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호주·뉴질랜드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6부> .7 <끝>] 25년간 식당업 ‘미다스의 손’ 송진상씨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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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05   |  발행일 2019-09-05 제12면   |  수정 2022-06-09 11:32
전직 토목교사, 싸고 맛있고 푸짐한 식당으로 호주서 성공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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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상씨가 호주 브리즈번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식당 성공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투자이민이 아니라면 호주 이민자의 초기 정착은 결코 쉽지가 않다. 특별한 기술이 없고 영어도 잘 못한다면 안정된 직업을 구하기가 어렵다. 별다른 준비 없이 건너간 한인 1세대 이민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청소, 세차, 타일, 배관 등 노동을 하거나 자영업에 종사하는 교포가 많은 까닭이다. 물론 그중에는 남다른 노력과 수완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도 있다. 호주에서 25년간 8개의 식당을 차렸던 송진상씨 부부도 그렇다. 송씨 부부는 식당업만으로 꽤 많은 부를 쌓았고, 은퇴한 지금은 브리즈번의 대저택에서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식당에서 황금을 캐낸 미다스의 손이었던 셈이다.

안동서 교편…전교조 간부 활동
재단에 찍혀 사표 내고 이민결행
할 일 못 구해 1년간 돈만 까먹다
조그만 식당 차린 게 성공기 서막
음식 가성비 뛰어나 손님들 줄 서
대박가게 웃돈 받고 되팔기 반복
무작정 이민에도 꽤 많은 富 쌓아
브리즈번 대저택서 안락한 노후

◆전교조 활동으로 고난…이민 결행

송진상씨는 1949년 안동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송씨와 형제들은 유독 탁구를 잘 쳤다. 그를 비롯해 형들과 동생이 모두 학교 대표 선수였다. 송씨는 안동중을 다닐 때 전국체전까지 출전했다. 하지만 탁구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담임 교사의 권유로 탁구채를 놓고 연필을 쥐었다. 공부에만 매달린 덕에 청구대 병설 공업전문학교에 합격했다. 전공은 토목이었다.

이후부터 직업을 자주 바꾸긴 했지만 순탄한 길을 걸었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화성건설(화성산업)에 입사해 1년 근무하다가 입대했다. 제대 후 영남대 3학년에 편입하면서 대구시청 5급 토목직 공채에 합격해 1년 반을 근무했다. 그즈음 결혼을 했다. 이어 공무원보다 월급이 많았던 농업진흥공사(농어촌공사)로 직장을 다시 옮겨 1년을 일하다가 안동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스카우트됐다.

교사 생활은 보람찼고 만족스러웠다. 나아가 같은 학교재단에서 설립한 전문대학에 초빙돼 교수가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교조 지회장을 맡으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재단에 찍히는 바람에 교수 임용은커녕 맡고 있던 토목과장 자리도 내놔야 했어요. 동료 여러명도 해직된 터라 새롭게 살길을 모색해야 했어요.” 그즈음 마침 큰딸도 친구네 집처럼 이민을 가자고 졸라댔다. 결국 14년간의 교사생활을 접었다. 사표 낸 지 한 달 만에 호주 이민을 결행했다. 1990년이었다.

◆“식당만 해서 잘 살고 있으니 행복”

송씨는 토목 관련 자격증도 몇 개 따놓은 게 있으니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1년짜리 임시비자를 받아 가족을 데리고 호주 골드코스트로 갔다. 착각의 대가는 혹독했다. 할 일을 못 구해 1년을 강제로 놀았다. 가져 간 돈은 거의 다 까먹었다. 뭐라도 해야 했기에 브리즈번으로 이사를 갔다. 그 곳에서 1만달러를 주고 조그만한 식당을 인수했다. 식당은 그가 다니던 성당 신자들의 도움으로 꽤 잘됐다. 송씨 부부의 식당 성공기 서막은 그렇게 열렸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단체관광객이 많은 골드코스트에 대형 한식당(신라회관)을 차렸다. 관광 성수기엔 하루 손님이 300명에 달할 정도로 성업했다. 그 식당을 수년간 운영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덕분에 영주권 문제도 해결했다. 송씨는 같은 식당을 오래하지는 않았다. 신라회관도 동생에게 넘겨주고 3~4년간 면세점과 선물가게를 열기도 했지만 큰 재미는 못봤다. 이에 2000년부터 14년간 골드코스트와 브리즈번에서 한식당과 일식당(스시)을 여러 차례 운영했다. 3년 정도 장사를 잘해서 초기 투자금 대비 5~6배의 프리미엄을 받고 가게를 팔고, 몇달 쉬었다가 가게를 새로 오픈해 다시 높은 가격에 파는 식이었다.

식당이 매번 성공한 이유는 짐작대로였다. “우리가 차렸던 식당은 음식이 싸고, 맛있고, 푸짐하기로 유명했죠. 늘 손님이 줄을 섰어요. 그래도 한 곳에선 힘들고 지겨워서 오래는 못하겠더군요. 장사가 잘될 때 다 털고 해외여행을 하면서 재충전을 했죠. 우리처럼 식당만 해서 잘 살 수 있으니 호주는 좋은 나라죠. 우리 애들의 반대만 아니라면 지금도 식당을 또 하고 싶어요.”

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사진=이정화 작가 seajip00@naver.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호주·뉴질랜드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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