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④ 도가이 안드레이 게나디에비치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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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03   |  발행일 2018-08-03 제5면   |  수정 2022-05-18 17:16
“시장서 김치 팔아 피아노 사 준 외할머니 사랑으로 뮤지션 성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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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고려인 음악프로듀서 도가이 안드레이 게나디에비치와 그의 아내이자 키르기스스탄의 유명 솔로가수 지데쉬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도가이 안드레이 게나디에비치(44)는 음악프로듀서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아코디언, 피아노, 기타 등을 연주하며 젊은 시절 그룹사운드를 결성해 뮤지션으로 활동했다. 작곡과 음반기획을 병행하다 ‘지데시’라는 키르기스스탄의 여성 보컬리스트를 발굴, 터키에서 열린 터키비전(터키에서 열리는 음악대회)에서 우승해 터키와 키르기스스탄은 물론 중앙아시아에 이름을 떨쳤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

“아침 해가 뜨는 나라~ 산 좋고 물 맑아. 금강산이 솟았으니~ 금강산천을 떠나서~”

지난 5월 도가이 안드레이 게나디에비치가 한국어로 외할머니에게서 배운 노래를 낮게 웅얼거렸다.

“대여섯 살 때 빠바(아버지)가 군대에서 아코디언을 가지고 왔어요. 빠바는 연주를 잘하지 못했는데, 아코디언을 늘 천장 위에 올려놓았어요. 난 늘 그걸 연주하고 싶었죠. 외할머니가 아코디언을 바닥에 놓고 바람을 넣어주면 제가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건반을 두드렸죠. 나중에 외할머니가 노래를 부르고 내가 연주할 정도까지 실력이 됐어요.”

도가이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인근 쿨룩이란 고려인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도가이 게나디(69), 어머니는 초이 엘레냐(66)로 둘 다 우즈베키스탄에 고분질(오랫동안 타지로 떠나 농사짓고 수확해 돌아옴)을 하는 국가기관에서 일했다. 그는 13세때까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중앙亞서 성공한 음악프로듀서
젊은시절 그룹 만들어 활동하다
터키비전 우승하면서 유명해져

“한국 가본적 없지만 고향 느낌
K-pop에도 아주 관심 많아
아내와 한국어 노래 하고 싶어”



도가이는 어릴 때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굴하고 지원해 준 외할머니 덕분에 뮤지션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외할머니는 시장에서 당근 샐러드와 짐치(김치)를 팔아 피아노를 사 줄 정도로 외손자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당시 빠바의 월급이 120루블이었는데, 피아노가 750루블 정도였어요. 피아노가 트럭에 실려 집에 도착했을 때 피아노를 내리기도 전에 트럭에 올라가 피아노를 연주한 기억이 나요(웃음).”

그는 ‘슈콜라(11년제 초·중·고 정규학교)’ 외에도 방과후 따로 음악학교에 들어가 7년간 다녔다. 고학년 땐 교내 오케스트라 정규단원이었다.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보다 재즈 같은 창작 연주에 더 흥미를 느꼈어요. 자유주제로 연주하는 콩쿠르에 나가면 항상 1·2등을 하곤 했죠. 슈콜라 시절엔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클래식이나 소련 음악밖에 몰랐는데, 나중에 미국이나 유럽 대중음악을 듣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어요.”

◆뮤지션이 되기 위한 힘든 여정

슈콜라를 마친 1991년, 소련 붕괴가 시작됐다. CIS국가 중 하나였던 우즈베키스탄 역시 정정이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사회는 부패했다.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뇌물을 줘야 확실하게 의대에 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포기했죠. 대신 병원에 취업해 수술실에도 들어가 일했어요. 돈은 별로 못 벌었지만 꿈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죠. 계속 있었다면 의사가 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곧 그만뒀어요. 당시엔 개인사업이 유행이었거든요. 친구랑 4명이 한국식당을 운영해 돈을 좀 벌었죠. 그런데 그즈음 레스토랑에서 공연을 하는 한 그룹을 보고 나도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결국 식당을 접고 악기를 구입해 그 그룹의 멤버가 됐습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내 이탈리아, 프랑스, 한국 레스토랑 등지에서 2년간 공연활동을 하며 하루 평균 150~200곡을 연주했다. 그러다 94년 친구 1명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건너갔다. 고분질을 하며 현지에서 한국식당을 개업해 재즈 연주를 하고자 했던 것. 하지만 의지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반디뜨’라는 조직폭력배가 방해를 했어요. 우리끼린 ‘지붕’이라고 하는데, 뒤를 봐주는 폭력조직 같은 것이죠. 결국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와 음악을 계속했죠. 96년부터는 음악 외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도가이는 2인조 그룹 ‘산타운’을 조직해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직접 곡을 만들고 음반도 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98년 7월 그는 다시 타슈켄트를 떠나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로 가 8년간 활동했다. 그동안 2인조를 3인조로 바꾸는 등 성공을 위해 몸부림쳤으나 2007년 결국 산타운은 해체됐다. 그러는 사이 나이는 30대 중반에 들어섰다.

◆솔로프로젝트로 성공

“돈과 시간에 쪼달리다 보니 가정생활이 제대로 안 됐어요. 어떻게든 명성도 얻고 돈도 벌어보자는 마음을 먹고 ‘아르텍’이란 라이브 밴드를 조직했죠. 보컬 1명에 연주자가 4명이었는데, 5년 정도 활동했어요. 처음엔 저도 함께 연주를 하면서 음향·편곡 등을 책임졌죠.”

아르텍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점점 클라이언트를 만날 기회가 자주 생기자 그는 연주 대신 매니저를 도맡아 하게 됐다.

“쇼프로젝트를 하면서 성공하게 됐어요. 다들 제 덕분에 자동차도 사고 아파트도 구입하고…, 2008년엔 아르텍미디어그룹을 만들어 쇼에만 집중했습니다. 아르텍은 정말 인기가 많았어요. 러시아 모스크바와 연해주,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여러 곳으로 초청 연주를 다녔지요. 러시아고려인협회의 초청으로 설 행사를 맡은 적도 있어요. 제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죠.”

그는 2014년 아르텍을 해체하고 키르기스스탄의 여성보컬리스트 ‘지데쉬’의 솔로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음악프로듀서로 본격 데뷔한 것이다.

“처음으로 음악프로듀서를 하며 유로비전·터키비전 같은 국제적인 콩쿠르를 노렸죠. 특히 2015년 터키에서 열린 터키비전에선 결승까지 올라가 우승을 했지요.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후 프로듀싱센터와 스튜디오를 열고 보컬·댄스아카데미도 개소했어요.”

터키비전에서 우승하자 여성보컬인 지데쉬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와 지데쉬는 터키는 물론 키르기스스탄인이 살고 있는 프랑스, 체코, 독일 등 유럽으로 초청돼 공연을 펼쳤다.

“지데쉬는 키르기스의 스타 가수입니다. 어디를 가도 그녀를 알아봐요. TV에도 많이 나오고 가요대회 심사위원으로 여러 번 출연했죠. 2016년 영국에서 열린 유로비전의 심사위원이 되기도 했어요. 그런 그녀가 지금은 저의 아내가 됐죠. 2016년에 결혼했는데 아내는 저보다 11살이 적어요.”

그가 마흔이 돼 성공을 하자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던 부모님과 여동생도 키르기스스탄으로 거처를 옮겼다.

“저에겐 사실 전처(前妻)가 있어요. 각각 18세, 17세 때 동네 어른들이 소개해 줘 결혼했지요. 콜호스에서 농사를 짓던 고려 여성입니다. 둘 사이에 24살 아들과 20세 된 딸이 있어요. 지데쉬 역시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이 한 명 있어요. 지데쉬와 저 사이엔 돌을 넘긴 아들이 하나 있는데 같이 살아요. 전처와 이혼은 했지만 같은 아파트에 살아요. 사이가 좋아 음식 같은 걸 나눠 먹기도 하죠.”

◆고국 한국과 조국 키르기스스탄

그는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남쪽 톈산이 잘 보이는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해 돌아온 키르기스스탄 여성으로부터 한국 요리를 배워 직접 집에서 김치찌개, 된장찌개도 끓일 줄 안다. 그에게 음악이란 어떤 의미일까.

“음악은 저의 모든 것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음악에만 빠질 순 없어요. 모든 사람이 100% 만족해하는 음악을 할 순 없어요. 음악의 대중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염두에 둘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늘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요. 여기선 민족 음악이 더 인기가 많기는 한데, 전 현대적인 것을 좋아해요. 케이팝(K-pop)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도가이는 지금까지 한국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 그에게 한국은 미지의 땅이다.

“6살 적은 제 여동생이 한국 국적을 취득해 제주도에 살고 있어요. 이모가 곧 환갑인데, 한국에 사는 이종사촌들이 한국에서 환갑을 준비하고 있대요. 저도 내년에 갈 것 같아요. 제 조상이 맛보았을 한국의 공기도 느껴보고 어떤 곳인지도 알고 싶어요. 전 한국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늘 한국은 고향과 같은 느낌이에요. 전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고려인이었고, 여기서도 고려인이에요. 하지만 오늘날 키르기스는 나의 조국이고 나의 집이죠. 지금의 아내가 한국 요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앞으로 아내랑 한국어로 음악을 하고 싶어요.”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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