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⑥ 강 게오르기 바실리에비치와 리 스따니슬라브 찬지노비치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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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1   |  발행일 2018-09-11 제6면   |  수정 2022-05-18 17:16
중앙아시아 한민족의 정체성 지키는 ‘역사학자’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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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국립 아바이사범대에 40년간 재직하면서 카자흐스탄과 고려인 역사 연구에 천착해 온 강 게오르기 바실리에비치 교수(고려인 3세)가 민족의 동질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강 게오르기 바실리에비치(62)는 고려인 3세로 역사학자다. 카자흐스탄 국립 아바이사범대 교수로 40년간 재직하면서 카자흐스탄과 고려인 역사연구에 천착해 왔다. 현재 카자흐스탄민족회의 위원, 카자흐스탄 과학원 사회학 및 인문학 감정위원을 역임하고 있으며 옛 소련 역사교과서 속 카자흐스탄과 고려인 역사 부분을 집필했다.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역사학계의 거장이며 북한, 중국, 미국 등지에 그의 논문이 번역돼 있다.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할아버지(강병일)가 할머니(조춘옥)와 함께 1913년 한반도에서 원동(연해주)으로 이주했어요. 전 진주강씨예요. 친척들이 북한, 중국, 미국 등지에 살고 있지요. 아버지는 원동에서 1924년 8월20일 11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중 5명이 죽고 6명이 살아남았죠.”

강 게오르기 바실리에비치는 민족의 역사를 알기에 앞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아는 게 먼저라고 했다.


강 게오르기 바실리에비치
아바이사범대 교수로 40년 재직
카자흐·고려인 역사연구에 매진
명저 ‘위대한 초원의 역사’ 펴내



“아버지가 13세 때 강제이주돼 카자흐스탄 타라스에 실려왔어요. 가족은 움막집에 살며 ‘콜호스’에서 일했습니다. 러시아말을 할 줄 몰랐다고 해요. 하루는 아버지의 육촌 동생 강 일리세이가 검은까마귀(KGB)에 의해 체포돼 끌려가 재판에 넘겨져 10년을 선고받았대요. 그때 저희 집에 귀한 책이 많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가족에게도 위험이 닥칠 수 있다고 염려해 다 태워버렸다고 하더군요.”

그의 아버지가 콜호스에서 일하던 중 2차대전이 일어났다. 선친은 이민족이라 참전하지 못하고 대신 러시아 툴라 부근 소끼노 광산에서 독일군 포로병과 함께 노역했다. 그 사이 할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광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러시아인으로 군수공장에서 일하다 바르나우치 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농촌에서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콜호스에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넷을 뒀다. 게오르기는 4형제 중 둘째다.

“5세 때 고려인 집단농장 꿈자따 콜호스로 이사와 3년간 살았어요. 이후 아버지는 다시 탄광으로 가서 일하고 어머니는 교사생활을 하다 고분질농사를 했답니다. 할머니가 대가족을 건사하면서 감자 생산 증식 영웅으로 훈장까지 받았어요. 어릴때 할머니 훈장을 차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가 ‘빨리 먹어라’ ‘밥이 왔다’ ‘집으로 가오’ ‘마이 먹었덤두’ ‘맛이 있소’ ‘술이 없소’ 같은 말을 하던 게 기억이 나네요. 그땐 돌잔치, 환갑잔치도 있었어요.”

◆역사학자의 길을 가다

게오르기는 호기심 많은 아이였으며 학교에선 우등생이었다.

“집에 두툼한 책들이 많았는데, 책을 다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어요. 어머니는 항상 푸시킨의 시를 외워라고 했죠. 지금도 외울 수 있어요(웃음). 아버지는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난 수학이나 생물보다 역사가 좋았어요. 결국 카자흐스탄 국립 아바이사범대 역사학과에 들어갔죠. 줄곧 1등을 했어요. 3학년 땐 레닌장학금도 받았습니다. 78년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뒤 바로 교수가 됐어요.”

그는 소련 해체 후 기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1994년 처음으로 고려인 역사서를 출간했다. 또 96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카자흐스탄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사용할 역사교과서를 집필했다. 이밖에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초원의 역사’를 쓰기 위해 인도, 몽골, 알타이 등지를 다니면서 많은 자료를 찾았다. 이후 명저 ‘위대한 초원의 역사’가 출간됐다.

“91년까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에 대한 역사 연구가 없었지요. 그런데 옛 소련 아카이브에 고려인 강제이주와 관련된 기밀문서가 많아요. 카자흐스탄과 한반도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각각 대륙과 해양문명의 접점에 위치해 있으며 언어도 알타이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요. 단군과 투르크의 선조 아쉬나는 공통점이 있어요. 복식이나 문양, 샤머니즘도 유사한데, 구체적인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관심이 많다.

“소련 붕괴 후 강제이주 된 독일인, 체첸인, 칼미크인 등 50만명이 각기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고려인은 이곳에 정착했지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은 남북 왕래가 가능하죠. 하지만 ‘부모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어 울고 있는 아이’와 같아요. 카자흐스탄에는 120개 민족이 평등하게 살고 있습니다. 처음엔 한국인과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국사람과 교류가 많아졌어요. 남북이 하루속히 통일돼 함께 번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진주강씨 족보도 함께 만들 수 있지 않나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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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스따니슬라브 찬지노비치는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고려인 시인이다. 그가 한국에서의 삶을 떠올리며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리 스따니슬라브 찬지노비치(58)는 중앙아시아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을 대표하는 고려인 시인이다. 카자흐스탄 북부 아크몰라(현재 수도 아스타나)의 고려인 집단촌인 모뽀르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1981년 알마티공대를 졸업했다. 95년 첫 시집 ‘이랑’을 낸 뒤 ‘재 속에는 간혹 별들이 노란색을 띤다’(1997), ‘한줌의 빛’(2003) 등을 출간했다. 그의 시는 2008년 ‘러시아 현대 해외 20인 시화집’에 게재돼 있다. 러시아 거주 시인이 아닌 다른 민족의 시인으로 유일하며 카자흐스탄 국정교과서에도 소개돼 있다. 그는 한국의 한시집 등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카자흐스탄에 알리기도 했다. 2010년 그가 쓴 ‘모뽀르마을에 대한 추억’을 한국의 김병학 시인이 한국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이 시집 속 시가 러시아 최고 문학잡지 ‘베레가’에 게재되기도 했다.

◆시인이 되기까지

“5세 때 할머니와 화투놀이를 한 기억이 있지요. 밥, 북장(함경도식 된장), 김치를 먹었어요. 6세 땐 처음 러시아음식을 맛봤어요. 외삼촌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핵무기 기술자로 일하면서 시골에서 못 보던 소시지, 캐비어, 오렌지, 사과 같은 걸 보내왔죠. 모뽀르에는 고려인이 500~600명 살았어요.”


■ 리 스따니슬라브 찬지노비치
시집‘한줌의 빛’고려인 삶 담아
한시 등 30년간 러시아어로 번역
韓문학 카자흐에 알리는데 노력



어릴때 그의 집에는 고전문학 서적이 많았다.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빅토르 위고 등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고 초등학교에선 고려말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효녀 심청, 혹부리영감, 흥부놀부 같은 전래동화도 읽어줬다. 6세 때 텔만학교에 입학한 그는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암기력이 좋았다. 청소년시기에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물리, 화학,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 상도 타 한때 수학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또 유도에 몰입해 유도대회 우승경험도 맛봤다.

“모스크바대학을 갈까 노보로시스크대학을 갈까 고민했어요. 당시 어머니는 농업기술자였고, 이모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어요. 두 분 뜻을 따라 알마티공대 농기계관련 학과에 갔죠. 졸업 후 군대에 가 유도교관을 하다 제대하고 8년간 가축사료 개발연구소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던 중 소련이 붕괴되면서 일자리를 잃어버렸지요.”

◆시는 나의 운명

그는 대학시절 박일 교수(김일성대 부총장을 지낸 전 카자흐스탄국립대 철학교수로 ‘조선시집’을 펴냄)를 만나면서 한민족사와 시에 눈을 떴다.

“어릴 때 고려말을 해도 의사소통만 했지 느낌과 깊이가 없었어요. 교통사고 후 기억상실증으로 사고 이후의 것들만 기억하는 사람처럼 슬픈 운명을 가진 게 고려인이에요. 박 교수와의 만남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이즈음 그는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 ‘이랑’은 그 산물이다.

“10세 때부터 러시아어로 시를 끄적거렸어요. 시를 쓰면 마음이 편하고 안 쓰면 고통스러웠죠. 지금도 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첫 시집의 시를 레몬즙을 짜내듯 썼어요. 55편의 시를 담았지만 미학적이지도, 로맨틱하지도 않았어요. 당시만 해도 카자흐스탄에선 방 3개 딸린 아파트가 4천500달러 정도 됐는데, 그 돈으로 시집을 냈지요.”

그는 서점에 가면 중국이나 일본의 시는 러시아어로 많이 번역돼 있는데 한국 문학은 찾아 볼 수 없어 자신이 번역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졌다고 했다.

“한국의 고대 한시를 비롯해 유명한 시를 30년간 러시아어로 번역해 소개했지요. 시를 쓰거나 제대로 번역하려면 그 나라의 역사와 철학, 사상을 알아야 하죠. 시조나 판소리가 특히 그렇죠. 시집 ‘한줌의 빛’엔 고려인의 삶과 이야기를 많이 담았습니다. 난 돈 때문에 시를 쓰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에게 시를 쓰라고 부탁해 쓰고 있습니다.(웃음)”

찬지노비치는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 일 한 적도 있다.

“예전엔 한국이 그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한국은 물론 세계와 연결돼 있어 덜 그립죠. ‘안동역에서’라는 트로트를 즐겨 부릅니다.”

얼마전까지 건강악화로 고생을 했던 그는 요즘들어 ‘왜 고려인이 이처럼 멀리 중앙아시아로 왔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고 했다.

“옛날 선조들이 그러했듯 거기엔 신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슬픔과 한의 역사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 보지 않아요. 저에게 한민족은 뿌리이며 러시아는 줄기예요. 제가 태어난 카자흐스탄은 꽃잎이라 할 수 있는데, 카자흐스탄을 사랑합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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