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호주·뉴질랜드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6]파란만장한 30여년의 이민스토리 이기선씨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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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9   |  발행일 2019-08-29 제14면   |  수정 2022-06-09 11:32
코치·변호사·택시기사…서울대 출신 유학생 ‘변화무쌍 인생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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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선씨가 호주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파란만장했던 인생역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서울대 학사·석사, 육군사관학교 교관, 호주 청소년 배구국가대표팀 감독, 시드니의대 학부생, 여행 가이드, 면세점·보석공장 등 대표, 언론사 편집국장·사장, 금융회사 지점장, 호주 국립대 법학 석사, 호주 변호사(난민심사 업무), 건강식품·화장품 업체 사장, 택시 드라이버. 믿기 어렵겠지만 한 사람이 지닌 이력(履歷)이다. 한국에서의 스펙도 범상치 않지만, 호주에서의 삶의 궤적은 그야말로 변화무쌍이다. 다양한 경력과 직업의 간극마다에는 롤러코스터마냥 부침을 겪었던 드라마틱한 이민스토리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따로 책 한권을 써도 될 만큼 그의 인생 역정은 다채로웠다. 한때 시드니 최고 사업가라는 명성을 뒤로하고 지금은 여가 삼아 택시를 모는 이기선씨(62) 이야기다. 그는 돈을 갈퀴로 쓸어담듯이 벌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했다. 물론, 그 행복의 원천은 가족이다.

◆박사과정 유학생이 호주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돼

이기선씨는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다. 58년 개띠생이다. 서울에서 초·중·고를 다닌 후 1977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ROTC였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전방부대에서 1년간 소대장 생활을 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하다가 1986년 대위로 제대했다. 육사 교관 시절에 가정을 꾸렸고 서울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과정도 마쳤다. 교수나 학자가 될 생각이었기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따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장학금 문제로 미국 유학은 진척이 안됐다. 우여곡절 끝에 1987년 시드니대학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파란만장한 호주 이민 생활의 서막은 그렇게 열렸다.


시드니대학서 박사과정 공부 중
배구 가르치다 U21대표팀 맡아
교수꿈 접고 같은 대학 의대 진학
살인적 학업 일정에 또 중도포기
대박 친 면세점 회계부실로 파산
주위 도움으로 새로운 직업여정
2년전 맡은 한인회 부회장 ‘보람’



이씨는 시드니대학에서 박사 공부를 하던 중 호주 청소년 배구대표팀 감독이 됐다. 사연은 이렇다.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드니 장애인협회 사무실은 스포츠센터 내에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그곳에서 훈련을 하던 청소년 배구 클럽팀 코치를 맡게 됐다. 그가 초·중학교와 대학 시절에 배구선수였기 때문이다. 2시간에 10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일주일에 두번 훈련지도를 했다. 그리고 뉴사우스웨일스주(州) 배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그 클럽팀 회장의 제의로 주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이후 주 대표팀이 각종 대회를 휩쓸면서 이씨는 탁월한 배구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마침내 호주 청소년(21세 미만) 배구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됐다. “그때가 아마 1989년도였을 거예요.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는데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맡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도 그때만해도 박사 학위 따고 귀국해서 대학교수가 되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하지만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는 그의 인생 항로를 완전히 변경시켰다. 대표팀을 이끌고 해외 대회 출전 및 전지훈련을 가기 위한 영주권을 받은 게 호주에 눌러 앉아 살게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교수·의사 공부 포기하고 사업가로

이씨는 그즈음 호주에서 박사학위를 따는 게 엄청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죽도록 공부해도 7년 안에 학위를 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박사가 돼서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교수가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귀국을 포기하고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전에 배구 감독도 그만뒀다. 1년을 공부해서 호주의 대입 수능격인 HSC(High School Certificate) 시험을 보고 시드니대학 의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2학년이 되자마자 휴학했다.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였다. “고 3때 공부하던 거보다 몇배는 힘들었어요. 과목 한개를 패스하려면 정말 죽을 힘을 다해야 돼요. 수업 진도 따라가는 게 버거워 평일은 단 일분도 숨 쉴 틈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학교 오면 집생각, 집에 오면 학교 생각밖에 안났어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결국 2학년 때 휴학을 했는데 아직까지 복학을 못하고 있죠. 하하~ 그런 살인적인 과정을 견뎌내고 여기 의대 졸업하는 학생들이 참 존경스러워요.”

그가 의대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던 건 그래도 비빌 언덕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배구로 딴 영주권’을 디딤돌 삼아 공부를 접고 돈벌이에 나섰다. 면세점 사업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즈음은 한국인 관광객이 호주로 물밀듯이 몰려오던 시기였다. 이씨는 아르바이트로 여행 가이드도 해봤기에 면세점이 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992년 시드니에 한국인 관광객 전문면세점을 처음으로 오픈했다. 장인에게 빌린 거금으로 배포있게 대규모로 차렸다. 매장면적 1천㎡에 직원 수는 60명이었다.

◆면세점 사업 대박…30대에 느낀 ‘돈의 맛’

면세점 상품은 날개돋친 듯 팔렸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면세품에는 술, 담배 같은 듀티프리가 있고, 호주 특산품 위주의 택스프리가 있어요. 듀티프리 상품은 구색만 맞춰놓고 주로 택스프리 상품을 팔았는데 오픈 첫 해에 매출이 100억원이 넘었어요. 그때 제가 30대 초반이었지만 아마 시드니에서 제일 잘 살았을 거예요.”

면세점 사업은 잘 됐지만 문제가 있었다. 여행사가 손님을 보내주는 대가로 점점 더 과도한 커미션과 접대를 요구했던 것. 이에 커미션과 술값 등 마케팅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다 보니 매출이 서너배 늘어도 수익은 되레 감소했다. 술 접대하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사업을 다각화했다. 건강식품, 무스탕 의류, 환전, 보석(오팔) 제조 등 업체를 7개까지 늘렸다. 연간 최고 매출이 950억원까지 찍었다. 더구나 주로 현금장사여서 돈의 맛을 톡톡히 봤다. “어떤 날은 3일이면 현금이 150만달러 정도 들어오니까 자루에 담아 꾹꾹 눌러도 집 금고에 다 안들어가요. 그래서 그 돈을 침대에 쫙 펼쳐놓고 드러눕고 그랬어요. 돈 냄새도 좋더만요.”

이씨는 면세점과 여러 업체를 주식시장에 상장시키고 본인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장 직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재앙이 찾아왔다. 면세점에서 주로 커미션으로 나간 현금거래의 회계정리를 안한 게 화근이었다. 경쟁업체의 고발 등으로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서 악몽은 시작됐다. 그가 쌓았던 엄청난 재산이 신기루처럼 모두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한순간에 망한 사업…“고통서 구해준 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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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선씨 가족이 해외여행 중에 찍은 기념사진. 이씨의 두 딸은 호주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세무조사로 엄청난 벌금을 맞고 사업은 급속도로 몰락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파산만은 막아 보려고 발버둥쳤다. 전 재산을 털어 넣고도 모자라 집과 차까지 팔았다. 2년을 그렇게 버텼지만 재기하지 못하고 결국 사업은 완전히 망했다. 빌려준 돈도 못받고 거의 빈털터리가 됐다. 지옥같은 생활이 시작됐다. 하루에도 몇번씩 자살충동과 화병에 시달렸다. 가족을 생각하면 더 미칠 것 같았다. “제가 딸이 둘인데, 큰 애가 대학 입학할 때 랩톱을 사달라고 했는데 못사줬어요. 그때가 살면서 가장 슬펐어요.”

이씨는 돈은 잃었어도 인심은 잃지 않았다. 주위에서 여러 도움을 받았다. 친구 제의로 신문사(호주 동아)·잡지사(코리아타운) 사장과 편집국장을 3년간 지냈고, 금융회사가 알선한 지점장 노릇도 2년 했다. 하지만 단기 일자리에 마냥 매달릴 수는 없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번엔 법률 공부에 도전했다. 캔버라에 있는 호주 국립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호주 정부의 난민심사업무를 대행하는 국선 변호인(애드버케이트)으로 8년간 활동했다. 지금은 건강식품·화장품 업체 사장도 맡고 있지만 규모가 작아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대신 2년전 부회장을 맡은 한인회 업무에 보람을 느낀다. 특히 최근 소일거리로 시작한 우버택시 모는 일이 마냥 즐겁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이민 스토리는 아무래도 따뜻한 가족이야기로 결말을 맺을 듯하다.

“사업이 쫄딱 망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힘을 불어넣어준 아내와 착하고 올바르게 자라준 아이들이 너무 고마워요. 요즘은 어쩌면 사업 실패가 행운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돈보다 훨씬 소중한 게 가족의 사랑 아니겠어요? 저는 복 받은 사람이고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사진=이정화 작가 seajip00@naver.com

공동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호주·뉴질랜드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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