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호주·뉴질랜드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6부> .4] 조선족 악기 사업가 이동호씨/멜번저널 편집장 김은경씨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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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8   |  발행일 2019-08-08 제12면   |  수정 2022-06-09 11:31
호주 한인사회서 약자 핸디캡 딛고…사업가·언론인의 삶 ‘활짝’

호주 한인사회를 취재하면서 ‘구포’와 ‘신포’라는 생소한 용어를 알게 됐다. ‘구포’란 주로 1970~80년대 베트남, 독일, 중동 등지에서 계약노동자로 일하다가 호주로 건너가 정착한 사람들을 뜻한다. ‘신포’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투자이민을 간 사람들이다. ‘구포’ 중 상당수는 호주사회에 뿌리내리기까지 적지 않은 고생을 해야 했다. 반면, 부유층인 ‘신포’는 처음부터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구포’의 눈에 ‘신포’가 고와 보일 리가 없었다. 양측 간에 심각한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구포’쪽에 가깝긴 하지만 특이한 사연을 지닌 소수의 이민자들도 있다. 그중에는 사회적 약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빛나는 성공을 거둔 경우도 있다. 호주 멜버른에서 찾아보기 힘든 조선족 출신 악기 사업가 이동호씨와 미혼모의 아픈 과거를 딛고 한인사회 언론계를 선도하는 김은경씨(스텔라 김·멜번저널 편집장)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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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씨가 본인이 운영하는 호주 멜버른 시내 악기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악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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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이동호씨.

멜버른서 보기힘든 조선족 출신
이 악물고 돈벌어 악기점 대성공
지역 상공인연합회 부회장 ‘우뚝’


◆음악 공부, 악기 연주에 바친 청춘

이동호씨는 1958년 중국 랴오닝성(요령성) 개원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부친 고향은 영일군(현 포항시) 기계면이다. 일제 강점기 농촌에는 굶기를 밥먹듯하는 집들이 수두룩했다. 이씨 조부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그리고 일제가 싫어서 식솔을 데리고 중국으로 떠났던 것. 조부가 정착한 개원은 경상도 출신이 많았는데, 거기서도 대부분 찢어지게 가난했다. 더구나 이씨 집은 대가족이었으니 입에 풀칠하기가 버거웠다.

그럼에도 이씨 남매들은 머리가 뛰어났다. 수재급이었다. “누나, 형 다섯명이 한 해에 대학에 합격한 적이 있었죠. 그 때 신문에도 크게 나고 그랬지. 나 빼놓고 모두 나중에 박사 되고 대학 교수를 했어요. 우리 남매 중 장사한 건 나밖에 없어요. 그래도 돈은 제일 잘 벌어요. 허허.”

이씨의 어린시절이 힘들었던 건 배고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소학교 1학년 때 문화대혁명(1966~1976)이 일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반혁명분자로 몰려 곤욕을 치렀고 가정도 파탄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연좌제는 그리 가혹하지 않았는지 그와 남매들은 학교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이씨에게 불행만 준 것은 아니다. 음악과 악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줬다. 어린시절부터 그는 각종 마을행사나 학교에서 피리 따위를 불었고 풍금도 쳤다. 악기 연주가 적성에 맞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본격적으로 연주와 악기 공부에 매진했다. 안다뤄본 악기가 없을 정도였다. 이후 그는 2년제인 랴오닝성 조선족 사범학원을 거쳐 베이징 중앙민족대를 다녔다. 음악으로 청춘을 보내며 악기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탄탄한 바탕은 갖춘 셈이다.

◆당당히 내세운 “세계 최대 악기점”

이씨가 호주에 살게 된 것은 당시 멜버른대 장학생이던 형 때문이었다. 형은 “멜버른이 살기 좋다”며 동생을 불렀지만, 유학생이던 형과 그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형으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조선족이었기에 한인사회에도 편입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일해야 했다. “맥주 캔 용기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어요. 돈을 더 준대서 야간 근무를 했어요. 자정부터 오전 8시까지 노예처럼 밤일을 10년간 했어요.”

그는 악착같이 모은 2만달러를 가지고 조그마한 악기점을 차렸다. 밤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낮에는 가게 영업을 하는 더욱 힘든 삶을 버텼다. 마침내 공장 일을 접고 야심차게 악기점에 매달렸으나 장사가 잘 안됐다. 그런데 파리만 날리던 악기 사업에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일본서 수입해온 중고 피아노가 불티나게 팔렸던 것. 도쿄대 박사인 동생의 도움으로 대박을 친 것이다. 이후로 그의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웠다. 한때 시드니, 멜버른에서 악기점 4개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통합해 멜버른 시내에 대형 악기점 한 곳만 운영한다. 악기에 문외한인 기자가 “멜버른에서 가장 큰 악기점 맞느냐”고 묻자 이씨는 손사래를 쳤다. “멜버른이 아니라 세계 최대라고 보면 되요. 당연히 최고의 명품 악기도 다 갖추고 있어요. 나만큼 악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는 충분히 자랑할 만했다. 멜버른에는 조선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씨도 지난 30년간 멜버른에서 조선족을 딱 한명 봤다고 했다. 과거에는 현지 한인사회에서 외면받았지만 성공한 사업가로 우뚝 섰다. 지금은 멜버른 상공인연합회 부회장도 맡고 있다. 호주에서 꽃피운 그의 악기인생이 어디까지 만개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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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번저널 편집장 김은경씨가 자택 1층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한인 매체’ 운영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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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씨가 창간한 멜번저널.

미혼모 상황서 가족과 이민생활
언론·출판계 일하며 주간지 창간
한인들 소식 공유 매체 자리매김


◆재능 많은 문학소녀, 한편엔 그늘

김은경씨(62)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어서 아주 어릴때부터 타지로 이사를 많이 다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구와 인연이 깊다. 아버지가 제대 후 민간인 신분으로 베트남에 돈 벌러 가자 남은 가족은 아버지 고향인 대구로 왔다. 김씨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삼덕초등을 1년 다닌 후 경혜여중, 경북여고를 졸업했다. 같이 살던 외할머니는 외손녀 교육에 극성이었다. 국어 숙제를 잘못하면 한밤중에도 깨워 다시 시켰다. 글짓기, 그림그리기 등 대회란 대회는 다 내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머니는 많이 앞섰던 분이셨어요. 그땐 불만이 있었지만 외할머니께서 일깨워준 재능이 제 인생에 큰 도움이 됐어요.”

김씨의 문학적 재능은 중·고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각종 글짓기대회에서 장원을 휩쓸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고교 때까지 방송반 활동도 병행했다. 다재다능한 문학소녀였던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가정환경이 나빠져 맘고생을 했다. 중학교 3학년때부터 베트남에 있던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뚝 끊겼다. 돈도 안 보냈다. 여자문제였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다가 고교 졸업을 앞둔 어느날, 4년 만에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호주로 이민가서 초청장을 보낼 테니 가족이 함께 오라’는 내용이었다.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 기술자들이 베트남전이 끝나자 귀국하지 않고 대거 호주로 이민을 가던 시기였다. 김씨 가족은 대구 생활을 접고 서울에서 이민준비를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사정이 생겨 3년 만에 이민을 갈 수 있었다. 1979년, 김씨의 나이 21세 때였다. 당시 김씨는 임신한 상태였다. 혼인신고는 않고 함께 살던 약혼자와 가진 아이였다. 아버지의 반대로 김씨는 약혼자를 남겨두고 가족과 함께 한국을 떠났고 끝내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다.

◆멜번저널, 한인사회 소통 역할

김씨 가족은 시드니에서 1년쯤 살다가 멜버른으로 이사했다. 이후 김씨는 시드니와 멜버른을 오가면서 여러 직업을 가졌다. 지인의 소개로 호주 국영방송국에서 한국어 방송을 진행했다. 2주에 30분 분량이었다. 또 가게 점원, 잡지와 신문기자도 했다. 가장 오래다닌 직장은 사진현상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필름 색상을 조절하는 컬러 애널리스트로 10년간 근무했다. 본업을 하면서 20대 후반의 또래들을 모아 교포를 위한 잡지를 펴냈다. 수필과 호주 역사 등의 내용을 담았다. 당시엔 타자기도 없어서 손으로 쓴 것을 복사해 묶은 간행물을 집집마다 배달했다. 그러다가 한인회보 제작을 맡았다. 역시 손으로 쓰고 복사하는 방식이었다.

그즈음 호주에서 한국인 이민자가 가장 많은 시드니에서 교포신문(대한신보)이 생겼다. 김씨는 그 신문사가 창간 기념으로 개최한 이민수기 공모에서 대상을 받았다. 교포사회에서 글 잘쓰는 사람으로 알려진 계기가 됐다. 그는 1997년에 ‘호주와 이웃하기’란 책을 펴냈는데, 영남일보가 선정한 우수 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씨는 2000년에 주간지인 멜번저널을 창간했다. 멜버른 최초의 한인매체로 19년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광고 수입으로 운영하는 무료지다. 창간 10주년 전후가 최전성기였다. 150페이지 분량으로 6천~7천부를 발행했다. 인터넷이 보급될때도 별 문제는 없었지만,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영향을 받았다. 젊은층 광고를 SNS에 잠식당했지만, 지금은 다시 회복세를 타고 있다. 현재는 3천부 정도를 찍어 2003년 결혼 후 발행인을 맡은 남편과 함께 한인업소를 중심으로 배부한다.

“멜번저널은 단순한 광고지가 아니에요. 멜버른 한인사회의 소식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나름 전통있는 매체죠. 그래서 1면 표지에 광고를 싣지 않는 원칙을 어긴 적이 없어요. 멜번저널은 저뿐만 아니라 교민의 애환이 녹아있기에 팔거나 폐간할 생각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교민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더욱 알찬 매체로 만들고 싶어요.”

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사진=이정화작가 seajip00@naver.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호주·뉴질랜드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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