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삶을 씻던 자리, 앞산의 빨래터
더위의 기척을 잠시 잊게 해주는 여름비가 도시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산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순환도로 위로 차량이 오가지만, 그 아래엔 전혀 다른 시간이 고요히 머문다. 돌담 안쪽, 앞산 숲 깊숙이 자리한 오래된 빨래터. 한때 여인들의 손길이 분주히 오가던, 삶의 결이 깃든 터전이었다. 삶의 얼룩을 씻고 마음의 무게를 덜던 이곳에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정화와 회복의 의식이 펼쳐졌다. 비누조차 귀하던 시절, 재를 물에 풀어 만든 잿물에 옷을 담그고 두 손으로 비비며, 돌에 올려 서답 방망이로 두드리던 풍경. 등에 아이를 업고, 또는 보자기를 이고 산길을 올라 무릎 꿇은 채 빨래하던 손끝엔 정성과 사랑, 인내와 공동체의 온기가 배어 있었다. 시댁살이의 서러움, 찬거리 걱정, 자식 이야기, 소소한 웃음까지. 물소리 사이로 흘러나온 이야기들은 마을 물길을 따라 조용히 퍼져가며 속마음을 나누던 마을의 쉼터였다. 이제는 방망이 소리도, 빨래하는 이도 사라졌지만, 한때 이 골짜기엔 대구의 삶과 숨결이 깃들었고, 사람들 사이의 정이 고요히 쌓여 있었다. 인간을 '항상 아직 되지 않은 존재'라 했던가.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씻고, 다듬고, 다시 살아간다. 삶은 때로 마음을 굳히고 관계를 단단히 묶지만, 조용한 공간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하나에 굳은 것들도 천천히 풀려난다. 앞산 순환도로 위에 서면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삶은 빠르게 흘러가지만, 그 아래 고요히 잠든 빨래터는 여전히 느림과 정성이라는 삶의 결을 지키고 있다. 정을 담아 흘러가던 시간, 그 자리에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손끝으로 삶을 헹구며 도시의 토대를 다져온 세대의 흔적이 지금도 조용히 남아 있다. 빨래터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인간다운 시간이 머문다. 속도가 아닌, 결이 깃든 삶.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어쩌면 그 시절 빨래터에 스며 있던 마음과 정성인지 모른다. 스스로를 잃은 듯한 날들 속에서도, 누군가의 손길이 머물던 그 자리처럼, 삶의 결을 다시 다듬고 회복의 숨결이 머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제, 앞산 자락에 고요히 자리한 이 빨래터는 해넘이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잊힌 기억을 품은 문화 유산으로 되살아나 일상의 속도를 내려놓고 자연과 추억을 함께 걷는 명품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삶을 헹구던 자리에서 우리는 오늘의 속도를 잠시 내려놓고 어제의 마음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신경용
2025.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