이야기(7)

  • 입력 2003-03-04 00:00

화랑은 그간 귀족 출신 자제들로만 구성된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김
유신은 진골 출신이었고, 김흠운도 왕손(내밀왕(奈密王)의 8세손)이었으며 사
다함이나 관창 또한 귀족출신의 청년 장교들이었다. 그래서 화랑은 귀족신분
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화랑세기’는 귀족의 자제들만 화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용춘이 13세(世) 풍월주(風月主)
였을 때 활약했던 대남보(大男甫)가 그런 인물이다.

“(대남보는)용감하고 일을 잘 처리했으며 남의 위급함을 잘 구해주는
경향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다. 그러나 선골(善骨)의 품(品)이
없고 또한 균등(均登)의 힘이 부족했다.(‘화랑세기’13세 용춘조)”

대남보는 많은 사람의 우러름을 받았지만 ‘선골’과 ‘균등’이 부족한
것이 흠이라는 말이다. 선골과 균등이란 무엇일까?

“이보다 앞서 미생공(10세 풍월주)은 많은 폐첩(嬖妾)이 있었는데, 9부
낭두(郎頭)들이 모두 이 첩들을 이용해 붙좇았다〔屬〕. 그러므로 낭도(郎
徒)들은 다투어 그 딸을 바쳐 붙좇아 화랑과 교결했는데 이들을 이름하여
‘신선골(新善骨)’이라고 했다. 보리공(12세 풍월주)이 이를 염려하여 3파를
고루 섞어 등용해 그 세력을 같게 했는데 이를 이름하여 ‘균등(均登)’
이라 했다. 그래서 비록 공이 있는 자라도 만약 균등에 걸리면 진급을 시
키지 않았다.(‘화랑세기’ 13세 용춘공조)”

이 기록은 미생이 10세 풍월주로 재임하면서 딸을 바쳤던 낭도들을 중
심으로 ‘신선골’이라는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었음을 말해준다. 미생은 진흥
왕의 태자 동륜과 함께 여색을 탐하러 다녔으며 심지어 누이 미실과도 사
통할 정도로 색을 탐했다. 미생 때 형성된 신선골이 요직을 독점하자 12세
풍월주 보리가 3파를 고루 섞어 ‘균등’이란 제도를 만든 것이다. 3파란
‘화랑세기’ 11세 하종조에 의하면 이화(二花)·미실(美室)·가야(加耶)의 3
파를 뜻하는데 이 셋을 고루 섞어 인사에 공정성을 기한 것이 균등이었다.

선골도 균등도 아니어서 진급할 수 없었던 대남보에게 어떤 이가 “그
대의 딸이 아름다운데 어찌 신주(新主:풍월주)에게 바치고 골품을 얻지 않는
가”라고 권유했으나 그는 “우리 무리는 천인(賤人)인데 어찌 감히 여색으
로 풍월주를 미혹할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했다. 이는 천인들도 화랑도에
들어가 딸을 상관에게 바치면 골품을 얻을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용춘은 이 소식을 듣고 낭두별장(郎頭別將)을 불러 “대남보의 재능이
낭두가 될 만 한가?”라고 물었다. “될 만 하지만 골품이 없습니다.” “
대남보의 공(功)은 어떠한가?” “윗사람을 모신 낭도로서 출정한 바 있는데
, 대상(對上)이 아직도 승진을 못했습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대남보의 대상이 누구인가?” “조심보(曹心甫)입니다”

별장의 말은 균등에 의해 대상인 조심보가 먼저 승진해야 대남보도 승
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3파 균등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불합리한 원칙이라고 생각한 용춘은 “재능이 없는 자를 재
능이 있는 자의 대상으로 삼아 재능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지 않는 것은
재능을 장차 썩히는 것이다. 골(骨)과 파(派)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
면서 대남보를 세번 승진시켜 낭두로 임명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낭도들이 전 풍월주들을 찾아가 불평했는데, 문노가
“법이 점점 새로워지고 우리들은 모두 늙었는데 어찌 신주(新主:용춘)를 괴
롭히겠는가?”라고 동조하지 않자 미생도 개입하지 않아서 ‘균등’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대남보는 이런 용춘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풍월주를 미혹할 수 없다
’며 거부하던 딸을 바치려 했으나 이번에는 용춘이 거부했다. 대남보가 “
한명의 여자 때문에 어찌 공께서 걱정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권하자 용춘
은 ‘사람들이 너를 사사롭게 대한다고 말할까 염려해 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대남보의 딸은 이미 용춘에게 마음을 바친 상태였으므
로 용춘이 거부하자 우물에 몸을 던졌고, 낭두 등이 용춘을 찾아가 머리가
땅에 닿게 절하며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사죄하자 용춘은 마지못해 딸을
받아들였다.

대신 용춘은 “부녀가 한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면서 그 날로 남보
를 해직했는데, 남보는 불평하는 대신 “나를 알아주면 충분합니다. 어찌
지위를 논하겠습니까?”라며 기뻐했다. 진평왕은 그의 이런 충절을 높이 사
서 대남보를 궁사지(宮舍知)로 임명해 재용(財用)을 관장하게 했다.

‘화랑세기’는 “남보는 원래 부유했는데 그 재물을 모두 기울여 (용춘
)공을 위해 썼으며, 결사대〔死士〕 백 명을 얻어 공을 보호했으나 공이
알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신라사회가 신분이 낮은 인물들도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있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남보는 많은 재
산을 다 쓰고도 용춘에게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용춘이 종자들과
미복(微服)으로 거리를 지나는데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불렀다.

“처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이 모두 말을 탄다네./ 딸을 바치
고 가난해져/ 세 아들이 모두 베옷을 입었다네.”

노랫말이 심상찮다고 느낀 용춘이 그 뜻을 물었으나 종자들은 말하지
않았다. 남보의 집에 이르자 그 처와 세 아들이 손으로 삼의 껍질을 벗기
고 있다가 용춘을 보자 황급히 숨겼다. 그제야 남보가 궁핍해졌음을 알게
된 용춘이 종자들을 책망하자 “당두(唐斗)의 일곱 아들은 모두 영달했는데,
남보의 세 아들은 모두 천한 까닭에 거리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라고
실토했다. 당두는 미생에게 아름다운 처를 바친 것이 계기가 되어 출세한
인물이었다.

“이는 나의 잘못이다”라고 슬퍼한 용춘은 남보의 장자 학열을 승부(乘
府)에 천거해 오지(烏知)의 벼슬을 주었고, 자신의 뒤를 이어 풍월주가 된
호림에게 천거해 세 아들을 모두 낭두(郎頭)로 삼게 했다. ‘화랑세기’는
이렇게 등용된 세 아들이 모두 ‘충절을 숭상’했으며, 대남보는 진평왕
25년(603) 한수(漢水:한강)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워 대나마를 제수했으나
받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진평왕 25년의 한수 전쟁은 ‘화랑세기’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평왕조’와 고구려본기 ‘영양왕조’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영양
왕이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쳤으나 실패했다는 내용이
다.

대남보는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장남 학열은 삼국
사기 열전에 죽죽(竹竹)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죽죽은 선덕여왕 11년(6
42:백제 의자왕 2년) 백제의 장군 윤충에게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
金品釋)과 그 부인 고타소가 전사하는 대야성(大耶城:합천) 전투 기록에 나
온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사지(舍知) 용석(龍石)이 항복을 권하자
죽죽은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 지어준 것은 참대처럼 한
겨울에도 시들지 말고, 꺾일망정 굽히지 말라는 뜻이니 어찌 죽기를 두려
워 살아서 항복하겠는가?”라며 끝까지 싸우다 성이 함락되면서 용석과 함께
전사했다.

‘화랑세기’와 ‘삼국사기’ 기록을 조합하면 천민에서 낭두의 지위에
오른 충절의 인물 대남보 부자의 온전한 모습을 그릴 수 있다. 화랑은 귀
족자제 뿐만 아니라 대남보같은 천인들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선덕여왕이 전사한 죽죽에게 17관등 가운데 9등급인 급찬을
제수하고 그 처자를 서울로 이사시켰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그가 당시 합
천 사람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대남보 기용한 '용춘'

‘삼국사기’는 태종 무열왕의 부친 용춘의 이름이 ‘또는〔一云〕 용수(
龍樹)’라고 적고 있고, ‘삼국유사’는 ‘용춘 또는〔一作〕 용수’라고 적
어 두 인물이 동일 인물인 것처럼 적고 있지만 ‘화랑세기’는 용춘을 용
수의 동생이라고 달리 적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진평왕 44년(622)에
이찬(2관등) 용수를 내성 사신으로 임명했다는 기록과 동왕 51년(629)에
파진찬(4관등) 용춘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용수와 용춘이 다
른 인물임을 말해준다. 진평왕 44년에 2관등이었던 인물이 7년 후에는 4관
등으로 강등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둘이 형제간이라는 ‘화랑세기’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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