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⑦김 로자 알료나와 인 발렌티나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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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01   |  발행일 2018-10-01 제6면   |  수정 2022-05-18 17:15
‘1937년 강제이주 당시 첫 정착지’ 우슈토베의 고려인 2세
83년부터 양파농장에서 일해
톰스크大 졸업…수학교사 재직
73년 공산당 입당 후 간부가 돼
카르탈 제1부시장 역임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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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로자 알료나(가운데)가 언니 안나(왼쪽), 동생 따냐와 함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원동마을에서 포즈를 취하며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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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고려인으로 카르탈지역 제1부시장을 역임했던 인 발렌티나가 인터뷰 도중 존경했던 선친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 있다.


#1 김 로자 알료나(61)는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슈토베는 1937년 고려인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될 당시 첫 정착지다. 알료나의 아버지는 고려인, 어머니는 러시아인이다. 1남5녀 중 넷째로, 언니 안나와 동생 따냐도 각각 우슈토베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어릴 때 키르기스스탄에 잠시 거주한 걸 빼곤 지금까지 우슈토베를 떠나본 적이 없는 그는 남편 박 페이자, 딸 까쟈·마리나와 함께 우슈토베 원동마을에서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기자는 이 부부의 농가에서 하루를 묵었다. 알료나는 밝고 꾸밈없는 성격에 정감이 넘쳤다.

#2 인 발렌티나(73)는 고려인 2세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주 째껠지역 ‘알가’라는 농촌마을에서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카라탈지역 텔만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카라탈에서 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탈디쿠르간에서 중등과정을 마쳤다.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지도부를 거쳐 카자흐스탄 민족회의 단원, 카라탈 여성지원센터장 등을 했다. 그는 카자흐스탄 독립10주년을 맞아 훈장을 받기도 하는 등 고려인 지도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은퇴해 우슈토베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1 김 로자 알료나

같은 혼혈 남편만나 가정 꾸려
농사·목축 병행하며 생계 이어
83년부터 양파농장에서 일해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이마나바스크)는 거게 다 고려사람이 살았소. 카자흐 사람, 러시아 사람, 체첸 사람도 있었지만 얼마 없어. 코카서스 사람들이 늘 말을 탔는데, 고려아이들캉 말술기(말수레) 타고 공기놀이도 하고 그랬지. 여름엔 못에 가서 수영도 했는데, 그땐 신발도 옷도 빌로 없었소. 다 물려 입었지. 겨울엔 얼마나 추븐지 말도 말기요.”

김 알료나가 구수한 함경도 사투리를 띄엄띄엄 이어갔다.

“아바이는 글도 모르고 돈 세는 것도 몰랐소. 여름엔 농사를 짓고 동삼(겨울)에는 돼지 키웠지. 화투치는 걸 좋아했는데, 술 먹고 혼자 우는 모습을 종종 봤소. 어마이는 양파밭에서 지심을 메고, 겨울엔 젖소 우유를 짰소. 노래와 무용을 잘했지.”

알료나의 아버지(김창식)는 원동 우수리스크에서 우슈토베로 왔다. 어머니(마리아 니콜라이)는 러시아인으로,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가진 채 고려 사람에게 시집갔다. 그는 텔만학교를 다니다 가족과 함께 키르기스스탄으로 갔다. 오빠가 군대에 가고, 언니가 레닌그라드기술학교에 입학할 즈음 다시 우슈토베로 와 심세트리즈학교를 8학년까지 다녔다. 그는 남자 못지 않는 골격을 지녔다.

“내가 어릴 때 러시아말도 고려말도 제대로 못하이 말을 잘 못 알아먹었소. 그래서 남자아이들이 나를 놀리곤 했지. 그래서리 내가 또래들보다 키도 크고 카이 남자아이들이 내한테 많이 맞았단 말이요.”

◆같은 처지 혼혈 만나 가정 이루다

알료나는 18세 때 지금의 남편(박 페이자)을 만났다. 페이자의 아버지는 고려인, 어머니는 독일인이다. 독일계 러시아인은 러시아 볼가강 인근에 자치구를 이뤄 살다 스탈린정권 때 고려인처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돼 고된 삶을 살았다. 스탈린 사후 독일로 거의 귀국했지만 소수가 남아있다. 페이자의 어머니는 고려인 집에서 막일을 하다 고려인과 결혼했다.

“페이자가 15세 때 아바이가 죽고 어마이와 둘이 힘들게 살았소. 내 아바이도 41세 때 돌아갔지. 페이자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를 만났는데, 옷이라곤 군복밖에 없었소. 하루는 페이자 집에서 자고 왔다 우리 어마이한테 실컷 얻어맞았지(웃음). 만난지 3개월 만에 집에서 동네사람 모아놓고 결혼잔치를 했소. 2년 동안 시어마이집에서 살다 나와 살았지.”

부부는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겨울엔 목축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이곳저곳에서 고분질농사를 하다 1983년 우슈토베로 와 고려인 신 테라가 운영하는 양파농장에서 일했다.

“신 테라는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오. 양파일꾼인데 대단히 유명했소. 30명이 15㏊를 맡았는데 하루 종일 일했지 뭐. 이젠 나이도 늙어 그렇겐 못하지. 요즘엔 그렇게 일 안 해도 풍족하잖소. 옛날엔 물도 과일도 먹을 것도 별로 없었는데….”

알료나는 현재 둘째언니(안나), 동생(따냐)과 한 마을에 살며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다. 세 자매가 같이 있으니 외로움도 덜 탄다. ‘고향의 봄’ 같은 한국 가곡과 러시아 민요, 찬송가도 곧잘 부른다. 몇 년 전엔 한국의 한 방송국에서 알료나 집을 방문해 촬영하기도 했다.

“난 이렇게 사는 게 좋다오. 테레비에 나오고 한국 사람들이 우리 집에 한번씩 오기도 하지. 언제든지 우슈토베에 오면 우리집에 들르시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2 인 발렌티나

톰스크大 졸업…수학교사 재직
73년 공산당 입당 후 간부가 돼
카르탈 제1부시장 역임하기도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해 공산당 간부로 성공

“어릴 때 카자흐마을에서 살았는데 고려인도 많았어요. 밖에선 카자흐말을 해도 집에선 반드시 고려말을 해야 했어요. 러시아어는 배워도 잘 못했죠. 카자흐 아이들과 숨바꼭질도 하고 ‘아스크’(양뼈를 갖고 노는 놀이)도 한 기억이 납니다. 러시아말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건 중학교 때였어요. 아버지가 러시아신문을 들고 거울 앞에서 큰 소리로 읽거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면 러시아어를 잘 할 수 있다고 해 그렇게 했어요.”

인 발렌티나는 학구열이 높고 집념이 강해 학업 성적도 뛰어났다. 선친의 영향으로 일찍이 교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엔 청년단 활동도 하는 등 매사에 적극적인 학생이었다.

“아버지를 존경해요. 부시장 시절 아버지가 ‘높은 자리는 돈으로 살 수 없고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자리다. 항상 높은 자리에만 있을 수 없으니 퇴직할 때 욕을 먹지 않으려면 정확하고 올바르게 일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는 1961년 시베리아 최초의 대학인 명문 톰스크대에 입학, 사범대 수학과 독일어를 복수전공했다. 운동을 좋아해 대학부설 배구팀원으로 활약했으며 빙상과 무용도 했다. 1965년 졸업 후 톰스크대 부설 초·중·고에서 수학과 독일어 등을 가르치다 카라탈로 돌아와 고리끼중학교에서 배구코치와 수학교사를 했다. 그의 인생이 바뀐 건 공산당 청년당 입당 후부터였다. 73년 공산당에 입당하고 75년 알마티고등공산당 간부학교를 나와 실력을 발휘해 5년간 르탈 공산당 비서가 됐다 소련 해체 직후 카르탈 제1부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사람도 고려사람 아닙니까

그는 일에 파묻혀 결혼이 늦어져 34세가 돼서야 짝을 만났다.

“남편(장 미론)은 모스크바 광산기술대를 졸업하고 부모가 있는 우슈토베에 잠시 왔을 때 만났어요. 미론의 이모가 내 친구인데 소개시켜줬지요. 후에 미론이 키르기스스탄 광산에서 기술자로 근무할 때 국제전화가 와 깜짝 놀랐어요. 미론은 남동생 친구이기도 한데 배구를 잘했죠. 동생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아버지가 허락했어요. 러시아 속담에 ‘아내가 똑똑하면 남편이 똑똑하게 되고, 아내가 똑똑하지 못하면 남편이 똑똑해도 머저리가 된다’는 말이 있어요.(웃음)”

그는 남편과의 사이에 딸 둘을 낳았다. 둘 다 카자흐스탄인과 결혼해 잘살고 있단다.

인 발렌티나는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해 잘살 수 있게 된 요인이 고려인의 높은 교육열 덕분”이라면서 “한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고려인 속담에 ‘마지막 바지를 팔아도 아이를 공부시켜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옛 소련 시절 많은 민족 중 대학을 나온 비율이 가장 높은 게 유대인이었고 다음이 고려인이죠. 다들 열심히 일하고 똑똑했는데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뒤 생활이 어려워졌어요. 카자흐말을 안 썼는데 다시 써야 하니 힘들죠. 요즘엔 카자흐스탄에서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변변치 못해 20~40대 고려인 40% 정도가 다시 원동이나 모스크바 또는 한국으로 갔어요.

그에 따르면 탈디쿠르간만 해도 대략 1만2천명의 고려인이 살았는데 이젠 5천명 정도밖에 없다고 했다.

“어쨌든 한국이 땅은 조그만해도 잘사니 좋지요. 다 같은 고려사람 아닙니까. 딸이 러시아에서 잘사는데, 거기 와서 살아라 해도 그럴 생각은 없어요. 우슈토베 원동마을이 내 고향이니까요.”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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