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고려인 (5부) ⑤림 예브게니아와 허가이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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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0   |  발행일 2018-08-20 제6면   |  수정 2022-05-18 17:16
“제주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아픈사람 돌보는 게 천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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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 예브게니아는 고려인 3세로 키르기스스탄 국립의과대 산부인과 부교수다. 그가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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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최초 정착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40년간 의사생활을 하고 있는 허가이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가 고향 우슈토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국립의대 부교수 ‘림 예브게니아’

#림 예브게니아(45)는 고려인 3세 의사다. 키르기스스탄 국립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같은 대학에서 산부인과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림 예브게니아는 좋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모범생으로 자라 의사가 됐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의사는 존경받는 직업 가운데 하나다.

“좋은 부모님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아버지(림 표도르)는 프룬제(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의 옛 이름) 국립농업기계 부공장장을 했지요. 어릴 때 당신께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했죠. 1938년생인데 카자흐스탄 발하시에서 태어나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시(옛 고리키시)에서 공부를 하고 엔지니어가 됐죠. 집안의 기둥이면서 고려인사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다정다감하고 바위같이 듬직한 분이셨죠.”

림 예브게니아에게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면서 인생의 멘토이기도 했다.

“위로 언니 2명(빅토리아, 타지아나)이 있어요. 어렸을 때 빵심부름을 했는데, 집으로 갖고 오다가 배가 고파 빵을 조금씩 떼먹다보니 절반밖에 남지 않았어요. 부모님께 심하게 혼났죠. 그때 아버지가 ‘나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도와야 한다’고 하신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세 자매가 잠을 자기 전에 꼭 책을 읽어줬어요.”

그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둘째 고모 부부가 의사였고, 특히 고모부는 고아를 따뜻하게 보살펴 옛 소련정부로부터 상도 받아 그 영향도 있었다.

“어릴 때 두 언니보다 공부를 못했어요. 거의 5점 만점을 받았는데 난 3점이 수두룩했어요. 그래도 아버지께선 야단치지 않았어요. 다만 언니들의 통지표만 보여줬죠. 그때 ‘저 때문에 우리 가족이 창피를 당해선 안 되겠구나’ 싶어 열심히 공부해 러시아어만 빼고 다 5점을 받았어요. 우리 학교에 무슬림도 있었고 유대인도 있었는데 고려인은 다른 민족보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어요. 실제 고려인은 공부를 잘 하는 편이었지요.”

그는 초·중·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89년 키르기스스탄 국립의과대학에 입학, 95년에 졸업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부모님과 할머니세대는 힘든 시기였죠. 아픈 사람도 많았을 거고… 가족 중에 의사가 있다면 가족 건강이라도 챙길 수 있었겠죠. 전 의사라는 직업을 사랑해요. 선진국에 비해 의료시설이 낙후되고 의료수준도 낮지만 의사는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직업입니다. 옛 소련시대 키르기스스탄은 다른 CIS국가보다 의료수준이 높았어요.”

그의 인생이 평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혼의 아픔과 아버지와의 사별이란 시련도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고려인 남성과 결혼했는데, 이듬해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일찍 결혼하는 걸 반대했었죠. 남편과 아이를 하나 낳고 살다 8년 만에 이혼을 했지요. 지금의 남편은 키르기스스탄인인데 같은 의사예요. 2004년 재혼해 9세된 딸이 하나 있어요.”

림 예브게니아는 키르기스스탄이 한국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을 공경하는 문화가 있다고 했다.

“키르기스스탄사람은 고려인과 정서가 비슷한 것 같아요. 일찍 부모님께서 조선을 갔다 와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사는 형편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아직 대한민국엔 못 가봤어요. 남편이 한국에 가고 싶어해요. 의료기술이 발달됐다고 들었어요. 제주도도 아름답다고 하던데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림 예브게니아
키르기스스탄 의과대학 졸업후
같은 大 산부인과 부교수로 근무
“선진국 비해 의료수준 낮지만
의사라는 직업에 자부심 느껴”

◆허가이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
농업용기계 수리공장서 일하다
1년간 준비 후 의과대학에 입학
“의료혜택 못받는 사람 종종 있어
韓 의료팀 매년 봉사활동 큰 힘”


◆카자흐스탄의 시골의사 ‘허가이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1937년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될 당시 최초로 정작했던 작은 도시다. 허가이 알렉산더 니콜라이비치(65)는 고려인 3세로 우슈토베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군복무와 의과대학시절을 빼고 우슈토베를 떠나 살아 본 적이 없는 그는 우슈토베에서 고향을 지키며 40년간 의사 생활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총살 당했다고 들었어요. 할머니와 아버지(허가이 니콜라이)가 그곳에서 우슈토베로 왔지요. 아버지는 운전을 했고 어머니는 가게에서 판매원으로 일했죠. 어릴적 우슈토베엔 차가 매우 드물었어요. 있어봤자 러시아에서 제조한 쉐보레 정도였어요. 가게와 식당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어요. 이곳엔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죠. 지금은 다른 도시로 많이 떠나갔지만, 아직까지 옛 고려인들의 풍습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허가이 알렉산더가 차분한 목소리로 우슈토베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난 날들을 회상했다. 자그마한 키에 아담한 모습의 그는 천생 맘씨 좋은 동네 의사를 연상케 했다.

“학교 다닐 때 제가 생각해도 모범생이었어요. 말썽을 피우거나 사고를 친 적이 없어요. 특별히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끼리 모여 밤새 세계여성의 날 파티를 한 게 기억이 나네요. 15세였는데 파란 눈을 가진 러시아 소녀를 짝사랑했어요.(웃음) 체육을 잘 하고 예뻤던 그 여성은 러시아에서 기자를 했죠.”

그는 우슈토베에 있는 푸시킨(초등과정)학교를 나와 263번학교(중·고과정)를 다니다 261번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261번학교의 고려인 학생비율은 약 30%였으나 민족간 다툼은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우슈토베에 있는 한 농업용기계 수리공장에서 일했다.

“1년도 못 다니다 바로 군대에 갔죠. 카자흐스탄 바이카노드 우주센터에서 2년간 복무했어요. 제대 후 다시 농업용기계 수리공장에서 운전일을 하다 의사가 되고 싶어 1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75년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의과대학에 입학했어요. 대학에 들어가기 전 권투에 빠진 적도 있어요.”

그가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사촌형이 의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형이 ‘피가 무서우면 의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며 영안실에도 데려가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몸이 아파 힘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 어떻게 하면 아픔을 덜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의사가 제 적성에 맞다고 생각해요.”

허가이 알렉산더는 대학시절 기숙사생활을 했다. 소아과를 선택했는데, 여름방학 때 목장일을 하고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 고려인 아가씨와 연애를 해 29세 때 결혼했다. 하지만 아들 둘을 낳고 살다 20년 만에 이혼했다. 장남과 차남은 각각 알마티대학과 페테르부르크대학을 나와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81년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다시 귀향했다. 그의 직장은 국가가 운영하는 일종의 보건소로 우슈토베에서 유일하다. 그는 3년 전 보건소에서 퇴직한 뒤 연금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계속해 일을 연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의사를 하다보면 의료혜택을 제대로 못 받아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한번은 임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의 몸무게가 800g밖에 안 됐어요. 모두 살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퇴원한 산모의 집에 가서 아이를 돌봤죠. 그 아이는 지금 장성해 러시아에서 판사를 하고 있어요.”

그의 부모는 아직 우슈토베에 살고 있다. “여기보다 더 큰 도시로 갈 수 있었지만 전 여기가 좋아요. 우슈토베에서 환자를 돌보는 게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후회없는 삶이죠. 지금은 매일 아침 텃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는 게 낙이에요. 한국의 한 의료팀이 매년 이곳에 와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는데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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