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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디아스포라
심재신 도모팀장 인터뷰 "재일교포 경북에 대한 고향 사랑 느낄 수 있었던 시간"
"여러 차례 일본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재일한국인분들과 함께한 여정이라 아주 특별했습니다." 경북청년 벗나래 일본 활동에 참여한 심재신 도모팀장은 이번 활동에 대한 소감에 대해 이렇게 밝히며 "경북도민회의 활동과 역할, 재일교포와 뉴커머의 차이, 이분들이 느끼는 한국의 위상과 한일관계 등을 많이 알게 돼 매우 만족스럽다"고도 말했다.평소 일본의 디자인, 지역문화, 도시재생, 마을만들기(커뮤니티 디자인) 등에 관심이 많았던 심 팀장은 앞으로 일본에서 유학이나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분야에 대해 일본의 현재 상황은 어떠한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참여하게 됐다.그는 "뉴스를 보니 일본 사회에서 혐한 서적들이 판매되고 극우 세력이 시위하는 모습이 있는 한편 청년들은 한국문화를 동경하고 열광한다고 했는데 그 현장에 와보니 감회가 새로웠다"고 강조했다.심 팀장은 일본에서 재일교포 3·4세를 주로 만났다. 대부분 연세가 많이 든 분이었지만 30대 두 분을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재일교포 2세와는 또 다르게 차별과 억압보다는 자연스럽게 일본 사회에 녹아들어 있다 보니 다른 일본 사람들이 본인을 재일교포(한국인)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지만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내적 갈등은 존재한다고 말해 많은 걸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그는 일본에서 만난 재일교포 중 재일경북도민회 이상휘 국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pride 경북' 배지를 일정 내내 달고 계셔서 고향사랑이 남달라 보였습니다. 또 제한된 시간에 많은 곳을 소개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따뜻한 마음과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편하게 일본어로 하셔도 된다고 했지만 헤어질 때까지 한국어를 해서 가슴 한쪽이 찡했습니다."심 팀장은 도민회원에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줬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에서 '파친코'라는 소설 원작의 드라마가 화제였다는 것을 알려드렸더니 꼭 보시겠다"고 했다. 또 "포항 구룡포에 일본인 가옥거리가 있다는 것도 소개해 드렸는데 흥미로워하셔서 다음에 포항 오실 기회가 되시면 꼭 가보시면 좋겠다고 얘기했다"고도 했다. 장석원기자 history@yeongnam.com심재신 경북청년 벗나래 캠프 도모팀장
2022.11.22
[재일동포 발자취 찾아 나선 경북청년 벗나래] (상) 박재길 오사카경북도민회 前 회장 "멸시받기 싫어 권투 시작하고 먹고살려고 스파링 역할도 했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남일보는 2015년 러시아와 중국, 일본의 강제 징용 1세대의 삶을 시작으로 2019년 호주와 뉴질랜드 등 이역만리 낯선 타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정착하기까지 대구경북 출신의 이민 1세대가 겪은 도전과 시련, 성공담을 취재해 보도했다.그에 이어 올해는 경북의 화두인 미래세대 경북청년들이 경북출신 재일동포들을 찾아 조기정착 세대에 대한 이해와 연대감 형성, 동포 기업방문 등 해외진출 기회를 모색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경북청년의 해외동포 발자취 재조명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2022 경북청년 벗나래' 일본 활동을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7개도시에 재일본경북도민회대구경북 출신 이민1세대 만나동포들과 연대감 형성·교류 시간청도출신 동포 日 공장 방문해생애사·일본에서의 생활 들어◆경북청년 벗나래는'2022 경북청년 벗나래'는 동북아시대 경북청년이 일본을 방문해 경북출신 재일동포단체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동포사회와 상호 교류를 통한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에 초점이 맞춰졌다. 동포와의 교류로 경북형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포석도 깔렸다.이번 활동은 사전 공모를 통해 선발된 경북청년 10명이 두 팀(도모와 다치팀)으로 나눠 진행했다. 이들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설계하고 자율적인 활동을 통해 경북의 미래 주역으로 해외 경북인들과 교류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 활동을 펼쳤다.특히 경북도와 교류 중인 재일본경북도민회를 둘러보고 이들의 생애사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들었다. 또 앞만 보며 땀으로 일군 사업장을 방문해 해외에서 경북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동포들을 이해하고 교류하는 시간도 가졌다.도모팀은 도쿄와 지바, 다치팀은 오사카와 교토 등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쳤다.◆재일본경북도민회는경북에 뿌리는 둔 재일본경북도민회는 도쿄, 오사카, 지바, 가나가와, 교토, 오카야마, 효고현 등 7개 도시에서 운영되고 있다. 전체 회원 수는 1천275명. 이 가운데 도쿄도민회가 회원 수 680명으로 가장 많다.가장 먼저 설립된 오사카도민회는 1960년 10월 결성돼 62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어 가나가와도민회(1982년 6월), 지바도민회(1985년 5월), 도쿄도민회(1987년 11월), 교토도민회(2004년 10월), 오카야마도민회(2013년 3월), 효고도민회(213년 8월) 순이다.재일본경북도민회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도쿄도민회는 코로나로 인해 신년회를 제외하고 최근 3년간 활동은 없었지만, 부인회는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부채춤 등 문화수업을 진행 중이다. 지난 5월에는 산불 피해 지원을 위해 경북도에 성금 2천만원을 전달해 끈끈한 유대감을 보였다.지바도민회는 경북출신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지만 매월 한 차례 정기모임을 갖는 등 도쿄도민회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유대 관계가 돈독하다. 오사카도민회 역시 매년 신년회를 열어 회원 간 결속력을 다져나가며 경북도 모국초청 연수 사업 참여 등으로 경북도와 친근감이 남다르다.교토도민회는 재일동포 학교인 교토국제학교에서는 한국어 수업을 하고 있다. 권혁대·김영철·김영길 부회장이 학교 부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야구 명문고로 손꼽히는 이 학교는 지난해 제93회 선발 고교야구대회에서 '동해(東海)'로 시작되는 한국어 교가가 두 번이나 울려 퍼지게 하며 일본 내 적지 않은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앞서 재일본경북도민회는 경북도청 신청사 준공 기념조형물인 '망월(望月)'을 제작해 기증했다.◆在日, 영원한 이방인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인 일본에 정착을 시도한 이민 1세대는 단순노동자나 농림업 등 블루칼라의 비중이 높았지만, 이후 세대는 일본 경제의 흐름을 타고 중소기업의 경영자로서 성공을 거둔 구중산층과 대학을 나와 일본기업에 채용되는 신중산층, 뉴커머(신정주자)가 늘면서 관리직과 사무직, 판매업, 서비스업 등 화이트칼라 비중이 커지고 있다.오사카경북도민회 전 회장인 박재길(78) 이하라공업 대표를 만나기 위해 효고현 야오시에 있는 공장을 직접 찾아갔다. 박 대표는 "한국에서 누추한 이곳까지 방문해 줘서 감사하다"며 고향 경북에서 자신을 찾아온 손주 같은 청년들을 반갑게 맞았다.박 대표는 "부친이 19세가 되던 해(1928년)에 생계를 위해 일본에 온 후 이렇게 생활하며 재일 조선인 2세가 됐다"고 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손수 기계들을 작동하며 공장에 대해 설명한 뒤 자리를 옮겨 일본에서의 생활사를 들려줬다.고향이 청도인 박 대표는 "강해지기 위해, 생계를 위해 권투를 배웠지만 돌이켜 보니 정말 필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것"이라며 "멸시받기 싫어 권투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생계를 위해 권투를 계속했다"고 한다. 일종의 '스파링' 역할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하지만 어떠한 핑계도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라는 단어를 몸에 달고 다닌 결과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사람이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게 현재 자신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오사카도민회 사무실에서 만난 정홍·김일룡 오사카도민회 부회장 역시 녹록하지 않았던 당시를 회상하면서 고향에서 온 청년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그들은 "지금 고향의 젊은 친구들이 이렇게 와서 너무 기분이 좋고, 바로 눈앞에 내 고향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며 "전 세대의 생애사도 중요하지만, 우리 청년들이 일본에 대해 많이 알아가고 열심히 노력해 행복을 쟁취하길 바란다"는 따뜻한 말을 전했다. 글·사진=오사카에서 장석원기자2022 경북청년 벗나래 캠프에 참가한 경북청년들이 이하라공업 공장을 방문해 박재길(맨 왼쪽) 전 오사카경북도민회 회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2022 경북청년 벗나래 캠프에 참가한 경북청년들이 오사카경북도민회 사무실을 방문해 정홍·김일룡 경북도민회 부회장, 배문자 부인회 회장 등과 대화의 시간을 가진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호주·뉴질랜드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6부> .7 <끝>] 25년간 식당업 ‘미다스의 손’ 송진상씨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투자이민이 아니라면 호주 이민자의 초기 정착은 결코 쉽지가 않다. 특별한 기술이 없고 영어도 잘 못한다면 안정된 직업을 구하기가 어렵다. 별다른 준비 없이 건너간 한인 1세대 이민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청소, 세차, 타일, 배관 등 노동을 하거나 자영업에 종사하는 교포가 많은 까닭이다. 물론 그중에는 남다른 노력과 수완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도 있다. 호주에서 25년간 8개의 식당을 차렸던 송진상씨 부부도 그렇다. 송씨 부부는 식당업만으로 꽤 많은 부를 쌓았고, 은퇴한 지금은 브리즈번의 대저택에서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식당에서 황금을 캐낸 미다스의 손이었던 셈이다.안동서 교편…전교조 간부 활동재단에 찍혀 사표 내고 이민결행할 일 못 구해 1년간 돈만 까먹다조그만 식당 차린 게 성공기 서막음식 가성비 뛰어나 손님들 줄 서대박가게 웃돈 받고 되팔기 반복무작정 이민에도 꽤 많은 富 쌓아브리즈번 대저택서 안락한 노후◆전교조 활동으로 고난…이민 결행송진상씨는 1949년 안동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송씨와 형제들은 유독 탁구를 잘 쳤다. 그를 비롯해 형들과 동생이 모두 학교 대표 선수였다. 송씨는 안동중을 다닐 때 전국체전까지 출전했다. 하지만 탁구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담임 교사의 권유로 탁구채를 놓고 연필을 쥐었다. 공부에만 매달린 덕에 청구대 병설 공업전문학교에 합격했다. 전공은 토목이었다.이후부터 직업을 자주 바꾸긴 했지만 순탄한 길을 걸었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화성건설(화성산업)에 입사해 1년 근무하다가 입대했다. 제대 후 영남대 3학년에 편입하면서 대구시청 5급 토목직 공채에 합격해 1년 반을 근무했다. 그즈음 결혼을 했다. 이어 공무원보다 월급이 많았던 농업진흥공사(농어촌공사)로 직장을 다시 옮겨 1년을 일하다가 안동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스카우트됐다. 교사 생활은 보람찼고 만족스러웠다. 나아가 같은 학교재단에서 설립한 전문대학에 초빙돼 교수가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교조 지회장을 맡으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재단에 찍히는 바람에 교수 임용은커녕 맡고 있던 토목과장 자리도 내놔야 했어요. 동료 여러명도 해직된 터라 새롭게 살길을 모색해야 했어요.” 그즈음 마침 큰딸도 친구네 집처럼 이민을 가자고 졸라댔다. 결국 14년간의 교사생활을 접었다. 사표 낸 지 한 달 만에 호주 이민을 결행했다. 1990년이었다. ◆“식당만 해서 잘 살고 있으니 행복”송씨는 토목 관련 자격증도 몇 개 따놓은 게 있으니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1년짜리 임시비자를 받아 가족을 데리고 호주 골드코스트로 갔다. 착각의 대가는 혹독했다. 할 일을 못 구해 1년을 강제로 놀았다. 가져 간 돈은 거의 다 까먹었다. 뭐라도 해야 했기에 브리즈번으로 이사를 갔다. 그 곳에서 1만달러를 주고 조그만한 식당을 인수했다. 식당은 그가 다니던 성당 신자들의 도움으로 꽤 잘됐다. 송씨 부부의 식당 성공기 서막은 그렇게 열렸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단체관광객이 많은 골드코스트에 대형 한식당(신라회관)을 차렸다. 관광 성수기엔 하루 손님이 300명에 달할 정도로 성업했다. 그 식당을 수년간 운영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덕분에 영주권 문제도 해결했다. 송씨는 같은 식당을 오래하지는 않았다. 신라회관도 동생에게 넘겨주고 3~4년간 면세점과 선물가게를 열기도 했지만 큰 재미는 못봤다. 이에 2000년부터 14년간 골드코스트와 브리즈번에서 한식당과 일식당(스시)을 여러 차례 운영했다. 3년 정도 장사를 잘해서 초기 투자금 대비 5~6배의 프리미엄을 받고 가게를 팔고, 몇달 쉬었다가 가게를 새로 오픈해 다시 높은 가격에 파는 식이었다. 식당이 매번 성공한 이유는 짐작대로였다. “우리가 차렸던 식당은 음식이 싸고, 맛있고, 푸짐하기로 유명했죠. 늘 손님이 줄을 섰어요. 그래도 한 곳에선 힘들고 지겨워서 오래는 못하겠더군요. 장사가 잘될 때 다 털고 해외여행을 하면서 재충전을 했죠. 우리처럼 식당만 해서 잘 살 수 있으니 호주는 좋은 나라죠. 우리 애들의 반대만 아니라면 지금도 식당을 또 하고 싶어요.” 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사진=이정화 작가 seajip00@naver.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호주·뉴질랜드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송진상씨가 호주 브리즈번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식당 성공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19.09.05
[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호주·뉴질랜드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6]파란만장한 30여년의 이민스토리 이기선씨
서울대 학사·석사, 육군사관학교 교관, 호주 청소년 배구국가대표팀 감독, 시드니의대 학부생, 여행 가이드, 면세점·보석공장 등 대표, 언론사 편집국장·사장, 금융회사 지점장, 호주 국립대 법학 석사, 호주 변호사(난민심사 업무), 건강식품·화장품 업체 사장, 택시 드라이버. 믿기 어렵겠지만 한 사람이 지닌 이력(履歷)이다. 한국에서의 스펙도 범상치 않지만, 호주에서의 삶의 궤적은 그야말로 변화무쌍이다. 다양한 경력과 직업의 간극마다에는 롤러코스터마냥 부침을 겪었던 드라마틱한 이민스토리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따로 책 한권을 써도 될 만큼 그의 인생 역정은 다채로웠다. 한때 시드니 최고 사업가라는 명성을 뒤로하고 지금은 여가 삼아 택시를 모는 이기선씨(62) 이야기다. 그는 돈을 갈퀴로 쓸어담듯이 벌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했다. 물론, 그 행복의 원천은 가족이다.◆박사과정 유학생이 호주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돼이기선씨는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다. 58년 개띠생이다. 서울에서 초·중·고를 다닌 후 1977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ROTC였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전방부대에서 1년간 소대장 생활을 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하다가 1986년 대위로 제대했다. 육사 교관 시절에 가정을 꾸렸고 서울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과정도 마쳤다. 교수나 학자가 될 생각이었기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따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장학금 문제로 미국 유학은 진척이 안됐다. 우여곡절 끝에 1987년 시드니대학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파란만장한 호주 이민 생활의 서막은 그렇게 열렸다.시드니대학서 박사과정 공부 중배구 가르치다 U21대표팀 맡아교수꿈 접고 같은 대학 의대 진학살인적 학업 일정에 또 중도포기대박 친 면세점 회계부실로 파산주위 도움으로 새로운 직업여정2년전 맡은 한인회 부회장 ‘보람’이씨는 시드니대학에서 박사 공부를 하던 중 호주 청소년 배구대표팀 감독이 됐다. 사연은 이렇다.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드니 장애인협회 사무실은 스포츠센터 내에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그곳에서 훈련을 하던 청소년 배구 클럽팀 코치를 맡게 됐다. 그가 초·중학교와 대학 시절에 배구선수였기 때문이다. 2시간에 10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일주일에 두번 훈련지도를 했다. 그리고 뉴사우스웨일스주(州) 배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그 클럽팀 회장의 제의로 주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이후 주 대표팀이 각종 대회를 휩쓸면서 이씨는 탁월한 배구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마침내 호주 청소년(21세 미만) 배구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됐다. “그때가 아마 1989년도였을 거예요.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는데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맡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도 그때만해도 박사 학위 따고 귀국해서 대학교수가 되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어요.”하지만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는 그의 인생 항로를 완전히 변경시켰다. 대표팀을 이끌고 해외 대회 출전 및 전지훈련을 가기 위한 영주권을 받은 게 호주에 눌러 앉아 살게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교수·의사 공부 포기하고 사업가로이씨는 그즈음 호주에서 박사학위를 따는 게 엄청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죽도록 공부해도 7년 안에 학위를 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박사가 돼서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교수가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귀국을 포기하고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전에 배구 감독도 그만뒀다. 1년을 공부해서 호주의 대입 수능격인 HSC(High School Certificate) 시험을 보고 시드니대학 의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2학년이 되자마자 휴학했다.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였다. “고 3때 공부하던 거보다 몇배는 힘들었어요. 과목 한개를 패스하려면 정말 죽을 힘을 다해야 돼요. 수업 진도 따라가는 게 버거워 평일은 단 일분도 숨 쉴 틈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학교 오면 집생각, 집에 오면 학교 생각밖에 안났어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결국 2학년 때 휴학을 했는데 아직까지 복학을 못하고 있죠. 하하~ 그런 살인적인 과정을 견뎌내고 여기 의대 졸업하는 학생들이 참 존경스러워요.” 그가 의대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던 건 그래도 비빌 언덕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배구로 딴 영주권’을 디딤돌 삼아 공부를 접고 돈벌이에 나섰다. 면세점 사업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즈음은 한국인 관광객이 호주로 물밀듯이 몰려오던 시기였다. 이씨는 아르바이트로 여행 가이드도 해봤기에 면세점이 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992년 시드니에 한국인 관광객 전문면세점을 처음으로 오픈했다. 장인에게 빌린 거금으로 배포있게 대규모로 차렸다. 매장면적 1천㎡에 직원 수는 60명이었다. ◆면세점 사업 대박…30대에 느낀 ‘돈의 맛’면세점 상품은 날개돋친 듯 팔렸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면세품에는 술, 담배 같은 듀티프리가 있고, 호주 특산품 위주의 택스프리가 있어요. 듀티프리 상품은 구색만 맞춰놓고 주로 택스프리 상품을 팔았는데 오픈 첫 해에 매출이 100억원이 넘었어요. 그때 제가 30대 초반이었지만 아마 시드니에서 제일 잘 살았을 거예요.” 면세점 사업은 잘 됐지만 문제가 있었다. 여행사가 손님을 보내주는 대가로 점점 더 과도한 커미션과 접대를 요구했던 것. 이에 커미션과 술값 등 마케팅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다 보니 매출이 서너배 늘어도 수익은 되레 감소했다. 술 접대하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사업을 다각화했다. 건강식품, 무스탕 의류, 환전, 보석(오팔) 제조 등 업체를 7개까지 늘렸다. 연간 최고 매출이 950억원까지 찍었다. 더구나 주로 현금장사여서 돈의 맛을 톡톡히 봤다. “어떤 날은 3일이면 현금이 150만달러 정도 들어오니까 자루에 담아 꾹꾹 눌러도 집 금고에 다 안들어가요. 그래서 그 돈을 침대에 쫙 펼쳐놓고 드러눕고 그랬어요. 돈 냄새도 좋더만요.”이씨는 면세점과 여러 업체를 주식시장에 상장시키고 본인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장 직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재앙이 찾아왔다. 면세점에서 주로 커미션으로 나간 현금거래의 회계정리를 안한 게 화근이었다. 경쟁업체의 고발 등으로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서 악몽은 시작됐다. 그가 쌓았던 엄청난 재산이 신기루처럼 모두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한순간에 망한 사업…“고통서 구해준 건 가족”세무조사로 엄청난 벌금을 맞고 사업은 급속도로 몰락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파산만은 막아 보려고 발버둥쳤다. 전 재산을 털어 넣고도 모자라 집과 차까지 팔았다. 2년을 그렇게 버텼지만 재기하지 못하고 결국 사업은 완전히 망했다. 빌려준 돈도 못받고 거의 빈털터리가 됐다. 지옥같은 생활이 시작됐다. 하루에도 몇번씩 자살충동과 화병에 시달렸다. 가족을 생각하면 더 미칠 것 같았다. “제가 딸이 둘인데, 큰 애가 대학 입학할 때 랩톱을 사달라고 했는데 못사줬어요. 그때가 살면서 가장 슬펐어요.”이씨는 돈은 잃었어도 인심은 잃지 않았다. 주위에서 여러 도움을 받았다. 친구 제의로 신문사(호주 동아)·잡지사(코리아타운) 사장과 편집국장을 3년간 지냈고, 금융회사가 알선한 지점장 노릇도 2년 했다. 하지만 단기 일자리에 마냥 매달릴 수는 없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번엔 법률 공부에 도전했다. 캔버라에 있는 호주 국립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호주 정부의 난민심사업무를 대행하는 국선 변호인(애드버케이트)으로 8년간 활동했다. 지금은 건강식품·화장품 업체 사장도 맡고 있지만 규모가 작아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대신 2년전 부회장을 맡은 한인회 업무에 보람을 느낀다. 특히 최근 소일거리로 시작한 우버택시 모는 일이 마냥 즐겁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이민 스토리는 아무래도 따뜻한 가족이야기로 결말을 맺을 듯하다. “사업이 쫄딱 망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힘을 불어넣어준 아내와 착하고 올바르게 자라준 아이들이 너무 고마워요. 요즘은 어쩌면 사업 실패가 행운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돈보다 훨씬 소중한 게 가족의 사랑 아니겠어요? 저는 복 받은 사람이고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사진=이정화 작가 seajip00@naver.com 공동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호주·뉴질랜드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이기선씨가 호주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파란만장했던 인생역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이기선씨 가족이 해외여행 중에 찍은 기념사진. 이씨의 두 딸은 호주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2019.08.29
[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호주·뉴질랜드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6부> .5] 문동석 호주한인총연합회 초대 총회장
호주에는 현재 18만명이 넘는 한인 교포들이 살고 있다. 교포 수가 적지 않은 만큼 각종 단체와 모임도 많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공식적인 조직이 한인회다. 하지만 호주 한인회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시드니, 멜버른(빅토리아주), 브리즈번(퀸즈랜드주), 골드코스트, 캔버라 등 지역별로만 조직돼 있었다. 호주 한인회가 교포사회 전체의 통합된 목소리를 대변하기엔 한계가 있었던 것. 이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각 지역 한인회는 의기투합해 2017년에 호주한인총연합회를 출범시켰다. 초대 총회장에는 문동석 전 시드니 한인회장이 선출됐다. 그가 낙점받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곳에서 산 기간만 반세기에 달하는 초창기 호주이민 사회의 산증인인데다, 한인회 활동에도 누구보다 앞장섰기 때문이다. 문씨는 지난달 호주한인총연합회장 2년 임기를 마치고 고문을 맡고 있다. 영천 수재…대구공고서 1등 다툼‘삼성 모태’ 제일모직 1기로 입사 濠 멜버른서 주경야독 파견근무 현지인들 여유로운 삶에 매료돼 귀국後 31세때 가족과 이민 정착 섬유 수입업 뛰어들어 성장가도 지역 한인사회 봉사에 열성 다해 시드니 한인회관 마련 등 업적도 1세대 이민자 중 돋보이는 성공◆대구공고 3학년때 제일모직 1기 입사문동석씨는 1938년 영천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7남매 중 넷째였다. 어린시절부터 유복했다. 그가 살던 집은 방이 30개나 됐다. 영천에서 가장 큰 한옥집이었다. 부친은 정미소를 운영했다. 문씨는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공부도 영천국민학교에서 가장 잘해서 대구 경북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수재들만 모였던 중학교였기에 그의 성적은 중간밖에 안됐다. 결국 경북고를 포기하고 대구공고를 택했다. 용 꼬리가 되기보다 뱀 머리가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대구공고에서 전교 1~3등을 했으니 원하던 대로 된 셈이다.문씨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나중에 장군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뜻을 바꿨다. 고교 3학년 1학기 때 삼성그룹의 모태인 대구 제일모직공업<주>의 사원 1기로 입사한 것. 삼성에 들어오면 독일 유학을 보내준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게 가장 큰 지원 동기였다. 그는 제일모직에서 1년쯤 일하다가 자원 입대를 했다. 어차피 가야 할 군대이기에 빨리 다녀와서 자리를 잡고 싶어서였다. 결과적으로 그 결정이 호주와 인연을 맺게된 배경이 됐다.◆이병철 회장 낙점으로 호주 파견근무문씨는 제대 후 제일모직에 복귀했다. 마침 그때 회사에서 호주 파견 근무 희망자 신청을 받고 있어서 곧장 지원했다. 양복 재료인 양모를 호주에서 직접 수입해 원료가공 공장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는 섬유 국산화의 기치를 내걸고 제일모직을 설립한 고(故) 이병철 회장의 뜻이었다. 양복재료의 부가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회사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호주에서 그 일을 수행할 적임자를 뽑는 만큼 당시 사장이었던 이병철 회장이 직접 후보들의 면접을 봤다. 장소는 서울 반도호텔이었다.“대략 10명쯤 면접을 본 거 같아. 내 차례가 돼서 면접장에 들어갔는데 가운데에 이병철 회장님이 앉아 있고, 그 옆으로 금성, 효성 부사장이 배석했지. 그리고 백운학 선생(관상가)도 있었고. 면접은 정말 간단했어요. 이 회장께서 내게 경상도 사투리로 ‘니 나이 몇살이고’라고 묻길래 ‘스무살입니더’라고 대답했죠. 잠시 후 이 회장께서 ‘됐다. 나가봐라’고 하신 게 다였어요. 그 말밖에 못들었으니 속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했죠. 근데 어찌된 일인지 한달이 지난 후에 나 혼자 합격 통보를 받았어요.”문씨는 이 회장이 학벌과 스펙이 좋은 사원이 아닌 자신을 낙점한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그의 관상이 좋았기 때문일 터. 잘 알려져 있듯, 이 회장은 사람을 쓸 때 관상을 가장 중시했기에 면접장에 관상가를 늘 앉혔다. “그날 면접에서도 관상가가 문 회장님을 뽑았을 것”이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그런가. 관상이 좋아서 안 굶어죽고 잘 사는 건가~”라며 껄껄 웃었다.◆호주에 매료…주저없이 이민 떠나문씨는 21세가 되던 1958년 1월에 호주로 파견 근무를 떠났다. 그의 멜버른 생활은 주경야독이었다. 낮에는 양모원료 수출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RMIT 멜버른 공과대학에서 양모에 관한 이론 공부를 했다. 또 주말에는 농장에서 양털 깎는 실습도 했다. 일과 공부에 매진했지만 그는 호주가 너무 좋았다. 현지인들의 여유롭고 풍족한 삶에 매료됐다. 특히 지인 소개로 알게된 지롱(멜버른 근처)의 한 농장에 놀러가서 알게 된 농장주 할머니가 유독 따뜻하게 맞아준 게 이민 결심을 더욱 굳힌 배경이 됐다. 나중에 그 할머니는 문씨의 이민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역할도 했다. 그는 2년간의 호주 파견근무를 마치고 제일모직 양모 원료 공장으로 복귀했다. 호주에서 수입한 양모 품질을 감정해 어떤 옷감으로 쓸지를 분류하는 일을 맡았다.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하고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호주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회사의 해외 유학 조건인 9년 복무 연한을 채우자마자 그는 꿈에 그리던 호주 이민을 결행했다. 1969년이었다. 당시는 백호주의가 심했던 터라 동양인이 이민 허가를 얻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러나 문씨는 호주 정치권에도 인맥이 있던 지롱 농장의 그 할머니가 힘써준 덕에 초청이민 자격을 얻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도 그 할머니가 너무 잘해줬어요. 우리 애가 세명(1남2녀)인데, 그 할머니가 호주서 보내준 옷만 입고 자랐어요. 그리고 초청이민에 필요한 취업, 재정, 주택보증까지 다 해줬어요. 내 인생 최고의 은인이에요.”◆사업·한인회 활동으로 보낸 50년 문씨는 시드니에 있던 ‘블랙 앤드 베어’라는 양모 수출 회사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8년간 근무한 뒤 1978년 섬유수입 업체를 차렸다. 회사명은 낮밤없이 일하겠다는 의미로 ‘선문(SUN MOON) 트레이닝’이라고 지었다. 회사는 번창했다. 그는 사업 영역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섬유에서부터 산업용 벨트와 호스공장, 건설업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종합상사를 운영했다. 회사가 성장가도를 달리던 1980년대, 해외 거래처가 주로 한국이었기에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수출 유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문씨는 한인사회 봉사에도 열성을 다했다. 이민생활 시작 2년 만인 1971년부터 시드니한인회 총무와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68년 출범한 초기 시드니한인회의 반석을 다지는 데 큰 힘을 보탠 것. 이후 문씨는 제15대 시드니한인회장(1985~1987)을 맡아 한인회관을 마련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이외에 한호상공인연합회 부회장, 호주 한인상공인연합회장, 민주평통호주협의회장 등을 역임한 뒤, 2017년 호주한인총연합회 초대 회장에 추대됐다. 호주 1세대 이민자 중에서 성공을 거둔 교포도 적지 않지만, 문씨가 이룬 부와 명예는 단연 돋보인다. 그의 자녀들도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만큼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 “내가 아마 시드니에서 가장 오래 산 한국인일 거예요. 지난 50년 세월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뛰어나서라기보다 운이 좋아서 성공한 거라고 생각해요.”호주 한인사회의 거목(巨木)인 문씨는 조국을 향한 애정도 여전했다. 특히 청년실업에 대한 걱정이 컸다. 그 대안으로 호주에서의 워킹 홀리데이를 강조했다. “얼마 전에 워킹 홀리데이 체류 가능 기간이 3년으로 늘어났어요. 무슨 일을 하든 여기서 3년을 비벼대다 보면 살 만한 길을 찾을 수 있지 않겠어요? 도전정신과 열정이 넘치는 많은 한국청년들이 호주에서 성공의 꿈을 맘껏 키워보길 바랍니다.” 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사진=이정화 작가 seajip00@naver.com 공동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호주·뉴질랜드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문동석씨가 본인 소유의 런던챔버 빌딩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반세기에 걸친 호주 이민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2019.08.22
[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호주·뉴질랜드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6부> .4] 조선족 악기 사업가 이동호씨/멜번저널 편집장 김은경씨
호주 한인사회를 취재하면서 ‘구포’와 ‘신포’라는 생소한 용어를 알게 됐다. ‘구포’란 주로 1970~80년대 베트남, 독일, 중동 등지에서 계약노동자로 일하다가 호주로 건너가 정착한 사람들을 뜻한다. ‘신포’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투자이민을 간 사람들이다. ‘구포’ 중 상당수는 호주사회에 뿌리내리기까지 적지 않은 고생을 해야 했다. 반면, 부유층인 ‘신포’는 처음부터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구포’의 눈에 ‘신포’가 고와 보일 리가 없었다. 양측 간에 심각한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구포’쪽에 가깝긴 하지만 특이한 사연을 지닌 소수의 이민자들도 있다. 그중에는 사회적 약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빛나는 성공을 거둔 경우도 있다. 호주 멜버른에서 찾아보기 힘든 조선족 출신 악기 사업가 이동호씨와 미혼모의 아픈 과거를 딛고 한인사회 언론계를 선도하는 김은경씨(스텔라 김·멜번저널 편집장)가 대표적인 인물이다.멜버른서 보기힘든 조선족 출신이 악물고 돈벌어 악기점 대성공지역 상공인연합회 부회장 ‘우뚝’◆음악 공부, 악기 연주에 바친 청춘이동호씨는 1958년 중국 랴오닝성(요령성) 개원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부친 고향은 영일군(현 포항시) 기계면이다. 일제 강점기 농촌에는 굶기를 밥먹듯하는 집들이 수두룩했다. 이씨 조부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그리고 일제가 싫어서 식솔을 데리고 중국으로 떠났던 것. 조부가 정착한 개원은 경상도 출신이 많았는데, 거기서도 대부분 찢어지게 가난했다. 더구나 이씨 집은 대가족이었으니 입에 풀칠하기가 버거웠다. 그럼에도 이씨 남매들은 머리가 뛰어났다. 수재급이었다. “누나, 형 다섯명이 한 해에 대학에 합격한 적이 있었죠. 그 때 신문에도 크게 나고 그랬지. 나 빼놓고 모두 나중에 박사 되고 대학 교수를 했어요. 우리 남매 중 장사한 건 나밖에 없어요. 그래도 돈은 제일 잘 벌어요. 허허.”이씨의 어린시절이 힘들었던 건 배고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소학교 1학년 때 문화대혁명(1966~1976)이 일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반혁명분자로 몰려 곤욕을 치렀고 가정도 파탄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연좌제는 그리 가혹하지 않았는지 그와 남매들은 학교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이씨에게 불행만 준 것은 아니다. 음악과 악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줬다. 어린시절부터 그는 각종 마을행사나 학교에서 피리 따위를 불었고 풍금도 쳤다. 악기 연주가 적성에 맞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본격적으로 연주와 악기 공부에 매진했다. 안다뤄본 악기가 없을 정도였다. 이후 그는 2년제인 랴오닝성 조선족 사범학원을 거쳐 베이징 중앙민족대를 다녔다. 음악으로 청춘을 보내며 악기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탄탄한 바탕은 갖춘 셈이다. ◆당당히 내세운 “세계 최대 악기점”이씨가 호주에 살게 된 것은 당시 멜버른대 장학생이던 형 때문이었다. 형은 “멜버른이 살기 좋다”며 동생을 불렀지만, 유학생이던 형과 그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형으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조선족이었기에 한인사회에도 편입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일해야 했다. “맥주 캔 용기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어요. 돈을 더 준대서 야간 근무를 했어요. 자정부터 오전 8시까지 노예처럼 밤일을 10년간 했어요.”그는 악착같이 모은 2만달러를 가지고 조그마한 악기점을 차렸다. 밤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낮에는 가게 영업을 하는 더욱 힘든 삶을 버텼다. 마침내 공장 일을 접고 야심차게 악기점에 매달렸으나 장사가 잘 안됐다. 그런데 파리만 날리던 악기 사업에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일본서 수입해온 중고 피아노가 불티나게 팔렸던 것. 도쿄대 박사인 동생의 도움으로 대박을 친 것이다. 이후로 그의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웠다. 한때 시드니, 멜버른에서 악기점 4개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통합해 멜버른 시내에 대형 악기점 한 곳만 운영한다. 악기에 문외한인 기자가 “멜버른에서 가장 큰 악기점 맞느냐”고 묻자 이씨는 손사래를 쳤다. “멜버른이 아니라 세계 최대라고 보면 되요. 당연히 최고의 명품 악기도 다 갖추고 있어요. 나만큼 악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는 충분히 자랑할 만했다. 멜버른에는 조선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씨도 지난 30년간 멜버른에서 조선족을 딱 한명 봤다고 했다. 과거에는 현지 한인사회에서 외면받았지만 성공한 사업가로 우뚝 섰다. 지금은 멜버른 상공인연합회 부회장도 맡고 있다. 호주에서 꽃피운 그의 악기인생이 어디까지 만개할지 궁금해진다.미혼모 상황서 가족과 이민생활언론·출판계 일하며 주간지 창간한인들 소식 공유 매체 자리매김◆재능 많은 문학소녀, 한편엔 그늘김은경씨(62)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어서 아주 어릴때부터 타지로 이사를 많이 다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구와 인연이 깊다. 아버지가 제대 후 민간인 신분으로 베트남에 돈 벌러 가자 남은 가족은 아버지 고향인 대구로 왔다. 김씨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삼덕초등을 1년 다닌 후 경혜여중, 경북여고를 졸업했다. 같이 살던 외할머니는 외손녀 교육에 극성이었다. 국어 숙제를 잘못하면 한밤중에도 깨워 다시 시켰다. 글짓기, 그림그리기 등 대회란 대회는 다 내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머니는 많이 앞섰던 분이셨어요. 그땐 불만이 있었지만 외할머니께서 일깨워준 재능이 제 인생에 큰 도움이 됐어요.”김씨의 문학적 재능은 중·고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각종 글짓기대회에서 장원을 휩쓸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고교 때까지 방송반 활동도 병행했다. 다재다능한 문학소녀였던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가정환경이 나빠져 맘고생을 했다. 중학교 3학년때부터 베트남에 있던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뚝 끊겼다. 돈도 안 보냈다. 여자문제였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다가 고교 졸업을 앞둔 어느날, 4년 만에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호주로 이민가서 초청장을 보낼 테니 가족이 함께 오라’는 내용이었다.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 기술자들이 베트남전이 끝나자 귀국하지 않고 대거 호주로 이민을 가던 시기였다. 김씨 가족은 대구 생활을 접고 서울에서 이민준비를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사정이 생겨 3년 만에 이민을 갈 수 있었다. 1979년, 김씨의 나이 21세 때였다. 당시 김씨는 임신한 상태였다. 혼인신고는 않고 함께 살던 약혼자와 가진 아이였다. 아버지의 반대로 김씨는 약혼자를 남겨두고 가족과 함께 한국을 떠났고 끝내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다.◆멜번저널, 한인사회 소통 역할김씨 가족은 시드니에서 1년쯤 살다가 멜버른으로 이사했다. 이후 김씨는 시드니와 멜버른을 오가면서 여러 직업을 가졌다. 지인의 소개로 호주 국영방송국에서 한국어 방송을 진행했다. 2주에 30분 분량이었다. 또 가게 점원, 잡지와 신문기자도 했다. 가장 오래다닌 직장은 사진현상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필름 색상을 조절하는 컬러 애널리스트로 10년간 근무했다. 본업을 하면서 20대 후반의 또래들을 모아 교포를 위한 잡지를 펴냈다. 수필과 호주 역사 등의 내용을 담았다. 당시엔 타자기도 없어서 손으로 쓴 것을 복사해 묶은 간행물을 집집마다 배달했다. 그러다가 한인회보 제작을 맡았다. 역시 손으로 쓰고 복사하는 방식이었다. 그즈음 호주에서 한국인 이민자가 가장 많은 시드니에서 교포신문(대한신보)이 생겼다. 김씨는 그 신문사가 창간 기념으로 개최한 이민수기 공모에서 대상을 받았다. 교포사회에서 글 잘쓰는 사람으로 알려진 계기가 됐다. 그는 1997년에 ‘호주와 이웃하기’란 책을 펴냈는데, 영남일보가 선정한 우수 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씨는 2000년에 주간지인 멜번저널을 창간했다. 멜버른 최초의 한인매체로 19년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광고 수입으로 운영하는 무료지다. 창간 10주년 전후가 최전성기였다. 150페이지 분량으로 6천~7천부를 발행했다. 인터넷이 보급될때도 별 문제는 없었지만,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영향을 받았다. 젊은층 광고를 SNS에 잠식당했지만, 지금은 다시 회복세를 타고 있다. 현재는 3천부 정도를 찍어 2003년 결혼 후 발행인을 맡은 남편과 함께 한인업소를 중심으로 배부한다. “멜번저널은 단순한 광고지가 아니에요. 멜버른 한인사회의 소식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나름 전통있는 매체죠. 그래서 1면 표지에 광고를 싣지 않는 원칙을 어긴 적이 없어요. 멜번저널은 저뿐만 아니라 교민의 애환이 녹아있기에 팔거나 폐간할 생각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교민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더욱 알찬 매체로 만들고 싶어요.” 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사진=이정화작가 seajip00@naver.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호주·뉴질랜드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공동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이동호씨가 본인이 운영하는 호주 멜버른 시내 악기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악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피아노 치는 이동호씨.멜번저널 편집장 김은경씨가 자택 1층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한인 매체’ 운영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김은경씨가 창간한 멜번저널.
2019.08.08
[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호주·뉴질랜드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6부> .3] 서울대 출신의 멜버른 타일공 조춘제씨
호주는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다. ‘이민 가고픈 나라’ 순위에서도 늘 열손가락 안에 든다. 호주 이민의 실패사례 중에는 특히 한국에서의 최고 학벌과 스펙만 믿고서 건너간 경우가 많다. 호주에선 한국의 변호사, 의사 자격증조차도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도 전문직을 갖고 싶다면 모든 과정을 호주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니면 식당, 마켓 등 자영업을 하거나 그마저도 아니면 육체노동밖에 할 게 없다. 하지만 한국 인텔리 이민자 상당수는 자존심 때문에 이도저도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직업을 못구해 돈과 세월만 축내고, 심지어 가정까지 파탄내고 되돌아 오기 일쑤다.이런 점에서 조춘제씨(58)는 학벌을 버리고 생존한, 현명한 이민자다.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호주에서 타일공이 됐다. 처음엔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 선택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큰 돈을 벌지는 못해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수입이 짭짤하다. 하루 작업 시간도 길지 않다. 늦어도 오후 4시 전이면 다 끝나기에 생활도 여유롭다. ‘소확행’의 삶인 셈이다. 그렇다고 조씨가 안분지족의 이민생활만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호주 멜버른에 정착해 한글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빅토리아주 한인회 부회장을 맡아 현지에 소녀상 설치를 추진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몸담으면서 체화한 사회공동체 의식이 아직도 그의 내면에 살아숨쉬고 있는 것이다.경상·전라도 경계 육십령서 출생 고교 3년 장학생에 서울대 진학시위중 목격한 동료학생 분신자살 다함께 사는 사회공동체 일깨워호주서 선택한 육체노동 타일공 용기 필요했지만 소확행 삶 선물 낮에 일하고 밤엔 한글학교 봉사“道, 멜버른 소녀상 관심 가져주길” ◆비범했던 부친 “나는 왜 임수경같은 자식 없나”조씨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경계를 이루는 육십령(六十嶺) 자락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기는 당시 또래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형제는 9남매로 많은 편이었다. 그만큼 더 가난했다. 조씨의 누나 셋은 중학교를 못갔고, 조씨부터 이하 동생들은 줄줄이 1년씩 늦게 중학교에 갔다. 그가 1년을 꿇은게 싸움꾼이 된 빌미가 됐다. “중학교에 가니 한해 선배라고 나를 괴롭히고 시비를 거는 애들이 있었어요. 나도 맞고는 못사는 성격이라 그 애들과 치고받고 많이 싸웠어요. 가방에 몽둥이를 넣어 다닐 정도였죠. 만만하게 안보이려고 사이클 선수 생활도 했고요. 중2 때까지 그랬어요.”조씨는 중3이 되면서 철이 확 들었다.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듯 싶은 모범생으로 변했다. 싸움과 운동을 접고 공부만 했다. 머리도 좋았던지 연합고사를 잘 봐서 장계고 3년 장학생이 됐다. 이어 서울대 농화학과(83학번)에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하자마자 후회했다. 점수에 맞춰 선택한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갔다. 그의 고민과 방황은 부친의 피를 물려받은 필연적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친은 평범한 농사꾼이었지만 사회에 대한 의식은 비범했다. 그 당시로선 위험할 만큼 진보적이었다. 1989년 임수경 방북사건이 알려졌을 때 그의 부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자식이 이렇게 많은데 저런 용기있는 자식이 없으니 무슨 낙으로 사나.” 아마도 조씨의 인생관도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청년기부터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추구해왔던 그의 인생궤적을 들여다보면 쉽사리 짐작이 간다.◆학생운동 하면서 깨달은 공동체의 가치조씨는 1986년도에 복학했다. 사회 곳곳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끓어오르던 시기였다. 조씨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86년도에 학생회관 근처에서 시위도중 학생 한명이 분신자살을 했어요. 나하고 거리는 10m밖에 안됐죠. 너무 충격을 받아 몇초 동안 멍하니 보고만 서있었던 거예요. 그때 누군가가 ‘야 이새끼들아! 사람이 불에 타는데 안끄고 뭐하냐’며 소리를 쳤어요. 아무 것도 못했던 그 몇초를 생각하면 지금도 괴로워요. 아마도 그 죄책감이 세상은 나 혼자만이 아닌 다 함께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일깨운 확실한 동기가 됐던 거 같아요.”당시 시위는 격렬했고 정권의 탄압은 무자비했다. 그해 서울대에서만 2천명이 제적됐고 조씨도 그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6·10 민주항쟁 승리의 결과로 그 역시 복학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엔 평범한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해외에서 새 삶을 꾸리고 싶었고 호주를 택했다. ◆“타일공은 천직…촌놈으로 태어나 감사”멜버른에서 가진 첫 직업은 노인 요양병원 청소일이었다. 근데 문제는 청소가 아니었다. 허구한 날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보는 게 고역이었다.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7개월 만에 그만뒀다. 마침 그때 한국에 있던 지인의 요청으로 귀국해 염업조합이 하는 소금 유통개선 업무를 잠시 맡기도 했다. 이후 대학 친구들과 유기질 비료 공장을 차린 게 큰 화근이 됐다. 조씨는 사업을 포기하고 다시 호주로 갔지만, 한국에서 청천벽력같은 연락을 받았다. 공장 차릴 때 빌린 정부 대출금을 후임자들이 못갚아서 조씨 선산이 가압류 당했다는 것. 조씨는 빌린 돈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먹고살길이 막막했다. 서울대 졸업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막노동이라도 할 생각에 일당이 좋은 일자리를 찾았다. 타일러(tiler)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기술을 배울 때 하루 일당이 100~120달러, 한국돈으로 10만원쯤 됐다. 이후 기술자가 돼서는 3배 이상 받았다. “3~4년간은 정말 죽기살기로 했어요. 일감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한국식 영업전략도 썼어요. 일거리를 알선해준 사람을 찾아가 포도주를 선물하고 거래처 사람들에게는 크리스마스, 부활절 때 감사 카드도 썼어요. 그게 잘 먹혔어요. 기술과 영업력을 갖추니 생각보다 수입이 좋더라고요. 빚은 벌써 다 갚았고 남부럽지 않게 삽니다. 얼마전에도 2주반 동안 하루 6시간 일하고 600만원 벌었어요. 남들과 달리 이 일을 쉽게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아마 촌놈기질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촌놈으로 태어난 게 감사할 따름이죠."◆한인회 발전과 멜버른 소녀상 건립 앞장그는 이제 버젓한 타일작업 회사(CJ 타일 마스터)도 운영한다. CJ는 춘제의 영문 앞글자다. 회사는 다른 작업팀에게 수수료를 받고 일감을 알선하는 업무도 한다. 조씨는 생활이 안정되자 한인 공동체를 위해 뜻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현지에 한글학교가 있는 것을 알고 찾아가 한글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또 일감 알선 수수료 수입을 한인회를 위해 사용한다. “사실 이민올 때 한국에서 학생운동, 사회운동 했다는 사람이 저 혼자 잘살겠다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한인사회를 위한 일에 앞장서고 있는 셈이죠."조씨는 ‘멜버른 평화의소녀상건립위원회’ 회장이기도 하다. 박근혜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분노해 만든 조직이다.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자는 조씨의 외침에 교민들도 호응했다. 현재 300여명이 건립위원회에 동참했고 기금을 2만달러 모았다. 여기에다 소녀상 장학금 기금도 조씨가 기부한 1만달러를 비롯해 총 2만5천달러가 적립돼 있다. 그래도 돈이 모자랐기에 조씨는 발로 뛰었다. 지난해 초에 경기도의 한 지자체가 해외 소녀상 건립을 돕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청을 찾아가 지원을 부탁했다. 해당 지자체도 화답했다. 지난해 11월 공무원 등 4명을 멜버른에 보내 한인회 의견을 수렴하는 등 지원책을 모색했다. 마침내 3주전에 조씨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국내에서 소녀상을 제작해 멜버른에 보내 주겠다며 연락해온 것. 제작비는 시민 성금으로 충당되며 12월 초에 멜버른 한인회관에서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소녀상 건립비 마련에 애태웠던 조씨는 큰 짐을 덜게 됐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한인회관 내에 소녀상을 설치하는 만큼 한인회 회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공청회와 총회를 개최한 후 안건이 통과되면 회관 일부를 리모델링할 계획이다. 멜버른에 소녀상이 세워지면 2016년 시드니에 이어 호주에서 2번째고, 전세계에선 미국, 캐나다에 이어 5번째다.조씨는 조심스레 취재진에게 해외 교포를 가장 잘 챙기는 경북도가 해외 소녀상 건립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사실 해외 교포의 삶을 취재하는 이 프로그램을 알고 나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상상도 못했거든요. 인터뷰 요청을 받고 처음엔 의심을 많이 했어요. 무슨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경북도가 후원한다는 말을 듣고 신뢰가 갔고 너무 감사했어요. 중앙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거 아닙니까. 멜번 소녀상 건립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사진=이정화작가 seajip00@naver.com공동 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대양주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호주 멜버른에서 타일업을 하면서 한인회 발전과 현지 소녀상 건립에 앞장서고 있는 조춘제씨가 빅토리아주 한인회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조씨의 대학 졸업식 사진.조씨가 호주 이민을 가기 직전인 2003년에 찍은 가족여행 기념사진.
2019.08.01
[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대양주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2] 한국식 케이크로 뉴질랜드 입맛 사로잡은 김보연씨
1953년 12월, 안동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남자아이가 있었다. 7남매 중 넷째. 6·25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시기였다. 온 나라가 지독한 빈곤에 허덕였던 시절을 그 아이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깡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그래도 초등학생이 되자 군것질을 할 푼돈은 생겼다. 처음으로 사먹은 것이 학교 앞 ‘전빵(문방구)’에서 파는 카스텔라. 어찌나 맛있었던지 빵에 붙어있는 종이까지 싹싹 핥다 못해 씹어 먹었다. 당시 소년에게 빵은 ‘피안(彼岸)의 세계’에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6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당사자는 그렇게 회상했다. 그는 지금 뉴질랜드에서 꽤나 잘 나가는 케이크·빵 제조 및 판매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한인사회에선 ‘김보연베이커리’로 유명한 ‘게토하우스’ 김보연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한국식 케이크와 빵으로 뉴질랜드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어릴적 ‘피안의 세계’에서 맛본 빵맛의 감동을 이역만리 ‘차안(此岸)의 세계’에 전하고 있는 셈이다. ◆제빵업체서 16년 ‘성공의 자산’김씨는 안동에서 중·고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 식품공학과에 입학했다. 1979년 대학 졸업 후 삼립식품 부산공장에 들어가면서 제빵 인생의 서막이 열렸다. 당시 그 업체는 ‘보름달’ 카스텔라나 ‘달나라’ 빵 등을 만들어 꽤나 재미를 봤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사람들의 입맛이 고급화되면서 제과점 빵을 선호하자 업체는 1981년 주식회사 기린으로 사명을 바꾸고 이듬해 ‘밀탑’이란 제과점 체인을 만들었다. 김씨에겐 행운이었다. “밀탑 브랜드를 만드는 파트에 가게 됐어요. 회사에서 제과점 체인을 만들기 위해선 외국에서 장비를 수입하고 기술을 전수해야 했는데 내가 그 일을 맡았어요. 일본,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유명하다는 제과점을 안가본 데가 없어요. 젊은 시절에 외국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경험을 쌓았죠.”제빵업체 근무 성공가도 달리다40대 초반에 힘든 이민생활 결단부부 함께 런치바 운영 등 생고생본인 이름 건 제과점 열어 ‘반전’억척스러운 아내 배달·영업까지오클랜드市 전역 7개 점포 확장마흔을 갓 넘겨 밀탑사업부 부장까지 승진한 이후 식품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신제품 개발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피라미드 구조의 조직 생활에 한계를 느꼈다. 계속 승진한다는 보장이 없고 비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입사 16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뉴질랜드 이민을 결심했다. “내 사업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가진 돈이 적다보니 한국에선 성공할 자신이 없었죠. 대신 외국은 남들보다 많이 가봤기에 두려움이 없었어요. 뉴질랜드 이민을 마음먹은 건 내가 경제적으로 실패해도 자식 교육만큼은 잘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새벽 4시부터 부부가 함께 ‘생고생’김씨는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엔 빵 관련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8t 트럭도 한 번 몰아봤지만 도저히 엄두가 안나 포기했다. 같은 안동 출신인 부인 유성자씨도 속성으로 봉제를 배우고 재봉틀도 사서 가져 갔다. 하지만 1995년 막상 가보니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결국 김씨는 슈퍼마켓 내에서 빵 만드는 영세 업체에 취직했지만 급여가 너무 박했다. 4인 가족 생계유지가 힘들어 몇달 만에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점심에 주로 샌드위치를 파는 런치바(Lunch Bar)를 차렸다. 세들어 살던 집에 딸린 조그마한 가게였다. 부부는 엄청난 고생을 했고 자녀 역시 그랬다. “영업 준비를 위해 새벽 4시에 나와야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부터 돌이 지난 막내가 우리 부부가 나오면서 문만 닫으면 귀신같이 알고 자지러지게 울더라고요. 그 이후부터는 겨울 새벽에도 나오면서 문을 조금 열어놨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해 아직도 애잔합니다.” 영어를 거의 못했던 부부가 키위(뉴질랜드인의 애칭)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에피소드도 있다. 키위 손님이 ‘뉴스페이퍼’를 달라고 한 것을 ‘페퍼’로 잘못 알아듣고 후추를 준 적도 있었다고. 그래도 부부는 열심히 일했다. 오후 3시 영업이 끝나면 한국 손님으로부터 주문받은 케이크를 만들어 직접 배달도 했다. 하지만 가게 매출은 오를 기미가 없었다. 런치바를 하면서 남편보다 고생이 심했던 부인이 먼저 나섰다. 가게를 팔고 다른 일을 하자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2년 만에 런치바를 정리하고 네덜란드인이 오클랜드 웨스트 하버에서 운영하던 제과점을 인수했다. 그 가게가 김보연 베이커리의 효시였다. ◆‘김보연’ 내건 케이크로 큰 인기 부부는 야심차게 전문 빵집을 열었지만 장사가 신통찮았다. 이때도 역시 부인이 나섰다. “우리 가게가 한국인 거주지와 멀다 보니 손님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한국 식품점 7~8곳을 뚫어 우리 빵을 넣었어요. 빵 배달도 나 혼자 승용차로 했죠. 남편은 부끄럽다고 끝내 안했어요.” 부인이 악착같이 발로 뛰었지만 매출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웨스트 하버 빵 가게는 그렇게 큰 재미를 못보고 3년 만에 접었다.김씨는 2002년에 승부수를 띄웠다. 오클랜드 시내 도미니온 로드(Dominion Road)에 제대로된 제과점을 오픈했다. 가게 이름은 교민 상대로는 본인의 이름 석자를 내건 ‘김보연 제과’였고 현지인을 위한 상호는 ‘베이커스 프라이드’였다. 그리고 3년 후 가게 이름을 ‘게토하우스(Gateau House)’로 바꿨다. 게토(Gateau)는 케이크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도미니온점을 기점으로 김씨의 사업은 확장세를 탔다. 도심인 퀸스트리트에도 점포를 냈다. 퀸스트리트는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이 주류를 이루는 ‘대학촌’같은 곳이어서 젊은층 기호에 맞는 케이크와 빵을 만들어 팔았다. 그게 먹혔다. 김씨는 서두르지 않았다. 한개 점포가 성공하면 한개 점포를 더 내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지금은 오클랜드 전역에 7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3년 전에 보타니 지역에 새 공장도 인수해 풀가동 하고 있다. 그 공장에선 매일 20~30명의 작업자가 온갖 종류의 케이크와 디저트용 빵을 만들어 낸다. ◆“뉴질랜드 최고의 명품 케이크”김씨가 빵 업계에 들어선 지 40년이 흘렀다. 제빵 장인(匠人)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그럼에도 한국식 케이크로 뉴질랜드에서 인기를 끌기는 쉽지 않았을터. 그 비결이 궁금했다. 김씨는 차별화를 첫째로 꼽았다. “남이 다 만드는 케이크는 의미가 없죠. 전에 없던 새로운 맛을 만들었어요. 전통적인 프랑스식 케이크에 기반을 두고 한국적인 맛을 가미했어요. 그러다보니 영국계인 이곳 키위들도 처음에는 생소하게 느끼지만 ‘이 케이크는 먹을수록 당긴다’면서 최고로 인정하더군요.” 김씨가 말한 한국적인 맛은 발효를 통해 독특한 식감을 내는 김치 맛의 원리를 케이크 제조 과정에 접목한 것. “빵의 발효과정에서 100가지 이상의 방향성 물질이 자연스럽게 생성됩니다. 그런데 팽창제를 넣거나 하면 고유의 맛이 사라지죠. 시간이 걸려도 은은한 데서 충분히 발효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한국적인 맛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이 있듯이 내가 좋아하고 느낌이 가는 맛을 남들도 좋아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김보연 케이크는 콘셉트에서도 한국적인 정서를 가미해 차별화를 이뤘다. “한국인은 케이크를 생일이나 잔칫상 가운데에 놓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저그런 케이크가 아닌 행사의 주빈이 되는, 의미있는 케이크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에 맞춰 케이크 디자인도 화려한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품격의 미를 추구한다. 명품 케이크의 또다른 비결은 식재료다. 원가를 아끼지 않고 최상품만 쓴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재료가 받쳐주지 않으면 좋은 맛을 낼 수가 없죠. 저는 20년간 밀가루에서부터 버터, 치즈, 바닐라 향까지 항상 최고의 재료만 썼어요. 그런 고집이 맛은 물론 고객의 신뢰를 쌓는 바탕이 된 것 같아요. 김보연 케이크의 마니아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여러 모로 뉴질랜드 최고의 명품 케이크라고 자부합니다.”게토하우스의 성장세는 지속되겠지만 김씨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장남에게 억지로 사업을 물려줄 생각이 없다. 대신 본인의 은퇴 시점에 전문 경영인에게 사업을 맡길 계획이다. 물론 경영 일선에선 물러나더라도 더 좋은 케이크를 만들기 위한 그 만의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기로 이민 와서 단순히 사업으로 성공한 것보다 사람들에게 행복한 맛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게 큰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사진=이정화작가 seajip00@naver.com※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대양주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김보연·유성자씨 부부가 뉴질랜드 오클랜드시티 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인 유씨는 남편의 사업이 어려울 때마다 억척스럽게 활로를 뚫어 오늘의 김보연 케이크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한국식 맛과 디자인을 접목해 뉴질랜드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김보연 케이크.뉴질랜드 보타니 지역에 있는 ‘게토하우스’ 본점.‘게토하우스’ 빵 공장에서 작업자들이 다양한 종류의 케이크와 디저트를 만들고 있다.
2019.07.25
[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대양주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1] 한국의 빛으로 오클랜드를 밝히는 유광석씨
영남일보는 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로 ‘대양주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을 총 7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역만리 낯선 타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정착하기까지, 주로 대구경북 출신의 이민 1세대들이 겪었던 도전과 시련, 성공담을 소개한다.오클랜드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도시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 순위’에서 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기도 하다. 거주하는 사람은 150만명. 이 나라 인구의 3분의 1 규모다. 뉴질랜드 최대 도시 답게 도심은 북적이는 인파와 빌딩, 조형물이 어우러져 활력이 넘친다. 야경 역시 멋드러진다. 특히 도심을 환하게 비추는 소(SO) 호텔의 LED 전광판은 오클랜드의 새 랜드마크로 꼽힌다. 뉴질랜드 최초로 LED전광판으로 만든 옥외 설치물이란 타이틀도 달았다. 호텔 벽면에 설치된 LED전광판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60m. 여기에 들어간 1만5천개의 LED 전구가 매일 밤마다 화려한 빛의 향연으로 오클랜드 도심을 수놓는다. 이 전광판 공사를 해낸 사람은 경북 시골 출신의 뉴질랜드 이민자, 유광석씨(49·다온 대표)다.◆전교생 호령하던 태권소년유광석씨는 예천의 한 시골마을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정형편이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는 데다, 특히 아버지가 “하고픈 거 다하라”며 적극 밀어줬다. 덕분에 자전거를 타고 읍내 태권도 도장을 다닐 수 있었다. 태권도는 천성적으로 모험심이 강했던 그에게 자신감을 더욱 불어넣었다. 과유불급이었던지, 가끔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초등 5학년 때 학교 가던 동네 친구 30명을 데리고 산에서 한참 놀았던 적이 있었어요. 다음 날 학교에서 난리가 났고 담임 선생님에게 엄청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유씨는 중학생때부터 무조건 대도시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고등학교가 대구에 있는 대중금속고였다. 마침 그 학교 교기가 태권도였기에 2단이었던 유씨는 학창시절에 ‘날개’를 달았다. 고2때 태권도 사범으로 발탁돼 1천명이 넘는 전교생을 호령하면서 훈련시켰다고. 그런 경험을 통해 탄탄하게 다진 자신감은 후일 성공의 큰 자산이 됐음은 물론이다. ◆청년기 보내고 기회의 땅으로 유씨는 고교 졸업(1990)을 앞두고 경기도 안산에 있던 열처리 업체에 실습생으로 파견근무를 했다. 첫 월급은 14만원. 졸업 후에도 그 업체에서 6개월 더 일하다가 월급이 너무 적어 그만뒀다. 이후 무작정 상경하면서 갖은 고생을 했다. 한칸짜리 방에서 친구와 자취를 하면서 굶기를 밥먹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훈제치킨과 족발 등을 만드는 식품업체의 구인 전단을 보게된 것은 행운이었다. 망설일 것 없이 곧바로 취직했다. 그가 맡은 작업은 주로 냉동 상태인 족발의 발톱을 제거하는 것. 돼지 발톱을 하루에 3천개쯤 빼야 했다. “발톱을 빼내려면 엄청 힘들어요. 종일 일하다보니 알통이 많이 생기더군요. 그 일을 1년간 했어요.”고교때 사범 발탁돼 1천명 훈련탄탄히 다진 자신감이 성공자산이민 사업하다 이국생활 도전장고객 찾아다니며 공격적인 영업스크린 전광판 업계 거물로 성장LED 전구는 모두 韓제품 사용해유씨는 군(軍) 제대 후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인쇄업체에 들어갔다. 허드렛일 1년 만에 영업 업무를 맡은 게 계기가 돼 대우전자 사보 제작을 책임지게 됐다. 2년가량 그 일을 하면서 배운 노하우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독립을 결심, ‘코아 그래픽(Core Graphic)’이란 인쇄업체를 차렸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그 해에 결혼도 했다. 이듬해 터진 IMF사태로 다른 인쇄업체들은 줄도산 했지만 그는 되레 많은 돈을 벌었다. 비결은 당시 한국을 탈출하려는 이민 열풍을 사업에 접목했던 것이다. “당시 신문에 이민 알선 광고가 많이 올라오길래 잘되는 줄 알게됐죠. 그래서 이민 알선 회사에 제의해서 인쇄물 제작을 맡았어요.” 대박이었다. 워낙 이민 사업이 잘 되다보니 일감은 넘쳤고 특히 현금으로 대금을 지급받으면서 승승장구했다. 월 수입은 5천만원이 넘었다. 이후 유씨도 자연스레 이민에 관심을 두게 됐고 2000년 관광차 들른 뉴질랜드를 못 잊어 이듬해 이민을 떠났다.◆무작정 시작한 이민생활유씨는 뉴질랜드서 5년 정도만 살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야말로 무작정 이민 간 케이스였다. 아내와 2세, 4세짜리 아이 둘을 데리고 갔지만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 없었다. 그렇다고 현지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서 설레는 가슴을 안고 비행기를 탔지만 오클랜드 공항에 내려보니 막막했어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이미그레이션(immigration)이 뭔지도 몰랐죠. 불현듯 ‘가족을 어떻게 먹여 살리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공항에서 유씨 가족을 마중 나온 한국인들이 있었다. 이민 업무를 대행해주는 브로커, 부동산 업자, 보험사 직원들이었다. 모두들 돈이 목적이었다. 특히 부동산 업자는 유씨 가족을 공항에서 곧바로 큰 저택으로 데려가 집을 보여주면서 “이 집을 사라”고 했다. 유씨는 거절했다. 업자 말대로 그 집을 샀다면 바가지를 썼을 게 뻔했다.가족이 당장 기거할 곳이 없었다. 이에 유씨는 서둘러서 집을 샀다. 하지만 입주까지는 한달 보름을 기다려야 했다. 어쩔수 없이 하루 120달러짜리 모텔 방에서 한 가족이 생활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음식은 일주일 만에 동이나 매일 밥을 해먹었다. 반찬이라곤 참치통조림과 고추장뿐이었다. 낯선 이국땅의 방에 갇혀 끼니만 겨우 해결하는, 답답하고도 지루한 나날이었다. ◆“무조건 한다”는 도전정신모텔 생활을 청산하고 번듯한 집에서 살게되면서 유씨는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한국에서 생각해둔 광고관련 사업이었다. 사무실을 차리고 영업에 나섰다. 하지만 아무런 인맥과 배경 없이 하는 영업이 쉬울 리가 없었다. 묘안을 짜냈다. 택시 기사를 섭외해 택시를 타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명함을 뿌렸다. 당시엔 고객을 찾아가는 영업방식이 처음이어서 효과가 컸다. 주문이 쇄도했다. 하지만 또 문제가 있었다. 기존 거래처가 없다보니 비싼 값에 하도급을 맡겨야 했다. 일감이 많을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그렇지만 유씨는 우직하게 일을 했다. 시간은 유씨 편이었다. 그렇게 현지 업자들의 신뢰를 쌓아 하도급 단가를 낮췄고 사업도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이후부터 유씨는 사업을 공격적으로 펼쳤다. 한인회에 나가 인맥을 넓혀 한인가이드북 제작을 맡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인쇄와 디자인 사업은 돈이 안됐다. 반면 간판제작 업체는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간판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기본 지식도, 경험도 없이 뛰어든 것. “간판 만드는 과정을 눈여겨 지켜봤어요. 그리고 혼자 제작해봤는데 이게 되더라고요. 밤낮으로 공부하고 노력했어요. 물려받은 손재주에다 창의성을 더해 지금은 뉴질랜드 간판업계에서 최고 수준으로 성장했어요.”유씨는 태국에 본사를 둔 ‘마그마’의 뉴질랜드 법인 회사를 운영하게 되면서 전성기를 열었다. 마그마가 삼성의 밴드 회사였기에 더욱 든든한 배경이 됐다. 덕분에 광고 외에도 쇼핑몰 등의 인테리어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유씨는 호텔 프랜차이즈 회사인 아크그룹(ARCH group)과 쌓은 인연과 신뢰에 힘입어 6성급인 소(SO)호텔 벽면의 LED 전광판 공사를 따냈다. 120만달러짜리 대형 프로젝트였다. 이 역시 처음 해보는 일이기에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겪었지만 결국 2년 만에 완벽하게 공사를 끝냈다. 전구는 모두 한국 제품이며, 전구를 받치는 프레임(frame) 역시 유씨가 한국에 가서 직접 제작한 것들이다. 짧게 말해 한국의 찬란한 빛으로 오클랜드의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더 큰 도약을 위해 ‘마그마’와 결별하고 ‘다온’이란 새 회사를 차렸다. 특유의 성실함과 도전정신을 앞세워 뉴질랜드 최대의 LED 스크린 전광판 회사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다.“난 일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안해본 일도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해요. 그리고 실제로 무슨 일이든 죽기살기로 해보니까 다 되더라고요. 한국인의 자부심을 높일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도전해 성공을 거둘 겁니다.” 글·사진=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대양주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유광석씨. 그는 불굴의 도전정신과 자신감, 피나는 노력으로 뉴질랜드 간판업계의 거물로 성장했다.유광석씨가 공사를 책임진 SO호텔 벽면의 LED 전광판이 오클랜드 도심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2019.07.18
[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⑧·(끝) 사진으로 보는 못다한 이야기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민족은 일본의 압제를 피해 만주로, 연해주로, 미국 등지로 흩어졌다. 이 가운데 옛 소련 극동지역 연해주에 살던 동포 17만여 명은 1937년 9월 일본 정보원의 침투를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강제이주됐다. 이름하여 ‘카레이츠(고려인)’다. 열차 이동과 정착 과정에서 배고픔과 질병, 추위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가운데 40여 일간 1만여㎞를 달려 처음 도착한 곳이 지금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역(驛)이다. 고려인 1세들은 이곳에서 약 7㎞ 떨어진 바슈토베(Bastobe)란 작은 언덕 아래에서 겨울을 나며 이듬해 4월까지 살았다. 영하 40℃의 혹한을 견디기 위해 언덕 경사면을 바람막이로 삼아 토굴을 파고 주변의 갈대로 지붕을 엮었다. 고려인들은 우슈토베를 중심으로 집거하면서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터전을 일궜다. 이들은 강제이주의 아픔을 딛고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각 국에서 모범시민으로 거듭났다. 기자는 지난 5월20일~6월9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1·2·3세를 만나 초기 정착 과정과 삶, 정체성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7회에 걸쳐 소개했다. 이번 8회의 주제는 ‘사진으로 보는 못다 한 이야기’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역.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처음 짐짝처럼 내던져진 작은 역이다. 철로에는 칸마다 석탄을 가득 실은 화물열차가 정차해 있다. 81년 전 고려인들도 화물신세나 마찬가지였다.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인회관에서 고려인 어린이들이 한국의 전통무용과 춤을 배우고 있다.‘머리 언덕’이란 뜻을 가진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인근 바슈토베. 자그마한 언덕으로 사방이 평원이다.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 있는 고려인노인회관에서 강 다지아나(95·본명 강옥순) 할머니가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바슈토베의 고려인 공동묘지. 토굴이 있던 자리에는 무덤이 들어섰다.
2018.10.10
[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⑦김 로자 알료나와 인 발렌티나
#1 김 로자 알료나(61)는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슈토베는 1937년 고려인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될 당시 첫 정착지다. 알료나의 아버지는 고려인, 어머니는 러시아인이다. 1남5녀 중 넷째로, 언니 안나와 동생 따냐도 각각 우슈토베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어릴 때 키르기스스탄에 잠시 거주한 걸 빼곤 지금까지 우슈토베를 떠나본 적이 없는 그는 남편 박 페이자, 딸 까쟈·마리나와 함께 우슈토베 원동마을에서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기자는 이 부부의 농가에서 하루를 묵었다. 알료나는 밝고 꾸밈없는 성격에 정감이 넘쳤다.#2 인 발렌티나(73)는 고려인 2세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주 째껠지역 ‘알가’라는 농촌마을에서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카라탈지역 텔만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카라탈에서 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탈디쿠르간에서 중등과정을 마쳤다.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지도부를 거쳐 카자흐스탄 민족회의 단원, 카라탈 여성지원센터장 등을 했다. 그는 카자흐스탄 독립10주년을 맞아 훈장을 받기도 하는 등 고려인 지도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은퇴해 우슈토베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1 김 로자 알료나같은 혼혈 남편만나 가정 꾸려농사·목축 병행하며 생계 이어83년부터 양파농장에서 일해◆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어린 시절“내가 살던 동네(이마나바스크)는 거게 다 고려사람이 살았소. 카자흐 사람, 러시아 사람, 체첸 사람도 있었지만 얼마 없어. 코카서스 사람들이 늘 말을 탔는데, 고려아이들캉 말술기(말수레) 타고 공기놀이도 하고 그랬지. 여름엔 못에 가서 수영도 했는데, 그땐 신발도 옷도 빌로 없었소. 다 물려 입었지. 겨울엔 얼마나 추븐지 말도 말기요.”김 알료나가 구수한 함경도 사투리를 띄엄띄엄 이어갔다.“아바이는 글도 모르고 돈 세는 것도 몰랐소. 여름엔 농사를 짓고 동삼(겨울)에는 돼지 키웠지. 화투치는 걸 좋아했는데, 술 먹고 혼자 우는 모습을 종종 봤소. 어마이는 양파밭에서 지심을 메고, 겨울엔 젖소 우유를 짰소. 노래와 무용을 잘했지.”알료나의 아버지(김창식)는 원동 우수리스크에서 우슈토베로 왔다. 어머니(마리아 니콜라이)는 러시아인으로,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가진 채 고려 사람에게 시집갔다. 그는 텔만학교를 다니다 가족과 함께 키르기스스탄으로 갔다. 오빠가 군대에 가고, 언니가 레닌그라드기술학교에 입학할 즈음 다시 우슈토베로 와 심세트리즈학교를 8학년까지 다녔다. 그는 남자 못지 않는 골격을 지녔다.“내가 어릴 때 러시아말도 고려말도 제대로 못하이 말을 잘 못 알아먹었소. 그래서 남자아이들이 나를 놀리곤 했지. 그래서리 내가 또래들보다 키도 크고 카이 남자아이들이 내한테 많이 맞았단 말이요.”◆같은 처지 혼혈 만나 가정 이루다알료나는 18세 때 지금의 남편(박 페이자)을 만났다. 페이자의 아버지는 고려인, 어머니는 독일인이다. 독일계 러시아인은 러시아 볼가강 인근에 자치구를 이뤄 살다 스탈린정권 때 고려인처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돼 고된 삶을 살았다. 스탈린 사후 독일로 거의 귀국했지만 소수가 남아있다. 페이자의 어머니는 고려인 집에서 막일을 하다 고려인과 결혼했다.“페이자가 15세 때 아바이가 죽고 어마이와 둘이 힘들게 살았소. 내 아바이도 41세 때 돌아갔지. 페이자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를 만났는데, 옷이라곤 군복밖에 없었소. 하루는 페이자 집에서 자고 왔다 우리 어마이한테 실컷 얻어맞았지(웃음). 만난지 3개월 만에 집에서 동네사람 모아놓고 결혼잔치를 했소. 2년 동안 시어마이집에서 살다 나와 살았지.”부부는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겨울엔 목축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이곳저곳에서 고분질농사를 하다 1983년 우슈토베로 와 고려인 신 테라가 운영하는 양파농장에서 일했다.“신 테라는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오. 양파일꾼인데 대단히 유명했소. 30명이 15㏊를 맡았는데 하루 종일 일했지 뭐. 이젠 나이도 늙어 그렇겐 못하지. 요즘엔 그렇게 일 안 해도 풍족하잖소. 옛날엔 물도 과일도 먹을 것도 별로 없었는데….”알료나는 현재 둘째언니(안나), 동생(따냐)과 한 마을에 살며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다. 세 자매가 같이 있으니 외로움도 덜 탄다. ‘고향의 봄’ 같은 한국 가곡과 러시아 민요, 찬송가도 곧잘 부른다. 몇 년 전엔 한국의 한 방송국에서 알료나 집을 방문해 촬영하기도 했다.“난 이렇게 사는 게 좋다오. 테레비에 나오고 한국 사람들이 우리 집에 한번씩 오기도 하지. 언제든지 우슈토베에 오면 우리집에 들르시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2 인 발렌티나톰스크大 졸업…수학교사 재직 73년 공산당 입당 후 간부가 돼카르탈 제1부시장 역임하기도◆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해 공산당 간부로 성공“어릴 때 카자흐마을에서 살았는데 고려인도 많았어요. 밖에선 카자흐말을 해도 집에선 반드시 고려말을 해야 했어요. 러시아어는 배워도 잘 못했죠. 카자흐 아이들과 숨바꼭질도 하고 ‘아스크’(양뼈를 갖고 노는 놀이)도 한 기억이 납니다. 러시아말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건 중학교 때였어요. 아버지가 러시아신문을 들고 거울 앞에서 큰 소리로 읽거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면 러시아어를 잘 할 수 있다고 해 그렇게 했어요.”인 발렌티나는 학구열이 높고 집념이 강해 학업 성적도 뛰어났다. 선친의 영향으로 일찍이 교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엔 청년단 활동도 하는 등 매사에 적극적인 학생이었다.“아버지를 존경해요. 부시장 시절 아버지가 ‘높은 자리는 돈으로 살 수 없고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자리다. 항상 높은 자리에만 있을 수 없으니 퇴직할 때 욕을 먹지 않으려면 정확하고 올바르게 일해야 한다’고 하셨어요.”그는 1961년 시베리아 최초의 대학인 명문 톰스크대에 입학, 사범대 수학과 독일어를 복수전공했다. 운동을 좋아해 대학부설 배구팀원으로 활약했으며 빙상과 무용도 했다. 1965년 졸업 후 톰스크대 부설 초·중·고에서 수학과 독일어 등을 가르치다 카라탈로 돌아와 고리끼중학교에서 배구코치와 수학교사를 했다. 그의 인생이 바뀐 건 공산당 청년당 입당 후부터였다. 73년 공산당에 입당하고 75년 알마티고등공산당 간부학교를 나와 실력을 발휘해 5년간 르탈 공산당 비서가 됐다 소련 해체 직후 카르탈 제1부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사람도 고려사람 아닙니까그는 일에 파묻혀 결혼이 늦어져 34세가 돼서야 짝을 만났다.“남편(장 미론)은 모스크바 광산기술대를 졸업하고 부모가 있는 우슈토베에 잠시 왔을 때 만났어요. 미론의 이모가 내 친구인데 소개시켜줬지요. 후에 미론이 키르기스스탄 광산에서 기술자로 근무할 때 국제전화가 와 깜짝 놀랐어요. 미론은 남동생 친구이기도 한데 배구를 잘했죠. 동생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아버지가 허락했어요. 러시아 속담에 ‘아내가 똑똑하면 남편이 똑똑하게 되고, 아내가 똑똑하지 못하면 남편이 똑똑해도 머저리가 된다’는 말이 있어요.(웃음)”그는 남편과의 사이에 딸 둘을 낳았다. 둘 다 카자흐스탄인과 결혼해 잘살고 있단다.인 발렌티나는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해 잘살 수 있게 된 요인이 고려인의 높은 교육열 덕분”이라면서 “한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고려인 속담에 ‘마지막 바지를 팔아도 아이를 공부시켜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옛 소련 시절 많은 민족 중 대학을 나온 비율이 가장 높은 게 유대인이었고 다음이 고려인이죠. 다들 열심히 일하고 똑똑했는데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뒤 생활이 어려워졌어요. 카자흐말을 안 썼는데 다시 써야 하니 힘들죠. 요즘엔 카자흐스탄에서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변변치 못해 20~40대 고려인 40% 정도가 다시 원동이나 모스크바 또는 한국으로 갔어요. 그에 따르면 탈디쿠르간만 해도 대략 1만2천명의 고려인이 살았는데 이젠 5천명 정도밖에 없다고 했다.“어쨌든 한국이 땅은 조그만해도 잘사니 좋지요. 다 같은 고려사람 아닙니까. 딸이 러시아에서 잘사는데, 거기 와서 살아라 해도 그럴 생각은 없어요. 우슈토베 원동마을이 내 고향이니까요.”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김 로자 알료나(가운데)가 언니 안나(왼쪽), 동생 따냐와 함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원동마을에서 포즈를 취하며 활짝 웃고 있다.카자흐스탄 고려인으로 카르탈지역 제1부시장을 역임했던 인 발렌티나가 인터뷰 도중 존경했던 선친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 있다.
2018.10.01
[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⑥ 강 게오르기 바실리에비치와 리 스따니슬라브 찬지노비치
강 게오르기 바실리에비치(62)는 고려인 3세로 역사학자다. 카자흐스탄 국립 아바이사범대 교수로 40년간 재직하면서 카자흐스탄과 고려인 역사연구에 천착해 왔다. 현재 카자흐스탄민족회의 위원, 카자흐스탄 과학원 사회학 및 인문학 감정위원을 역임하고 있으며 옛 소련 역사교과서 속 카자흐스탄과 고려인 역사 부분을 집필했다.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역사학계의 거장이며 북한, 중국, 미국 등지에 그의 논문이 번역돼 있다.◆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할아버지(강병일)가 할머니(조춘옥)와 함께 1913년 한반도에서 원동(연해주)으로 이주했어요. 전 진주강씨예요. 친척들이 북한, 중국, 미국 등지에 살고 있지요. 아버지는 원동에서 1924년 8월20일 11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중 5명이 죽고 6명이 살아남았죠.”강 게오르기 바실리에비치는 민족의 역사를 알기에 앞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아는 게 먼저라고 했다. ■ 강 게오르기 바실리에비치아바이사범대 교수로 40년 재직카자흐·고려인 역사연구에 매진명저 ‘위대한 초원의 역사’ 펴내 “아버지가 13세 때 강제이주돼 카자흐스탄 타라스에 실려왔어요. 가족은 움막집에 살며 ‘콜호스’에서 일했습니다. 러시아말을 할 줄 몰랐다고 해요. 하루는 아버지의 육촌 동생 강 일리세이가 검은까마귀(KGB)에 의해 체포돼 끌려가 재판에 넘겨져 10년을 선고받았대요. 그때 저희 집에 귀한 책이 많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가족에게도 위험이 닥칠 수 있다고 염려해 다 태워버렸다고 하더군요.”그의 아버지가 콜호스에서 일하던 중 2차대전이 일어났다. 선친은 이민족이라 참전하지 못하고 대신 러시아 툴라 부근 소끼노 광산에서 독일군 포로병과 함께 노역했다. 그 사이 할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광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러시아인으로 군수공장에서 일하다 바르나우치 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농촌에서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콜호스에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넷을 뒀다. 게오르기는 4형제 중 둘째다. “5세 때 고려인 집단농장 꿈자따 콜호스로 이사와 3년간 살았어요. 이후 아버지는 다시 탄광으로 가서 일하고 어머니는 교사생활을 하다 고분질농사를 했답니다. 할머니가 대가족을 건사하면서 감자 생산 증식 영웅으로 훈장까지 받았어요. 어릴때 할머니 훈장을 차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가 ‘빨리 먹어라’ ‘밥이 왔다’ ‘집으로 가오’ ‘마이 먹었덤두’ ‘맛이 있소’ ‘술이 없소’ 같은 말을 하던 게 기억이 나네요. 그땐 돌잔치, 환갑잔치도 있었어요.”◆역사학자의 길을 가다게오르기는 호기심 많은 아이였으며 학교에선 우등생이었다.“집에 두툼한 책들이 많았는데, 책을 다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어요. 어머니는 항상 푸시킨의 시를 외워라고 했죠. 지금도 외울 수 있어요(웃음). 아버지는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난 수학이나 생물보다 역사가 좋았어요. 결국 카자흐스탄 국립 아바이사범대 역사학과에 들어갔죠. 줄곧 1등을 했어요. 3학년 땐 레닌장학금도 받았습니다. 78년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뒤 바로 교수가 됐어요.”그는 소련 해체 후 기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1994년 처음으로 고려인 역사서를 출간했다. 또 96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카자흐스탄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사용할 역사교과서를 집필했다. 이밖에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초원의 역사’를 쓰기 위해 인도, 몽골, 알타이 등지를 다니면서 많은 자료를 찾았다. 이후 명저 ‘위대한 초원의 역사’가 출간됐다.“91년까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에 대한 역사 연구가 없었지요. 그런데 옛 소련 아카이브에 고려인 강제이주와 관련된 기밀문서가 많아요. 카자흐스탄과 한반도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각각 대륙과 해양문명의 접점에 위치해 있으며 언어도 알타이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요. 단군과 투르크의 선조 아쉬나는 공통점이 있어요. 복식이나 문양, 샤머니즘도 유사한데, 구체적인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그는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관심이 많다.“소련 붕괴 후 강제이주 된 독일인, 체첸인, 칼미크인 등 50만명이 각기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고려인은 이곳에 정착했지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은 남북 왕래가 가능하죠. 하지만 ‘부모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어 울고 있는 아이’와 같아요. 카자흐스탄에는 120개 민족이 평등하게 살고 있습니다. 처음엔 한국인과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국사람과 교류가 많아졌어요. 남북이 하루속히 통일돼 함께 번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진주강씨 족보도 함께 만들 수 있지 않나요(웃음).”리 스따니슬라브 찬지노비치(58)는 중앙아시아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을 대표하는 고려인 시인이다. 카자흐스탄 북부 아크몰라(현재 수도 아스타나)의 고려인 집단촌인 모뽀르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1981년 알마티공대를 졸업했다. 95년 첫 시집 ‘이랑’을 낸 뒤 ‘재 속에는 간혹 별들이 노란색을 띤다’(1997), ‘한줌의 빛’(2003) 등을 출간했다. 그의 시는 2008년 ‘러시아 현대 해외 20인 시화집’에 게재돼 있다. 러시아 거주 시인이 아닌 다른 민족의 시인으로 유일하며 카자흐스탄 국정교과서에도 소개돼 있다. 그는 한국의 한시집 등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카자흐스탄에 알리기도 했다. 2010년 그가 쓴 ‘모뽀르마을에 대한 추억’을 한국의 김병학 시인이 한국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이 시집 속 시가 러시아 최고 문학잡지 ‘베레가’에 게재되기도 했다.◆시인이 되기까지“5세 때 할머니와 화투놀이를 한 기억이 있지요. 밥, 북장(함경도식 된장), 김치를 먹었어요. 6세 땐 처음 러시아음식을 맛봤어요. 외삼촌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핵무기 기술자로 일하면서 시골에서 못 보던 소시지, 캐비어, 오렌지, 사과 같은 걸 보내왔죠. 모뽀르에는 고려인이 500~600명 살았어요.”■ 리 스따니슬라브 찬지노비치시집‘한줌의 빛’고려인 삶 담아한시 등 30년간 러시아어로 번역韓문학 카자흐에 알리는데 노력 어릴때 그의 집에는 고전문학 서적이 많았다.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빅토르 위고 등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고 초등학교에선 고려말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효녀 심청, 혹부리영감, 흥부놀부 같은 전래동화도 읽어줬다. 6세 때 텔만학교에 입학한 그는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암기력이 좋았다. 청소년시기에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물리, 화학,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 상도 타 한때 수학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또 유도에 몰입해 유도대회 우승경험도 맛봤다. “모스크바대학을 갈까 노보로시스크대학을 갈까 고민했어요. 당시 어머니는 농업기술자였고, 이모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어요. 두 분 뜻을 따라 알마티공대 농기계관련 학과에 갔죠. 졸업 후 군대에 가 유도교관을 하다 제대하고 8년간 가축사료 개발연구소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던 중 소련이 붕괴되면서 일자리를 잃어버렸지요.”◆시는 나의 운명그는 대학시절 박일 교수(김일성대 부총장을 지낸 전 카자흐스탄국립대 철학교수로 ‘조선시집’을 펴냄)를 만나면서 한민족사와 시에 눈을 떴다. “어릴 때 고려말을 해도 의사소통만 했지 느낌과 깊이가 없었어요. 교통사고 후 기억상실증으로 사고 이후의 것들만 기억하는 사람처럼 슬픈 운명을 가진 게 고려인이에요. 박 교수와의 만남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이즈음 그는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 ‘이랑’은 그 산물이다.“10세 때부터 러시아어로 시를 끄적거렸어요. 시를 쓰면 마음이 편하고 안 쓰면 고통스러웠죠. 지금도 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첫 시집의 시를 레몬즙을 짜내듯 썼어요. 55편의 시를 담았지만 미학적이지도, 로맨틱하지도 않았어요. 당시만 해도 카자흐스탄에선 방 3개 딸린 아파트가 4천500달러 정도 됐는데, 그 돈으로 시집을 냈지요.”그는 서점에 가면 중국이나 일본의 시는 러시아어로 많이 번역돼 있는데 한국 문학은 찾아 볼 수 없어 자신이 번역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졌다고 했다.“한국의 고대 한시를 비롯해 유명한 시를 30년간 러시아어로 번역해 소개했지요. 시를 쓰거나 제대로 번역하려면 그 나라의 역사와 철학, 사상을 알아야 하죠. 시조나 판소리가 특히 그렇죠. 시집 ‘한줌의 빛’엔 고려인의 삶과 이야기를 많이 담았습니다. 난 돈 때문에 시를 쓰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에게 시를 쓰라고 부탁해 쓰고 있습니다.(웃음)”찬지노비치는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 일 한 적도 있다.“예전엔 한국이 그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한국은 물론 세계와 연결돼 있어 덜 그립죠. ‘안동역에서’라는 트로트를 즐겨 부릅니다.”얼마전까지 건강악화로 고생을 했던 그는 요즘들어 ‘왜 고려인이 이처럼 멀리 중앙아시아로 왔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고 했다.“옛날 선조들이 그러했듯 거기엔 신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슬픔과 한의 역사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 보지 않아요. 저에게 한민족은 뿌리이며 러시아는 줄기예요. 제가 태어난 카자흐스탄은 꽃잎이라 할 수 있는데, 카자흐스탄을 사랑합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카자흐스탄 국립 아바이사범대에 40년간 재직하면서 카자흐스탄과 고려인 역사 연구에 천착해 온 강 게오르기 바실리에비치 교수(고려인 3세)가 민족의 동질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리 스따니슬라브 찬지노비치는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고려인 시인이다. 그가 한국에서의 삶을 떠올리며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18.09.11
[대구 ·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고려인 (5부) ⑤림 예브게니아와 허가이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
◆키르기스스탄 국립의대 부교수 ‘림 예브게니아’ #림 예브게니아(45)는 고려인 3세 의사다. 키르기스스탄 국립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같은 대학에서 산부인과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림 예브게니아는 좋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모범생으로 자라 의사가 됐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의사는 존경받는 직업 가운데 하나다.“좋은 부모님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아버지(림 표도르)는 프룬제(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의 옛 이름) 국립농업기계 부공장장을 했지요. 어릴 때 당신께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했죠. 1938년생인데 카자흐스탄 발하시에서 태어나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시(옛 고리키시)에서 공부를 하고 엔지니어가 됐죠. 집안의 기둥이면서 고려인사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다정다감하고 바위같이 듬직한 분이셨죠.”림 예브게니아에게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면서 인생의 멘토이기도 했다. “위로 언니 2명(빅토리아, 타지아나)이 있어요. 어렸을 때 빵심부름을 했는데, 집으로 갖고 오다가 배가 고파 빵을 조금씩 떼먹다보니 절반밖에 남지 않았어요. 부모님께 심하게 혼났죠. 그때 아버지가 ‘나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도와야 한다’고 하신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세 자매가 잠을 자기 전에 꼭 책을 읽어줬어요.”그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둘째 고모 부부가 의사였고, 특히 고모부는 고아를 따뜻하게 보살펴 옛 소련정부로부터 상도 받아 그 영향도 있었다.“어릴 때 두 언니보다 공부를 못했어요. 거의 5점 만점을 받았는데 난 3점이 수두룩했어요. 그래도 아버지께선 야단치지 않았어요. 다만 언니들의 통지표만 보여줬죠. 그때 ‘저 때문에 우리 가족이 창피를 당해선 안 되겠구나’ 싶어 열심히 공부해 러시아어만 빼고 다 5점을 받았어요. 우리 학교에 무슬림도 있었고 유대인도 있었는데 고려인은 다른 민족보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어요. 실제 고려인은 공부를 잘 하는 편이었지요.”그는 초·중·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89년 키르기스스탄 국립의과대학에 입학, 95년에 졸업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부모님과 할머니세대는 힘든 시기였죠. 아픈 사람도 많았을 거고… 가족 중에 의사가 있다면 가족 건강이라도 챙길 수 있었겠죠. 전 의사라는 직업을 사랑해요. 선진국에 비해 의료시설이 낙후되고 의료수준도 낮지만 의사는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직업입니다. 옛 소련시대 키르기스스탄은 다른 CIS국가보다 의료수준이 높았어요.”그의 인생이 평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혼의 아픔과 아버지와의 사별이란 시련도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고려인 남성과 결혼했는데, 이듬해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일찍 결혼하는 걸 반대했었죠. 남편과 아이를 하나 낳고 살다 8년 만에 이혼을 했지요. 지금의 남편은 키르기스스탄인인데 같은 의사예요. 2004년 재혼해 9세된 딸이 하나 있어요.”림 예브게니아는 키르기스스탄이 한국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을 공경하는 문화가 있다고 했다. “키르기스스탄사람은 고려인과 정서가 비슷한 것 같아요. 일찍 부모님께서 조선을 갔다 와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사는 형편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아직 대한민국엔 못 가봤어요. 남편이 한국에 가고 싶어해요. 의료기술이 발달됐다고 들었어요. 제주도도 아름답다고 하던데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림 예브게니아 키르기스스탄 의과대학 졸업후 같은 大 산부인과 부교수로 근무“선진국 비해 의료수준 낮지만 의사라는 직업에 자부심 느껴” ◆허가이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 농업용기계 수리공장서 일하다 1년간 준비 후 의과대학에 입학“의료혜택 못받는 사람 종종 있어 韓 의료팀 매년 봉사활동 큰 힘”◆카자흐스탄의 시골의사 ‘허가이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1937년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될 당시 최초로 정작했던 작은 도시다. 허가이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65)는 고려인 3세로 우슈토베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군복무와 의과대학시절을 빼고 우슈토베를 떠나 살아 본 적이 없는 그는 우슈토베에서 고향을 지키며 40년간 의사 생활을 하고 있다.“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총살 당했다고 들었어요. 할머니와 아버지(허가이 니콜라이)가 그곳에서 우슈토베로 왔지요. 아버지는 운전을 했고 어머니는 가게에서 판매원으로 일했죠. 어릴적 우슈토베엔 차가 매우 드물었어요. 있어봤자 러시아에서 제조한 쉐보레 정도였어요. 가게와 식당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어요. 이곳엔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죠. 지금은 다른 도시로 많이 떠나갔지만, 아직까지 옛 고려인들의 풍습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지요.”허가이 알렉산더가 차분한 목소리로 우슈토베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난 날들을 회상했다. 자그마한 키에 아담한 모습의 그는 천생 맘씨 좋은 동네 의사를 연상케 했다.“학교 다닐 때 제가 생각해도 모범생이었어요. 말썽을 피우거나 사고를 친 적이 없어요. 특별히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끼리 모여 밤새 세계여성의 날 파티를 한 게 기억이 나네요. 15세였는데 파란 눈을 가진 러시아 소녀를 짝사랑했어요.(웃음) 체육을 잘 하고 예뻤던 그 여성은 러시아에서 기자를 했죠.”그는 우슈토베에 있는 푸시킨(초등과정)학교를 나와 263번학교(중·고과정)를 다니다 261번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261번학교의 고려인 학생비율은 약 30%였으나 민족간 다툼은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우슈토베에 있는 한 농업용기계 수리공장에서 일했다. “1년도 못 다니다 바로 군대에 갔죠. 카자흐스탄 바이카노드 우주센터에서 2년간 복무했어요. 제대 후 다시 농업용기계 수리공장에서 운전일을 하다 의사가 되고 싶어 1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75년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의과대학에 입학했어요. 대학에 들어가기 전 권투에 빠진 적도 있어요.”그가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사촌형이 의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형이 ‘피가 무서우면 의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며 영안실에도 데려가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몸이 아파 힘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 어떻게 하면 아픔을 덜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의사가 제 적성에 맞다고 생각해요.”허가이 알렉산더는 대학시절 기숙사생활을 했다. 소아과를 선택했는데, 여름방학 때 목장일을 하고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 고려인 아가씨와 연애를 해 29세 때 결혼했다. 하지만 아들 둘을 낳고 살다 20년 만에 이혼했다. 장남과 차남은 각각 알마티대학과 페테르부르크대학을 나와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81년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귀향했다. 그의 직장은 국가가 운영하는 일종의 보건소로 우슈토베에서 유일하다. 그는 3년 전 보건소에서 퇴직한 뒤 연금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계속해 일을 연장하고 있다.“이곳에서 의사를 하다보면 의료혜택을 제대로 못 받아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한번은 임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의 몸무게가 800g밖에 안 됐어요. 모두 살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퇴원한 산모의 집에 가서 아이를 돌봤죠. 그 아이는 지금 장성해 러시아에서 판사를 하고 있어요.”그의 부모는 아직 우슈토베에 살고 있다. “여기보다 더 큰 도시로 갈 수 있었지만 전 여기가 좋아요. 우슈토베에서 환자를 돌보는 게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후회없는 삶이죠. 지금은 매일 아침 텃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는 게 낙이에요. 한국의 한 의료팀이 매년 이곳에 와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는데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림 예브게니아는 고려인 3세로 키르기스스탄 국립의과대 산부인과 부교수다. 그가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고려인의 최초 정착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40년간 의사생활을 하고 있는 허가이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가 고향 우슈토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18.08.20
[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④ 도가이 안드레이 게나디에비치
도가이 안드레이 게나디에비치(44)는 음악프로듀서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아코디언, 피아노, 기타 등을 연주하며 젊은 시절 그룹사운드를 결성해 뮤지션으로 활동했다. 작곡과 음반기획을 병행하다 ‘지데시’라는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보컬리스트를 발굴, 터키에서 열린 터키비전(터키에서 열리는 음악대회)에서 우승해 터키와 키르기스스탄은 물론 중앙아시아에 이름을 떨쳤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아침 해가 뜨는 나라~ 산 좋고 물 맑아. 금강산이 솟았으니~ 금강산천을 떠나서~”지난 5월 도가이 안드레이 게나디에비치가 한국어로 외할머니에게서 배운 노래를 낮게 웅얼거렸다. “대여섯 살 때 빠바(아버지)가 군대에서 아코디언을 가지고 왔어요. 빠바는 연주를 잘하지 못했는데, 아코디언을 늘 천장 위에 올려놓았어요. 난 늘 그걸 연주하고 싶었죠. 외할머니가 아코디언을 바닥에 놓고 바람을 넣어주면 제가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건반을 두드렸죠. 나중에 외할머니가 노래를 부르고 내가 연주할 정도까지 실력이 됐어요.”도가이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인근 쿨룩이란 고려인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도가이 게나디(69), 어머니는 초이 엘레냐(66)로 둘 다 우즈베키스탄에 고분질(오랫동안 타지로 떠나 농사짓고 수확해 돌아옴)을 하는 국가기관에서 일했다. 그는 13세때까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중앙亞서 성공한 음악프로듀서젊은시절 그룹 만들어 활동하다터키비전 우승하면서 유명해져“한국 가본적 없지만 고향 느낌K-pop에도 아주 관심 많아아내와 한국어 노래 하고 싶어”도가이는 어릴 때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굴하고 지원해 준 외할머니 덕분에 뮤지션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외할머니는 시장에서 당근 샐러드와 짐치(김치)를 팔아 피아노를 사 줄 정도로 외손자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당시 빠바의 월급이 120루블이었는데, 피아노가 750루블 정도였어요. 피아노가 트럭에 실려 집에 도착했을 때 피아노를 내리기도 전에 트럭에 올라가 피아노를 연주한 기억이 나요(웃음).”그는 ‘슈콜라(11년제 초·중·고 정규학교)’ 외에도 방과후 따로 음악학교에 들어가 7년간 다녔다. 고학년 땐 교내 오케스트라 정규단원이었다.“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보다 재즈 같은 창작 연주에 더 흥미를 느꼈어요. 자유주제로 연주하는 콩쿠르에 나가면 항상 1·2등을 하곤 했죠. 슈콜라 시절엔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클래식이나 소련 음악밖에 몰랐는데, 나중에 미국이나 유럽 대중음악을 듣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어요.”◆뮤지션이 되기 위한 힘든 여정슈콜라를 마친 1991년, 소련 붕괴가 시작됐다. CIS국가 중 하나였던 우즈베키스탄 역시 정정이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사회는 부패했다.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뇌물을 줘야 확실하게 의대에 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포기했죠. 대신 병원에 취업해 수술실에도 들어가 일했어요. 돈은 별로 못 벌었지만 꿈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죠. 계속 있었다면 의사가 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곧 그만뒀어요. 당시엔 개인사업이 유행이었거든요. 친구랑 4명이 한국식당을 운영해 돈을 좀 벌었죠. 그런데 그즈음 레스토랑에서 공연을 하는 한 그룹을 보고 나도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결국 식당을 접고 악기를 구입해 그 그룹의 멤버가 됐습니다.”그는 우즈베키스탄 내 이탈리아, 프랑스, 한국 레스토랑 등지에서 2년간 공연활동을 하며 하루 평균 150~200곡을 연주했다. 그러다 94년 친구 1명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건너갔다. 고분질을 하며 현지에서 한국식당을 개업해 재즈 연주를 하고자 했던 것. 하지만 의지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반디뜨’라는 조직폭력배가 방해를 했어요. 우리끼린 ‘지붕’이라고 하는데, 뒤를 봐주는 폭력조직 같은 것이죠. 결국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와 음악을 계속했죠. 96년부터는 음악 외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도가이는 2인조 그룹 ‘산타운’을 조직해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직접 곡을 만들고 음반도 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98년 7월 그는 다시 타슈켄트를 떠나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로 가 8년간 활동했다. 그동안 2인조를 3인조로 바꾸는 등 성공을 위해 몸부림쳤으나 2007년 결국 산타운은 해체됐다. 그러는 사이 나이는 30대 중반에 들어섰다.◆솔로프로젝트로 성공“돈과 시간에 쪼달리다 보니 가정생활이 제대로 안 됐어요. 어떻게든 명성도 얻고 돈도 벌어보자는 마음을 먹고 ‘아르텍’이란 라이브 밴드를 조직했죠. 보컬 1명에 연주자가 4명이었는데, 5년 정도 활동했어요. 처음엔 저도 함께 연주를 하면서 음향·편곡 등을 책임졌죠.”아르텍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점점 클라이언트를 만날 기회가 자주 생기자 그는 연주 대신 매니저를 도맡아 하게 됐다.“쇼프로젝트를 하면서 성공하게 됐어요. 다들 제 덕분에 자동차도 사고 아파트도 구입하고…, 2008년엔 아르텍미디어그룹을 만들어 쇼에만 집중했습니다. 아르텍은 정말 인기가 많았어요. 러시아 모스크바와 연해주,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여러 곳으로 초청 연주를 다녔지요. 러시아고려인협회의 초청으로 설 행사를 맡은 적도 있어요. 제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죠.”그는 2014년 아르텍을 해체하고 키르기스스탄의 여성보컬리스트 ‘지데쉬’의 솔로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음악프로듀서로 본격 데뷔한 것이다.“처음으로 음악프로듀서를 하며 유로비전·터키비전 같은 국제적인 콩쿠르를 노렸죠. 특히 2015년 터키에서 열린 터키비전에선 결승까지 올라가 우승을 했지요.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후 프로듀싱센터와 스튜디오를 열고 보컬·댄스아카데미도 개소했어요.”터키비전에서 우승하자 여성보컬인 지데쉬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와 지데쉬는 터키는 물론 키르기스스탄인이 살고 있는 프랑스, 체코, 독일 등 유럽으로 초청돼 공연을 펼쳤다. “지데쉬는 키르기스의 스타 가수입니다. 어디를 가도 그녀를 알아봐요. TV에도 많이 나오고 가요대회 심사위원으로 여러 번 출연했죠. 2016년 영국에서 열린 유로비전의 심사위원이 되기도 했어요. 그런 그녀가 지금은 저의 아내가 됐죠. 2016년에 결혼했는데 아내는 저보다 11살이 적어요.”그가 마흔이 돼 성공을 하자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던 부모님과 여동생도 키르기스스탄으로 거처를 옮겼다.“저에겐 사실 전처(前妻)가 있어요. 각각 18세, 17세 때 동네 어른들이 소개해 줘 결혼했지요. 콜호스에서 농사를 짓던 고려 여성입니다. 둘 사이에 24살 아들과 20세 된 딸이 있어요. 지데쉬 역시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이 한 명 있어요. 지데쉬와 저 사이엔 돌을 넘긴 아들이 하나 있는데 같이 살아요. 전처와 이혼은 했지만 같은 아파트에 살아요. 사이가 좋아 음식 같은 걸 나눠 먹기도 하죠.”◆고국 한국과 조국 키르기스스탄그는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남쪽 톈산이 잘 보이는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해 돌아온 키르기스스탄 여성으로부터 한국 요리를 배워 직접 집에서 김치찌개, 된장찌개도 끓일 줄 안다. 그에게 음악이란 어떤 의미일까.“음악은 저의 모든 것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음악에만 빠질 순 없어요. 모든 사람이 100% 만족해하는 음악을 할 순 없어요. 음악의 대중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염두에 둘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늘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요. 여기선 민족 음악이 더 인기가 많기는 한데, 전 현대적인 것을 좋아해요. 케이팝(K-pop)에도 관심이 많습니다.”도가이는 지금까지 한국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 그에게 한국은 미지의 땅이다.“6살 적은 제 여동생이 한국 국적을 취득해 제주도에 살고 있어요. 이모가 곧 환갑인데, 한국에 사는 이종사촌들이 한국에서 환갑을 준비하고 있대요. 저도 내년에 갈 것 같아요. 제 조상이 맛보았을 한국의 공기도 느껴보고 어떤 곳인지도 알고 싶어요. 전 한국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늘 한국은 고향과 같은 느낌이에요. 전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고려인이었고, 여기서도 고려인이에요. 하지만 오늘날 키르기스는 나의 조국이고 나의 집이죠. 지금의 아내가 한국 요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앞으로 아내랑 한국어로 음악을 하고 싶어요.”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성공한 고려인 음악프로듀서 도가이 안드레이 게나디에비치와 그의 아내이자 키르기스스탄의 유명 솔로가수 지데쉬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8.08.03
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로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③유가이 빅토르
유가이 빅토르(56)는 중앙아시아에서 만난 고려인 중 우리말을 가장 유창하게 했다. 그의 삶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전쟁·사랑·우애·애국 등 영화적 소재들이 풍부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타슈켄트 항공기조립학교 졸업 80년 소련군 입대 훈련 받은 뒤 1년6개월간 아프가니스탄戰 투입 부대원 절반 전사하고 구사일생 99년 자녀의 미래 위해 영국 이민 자동차기술 컬리지 졸업 후 랜드로버공장서 16년간 몸담아“통일되면 평양∼서울 다시 도전 그땐 고려인 車마니아 다 모을 것” ◆독립운동 가문 출신“할아버지(유주익)는 빨치산부대에서 독립운동을 했어요. 1900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나 17세 때 연해주로 갔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 씨름선수로 활약했대요. 5형제를 낳았는데 아버지(유 알렉세이)는 둘째예요. 7세 때 가족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인근 ‘주마’라는 곳에 정착을 했죠. 갈대밭이 있는 허허벌판이었는데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인근에 치르치크강이 흘러 잉어가 많았다고 해요.”유가이 빅토르에 따르면 1937년 강제이주 당시 고려인들은 우슈토베~크줄오르다~쿠스타나이~콕체타프~타슈켄트~사마르칸트 등지로 분산됐다고 했다. 빅토르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인근 카르마르크 콜호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4형제 중 둘째다. 형(로베르토)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기기술자로 일하다 삼성에 입사, 통관업무를 담당했다. 1974년 그의 아버지가 투르크메니스탄 북부 파샤우스주(州)에 위치한 고려인 콜호스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6년간 근무하는 바람에 그곳으로 갔다. 1979년에 60번 중학교를 거쳐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항공기 조립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동생(콘스탄틴)은 투르크메니스탄 국립아시카바르대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동생은 러시아어, 한국어, 독일어, 터키어, 영어, 투르크메니스탄어 등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때 카자흐스탄을 방문할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고려말을 잊지 말라그의 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 국립타슈켄트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역사·지리·체육교사를 지내다 교장으로 퇴직했다. 할아버지와 달리 키가 작고 농사를 좋아했다. 어머니(조 리디아) 또한 교사였다.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사범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수학·물리를 가르쳤다. 그의 부모는 항상 “고려말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해 집에선 늘 고려말을 썼다. “유명한 김병화 농장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이죠. 10세 때 김병화 선생 장례식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카르마르크에는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죠.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 후손들이 카르마르크에서 살고 있고, 모스크바엔 김 장군의 손녀가 있어요. 터키족, 둔간족, 타타르족도 함께 살았는데 고려인이 많다 보니 다들 고려말을 썼어요. 터키어, 우즈베크어, 타타르어, 러시아어는 카르마르크에서만은 소수민족 언어였죠. 한번은 고려인들이 동네버스 안에서 말고기를 먹는 타타르족을 놀렸는데, 운전기사가 타타르족 여성이었나봐요. 고려말을 할 줄 아는 그 여성 운전기사가 뿔이 나 ‘개고기는 여기에서 내리고, 말고기는 더 가세요’라고 했대요(웃음).”◆전쟁터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다빅토르는 1980년 소련군에 입대해 아제르바이잔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1년6개월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투입됐다. “어느날 밤 중대장이 군장을 꾸리라고 하더군요. 야간열차를 탄 채 몇 날 며칠째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죠. 타지키스탄에서 우연히 동생을 만났는데, 동생은 내가 전쟁터로 가는지 알았나봐요.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더군요.”그는 전쟁터에서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에 내려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총알이 빗발쳤어요. ‘전쟁터에 왔구나’라는 걸 그때 알았죠. 난 기관총사수였어요. 한 번은 총알이 베레모를 뚫고 지나간 적도 있었죠. 매일 부대원이 한두 명 죽어나갔는데, 200호 화물열차가 시신을 수송했어요. 고지탈환작전을 하다 2시간 동안 포격을 받기도 했죠. 몸의 절반이 노출된 상태로 콘크리트파이프에 은폐해 있었는데 등에 파편을 맞아 핏물이 군화로 흘러들어가는 걸 느꼈어요. 구사일생으로 생존했죠. 부대원 절반 가까이가 전사했습니다. 나중에 훈장도 받았어요.(쓴웃음)”그는 1982년 제대를 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얼굴은 검게 타고 몸은 바짝 말랐는데 눈물의 상봉을 했습니다. 잠시 학교에서 노동과 군사훈련, 음악을 가르쳤는데 그때 첫 결혼을 했어요. 1986년에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와 무궤도전차를 몰다 1991년부터 차량 임대사업을 했습니다.”◆카자흐스탄에서 차로 평양·서울까지 그는 1989년 고(故) 고송무 교수와의 만남을 계기로 민족의식을 싹틔운다. 고 교수는 핀란드 헬싱키대학에서 우랄어를 전공한 언어학자였다. 카자흐스탄과학아카데미 연구교수로 와 우연히 빅토르를 알게 됐다. 그는 중앙아시아 고려인 연구분야의 선구자였다. “고 교수랑 정말 친했어요. 1993년 교통사고로 46세 때 돌아가셨는데, 고려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해 준 분이었지요. 1992년 한국과 카자흐스탄 수교를 기념해 고 교수가 자동차로 중앙아시아·시베리아·중국을 거쳐 북한 평양·서울로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했어요.”그는 고 교수의 뜻을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자신의 전 재산을 털다시피 해 자동차 8대를 구입했다. KGB요원 3명을 포함해 총 57명이 17대의 차로 알마티~캅차가이~띠어리쿠르간~알타이공화국~노보시비르스크~이르쿠츠크~울란우테~하바롭스크를 경유해 2주간을 달려 두만강 조·중 국경에 도착했다. 여정에 동행했던 김미라와 애정이 싹터 결혼에까지 이른다.“정말 힘들었어요. 원래 북한 입국이 8월15일 광복절이었는데, 하루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입국이 거절됐어요. 황망하고 허탈했죠. 결국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야만 했어요. 일부는 차를 버리고 비행기로 다시 왔습니다. 나중에 한국의 한 TV방송국이 시베리아횡단 자동차팀을 방영했어요. 그걸 본 이삼수(가명)란 사람이 팀원 전체를 2차에 걸쳐 초청해 열흘간 한국여행을 시켜준 적도 있지요.”◆영국으로 이민자동차로 대륙을 달려본 경험 때문이었을까. 빅토르는 카자흐스탄이란 울타리가 좁다고 생각됐다. 게다가 고려인에 대한 차별감 같은 걸 느낀 적도 여러번 있었다.“아들이 10세 때였어요. 경찰이 아들의 주머니를 뒤지며 소지품을 검사하는 걸 멀리서 보게 됐는데 ‘아이의 미래를 위해 이 나라를 떠나자’는 생각을 굳히게 됐습니다.”그는 1999년 아내와 함께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자동차기술 컬리지에 입학했다. 졸업 후엔 버밍엄 근교에 있는 랜드로버공장에 입사, 조립라인 팀장으로 근무하며 16년간 일했다. 하지만 영국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건강이 악화됐어요. 지팡이가 있어야 걸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카자흐스탄에만 오면 몸이 회복되는 거예요. 결국 카자흐스탄으로 와 살고 있습니다. 아내는 음악을 전공해 영국에서 음악교사로 있어요. 방학 때 제가 영국으로 가거나 아내가 오기도 합니다.”그는 세 아내로부터 아들 넷을 얻었다. 장남 막심은 웨일즈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카자흐스탄 내 한국계 회사에서 일하다 독립해 알마티에서 전선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둘째 게니지는 경기도 안산에서, 셋째 안드레이는 영국 명문 케임브리지대에서 IT를 전공하고 현재 모스크바에 있는 IT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막내 알렉세이는 영국 사우샘프턴대 제약학과를 나와 프랑스의 한 제약회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처음엔 ‘한국으로 갈까’라는 생각도 했는데 영국으로 갔죠. 밥, 된장, 김치는 어릴 때부터 먹은 거라 지금도 늘 먹어요. 개고기는 지금도 잘 먹습니다.(웃음)”그는 재작년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고려인 젊은이들이 자동차로 런던에서 로마를 거쳐 모스크바·카자흐스탄으로 와 그가 갔던 코스로 서울까지 가고 싶다고 해 자문을 한 적도 있다.“남북이 통일돼 자유왕래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 자동차로 평양·서울도 맘대로 갈 수 있잖아요. 돈을 더 벌어 다시 유럽 리스본에서 아시아대륙을 지나 평양·서울까지 갈 거예요. 그땐 전 세계에 있는 고려인 자동차마니아를 다 모을 겁니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준비하겠습니다. 고송무 교수의 꿈이기도 하고 저의 희망이기도 하지요.”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공동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50대 중반을 넘긴 유가이 빅토르(왼쪽)는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마지막 소원은 자동차로 유럽대륙에서 출발, 아시아대륙을 거쳐 평양·서울까지 가는 것이다. 그가 동생 유가이 콘스탄틴과 함께 주먹을 쥔 채 파이팅을 하고 있다.
2018.07.26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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