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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디아스포라
[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로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② 허가이 블라디슬라브 구코비치
◆장군의 손자“우즈베키스탄 아쿠르간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어릴 때 어른들께 물을 따르다 넘어졌는데, 누가 ‘장군이 넘어졌다’면서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너도 장군이 될 거야’라고 한 기억이 있어요.”허가이 블라디슬라브 구코비치씨(67)는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구한말 대표적인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친손자다. 왕산은 4형제(허학·허영·허준·허국)를 뒀는데, 블라디슬라브는 허국의 5남4녀 중 막내다.큰아버지 허학은 의병장 간 연락과 무기조달을 담당하며 부친의 의병활동을 돕다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했다. 옛소련에서 살다 허국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으나 1944년 실종됐다. 당시 허영과 허준도 일본군 수배대상이었다. 공부 독려하는 아버지 밑서 자라 5남4녀 중 8명이 대학에 진학오데사대학 지질학과에서 공부지질자원연구원으로 13년 근무생활고로 퇴직…수박농사 지어2006년 특별귀화 한국에 왔지만건강 악화된 러시아 출신 아내한국에 살기를 원치 않아 복귀“큰아버지(허학)의 딸 로자 누님이 서울에서 살죠. 작은아버지(허영)는 중국에서 돌아가시고, 자녀가 대구와 미국에서 살아요. 독립운동을 했던 허준 숙부는 광복 후 서울로 갔다 좌익으로 몰려 북한에서 1956년에 사망했어요. 세 아들(광배·웅배·환배)이 있는데, 웅배는 97년 돌아가셨어요(웅배는 허진 또는 임은으로도 불린다. 6·25전쟁 때 인민군 선무공작대장으로 참전했다. 52년 모스크바로 유학, 모스크바대 교수가 됐으며 러시아고려인협회장과 고려일보 회장을 지냈다. 흐루시초프시절 반(反)스탈린, 반(反)김일성 운동을 벌였으며 후일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를 수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웅배 딸이 모스크바에 살아요. 환배는 딸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사는데, 사위(최 블라디미르)가 큰 부자예요.”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묻자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아버지는 연해주에서 한글신문 기자와 교사를 했어요. 레닌기치에 시를 써 당선돼 우리들에게 자전거도 사줬죠. 중앙아시아에 와서 농사를 지으며 시도 썼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분질(1년 이상 타지로 떠나 농사짓고 수확해 돌아오는 것)을 하다 63년에 키르기스스탄으로 와 다시 고분질을 계속했죠. 자녀들이 학교로 진학하면서 떨어져 살았어요. 어릴 때 집에선 항상 고려말을 써서 나도 러시아말을 할 줄 몰랐죠. 71년에 돌아가셨어요.”그의 집안은 대대로 ‘왕산가’라는 자부심이 높았다.“양기울시(市)로 이사가 그곳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아버지께서 돈을 버는 것보다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늘 말씀했어요. 심지어 공부를 못 하면 매를 들기도 했죠. 그래서 그런지 형제자매들이 다들 대학 나와 박사학위 받고 똑똑했어요. 미론형만 공부를 안했죠(웃음). 미론형은 철공소에서 기술자로 일했는데, 나중엔 키르기스스탄에서 손꼽힐 정도의 기술자가 됐죠. 우리는 우즈벡어를 썼죠. 난 키도 작고 까무잡잡했어요. 학교에서 너무 어리다고 안 받아줬죠. 그래도 8학년 때까지 1등을 했어요. 싸움을 걸어오면 잘 싸웠죠. 장군의 손자답게(웃음).” 어머니의 이름은 ‘장 비에이라’. 아버지와 재혼해 형 게오르기와 자신을 낳았다. 위로 3남4녀가 이복 형제자매인데, 나이 차가 많이 났다.“가장 큰 형이 허 일리아인데 16살 때 얼어죽었어요. 다음이 허 알렉산드리아, 허 조야(사망), 허 클라라, 허 브로코호비치, 허 알렌시아, 허 미론, 허 게오르기 다음이 저예요. 브로코호비치는 우즈벡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러시아에서 살아요. 알렉산드리아는 연해주로 시집가고, 클라라는 교사를 하다 러시아에서 살죠. 손자가 미국에 있어요. 미론은 나중에 타슈켄트의 국가기관에서 일하다 모스크바에서 병사했지요.” 바로 윗 형 허 게오르기는 모스크바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옛 소련의 공기업에서 일하다 키르기스스탄이 독립되면서 고분질을 했다. ◆지질학자로서의 삶1968년 블라디미르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와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초·중·고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듬해 우크라이나 오데사대학 지질학과에 입학했다.“지질에 흥미가 있어 지질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지질학은 학문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지요. 특히 심해에서 가스나 석유 같은 것을 찾는 해양 지질에 관심이 많았어요.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여 집에도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그는 돈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맘껏 하고 싶었다. 성적도 늘 상위권이었다. 지금도 대학시절을 인생의 황금기라고 여기고 있다.“우리 과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이었어요. 그럼에도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니 교수들이 많이 놀라더군요. 74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키르기스스탄의 지질학연구소에서 일했어요.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지질지도를 만들고 운쿠다쉬시에선 금광도 발견했죠. 키르기스스탄 남부 잘랄아바드에서 퇴직했어요.”그는 지질자원연구원으로 13년간 근무했다. 하지만 키르기스스탄이 옛소련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뒤엔 경제난으로 아이들 양육비와 교육비를 감당하기 버거워 91년 연구소를 그만뒀다. 이후 2년간 카자흐스탄 아크토베와 사라토브 등지에서 수박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한국의 모 다큐멘터리제작사와 인연이 돼 키르기스스탄에 진출한 삼성엔지니어링의 한국어 통역사로 일했다. ◆한국으로 특별귀화…그러나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2006년에 독립유공자 후손 자격으로 형(게오르기)과 함께 한국에 특별귀화했어요. 한국에서 살 때 구미에 있는 할아버지(왕산)기념관에도 가보고 조상들이 묻혀있는 산소에도 가봤지요. 경기도 안산의 한 의료기기업체에서 2년간 일했는데, 아내가 건강이 나빠져 한국에서 살길 원하지 않았어요(그의 아내는 러시아출신이다. 같은 나이로 지질학연구소 동료로 일하다 연애 끝에 결혼했다). 나이가 들어 한국에 정착하기 힘들었어요. 또 정착금을 받아도 아파트를 구입할 여력이 안 될뿐더러 전세금 내기도 빠듯했죠. 인천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인이란 자긍심이 있었어요. 상황이 됐으면 한국에 살았을 텐데…. 한국에 있을 땐 소망교회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그는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와 한 한국인의 도움으로 1.5t트럭을 헐값에 구입한 뒤 휴대폰을 이용해 이삿짐 운송업을 했다. 돈벌이도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다. 사업을 하는 둘째아들(허 세르게이)이 생활비를 대준다. 아들이 자동차도 사줬다. “아들이 둘인데 큰아들(허 알렉산드라·40)은 캐나다에서 살아요. 여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캐나다에서 통역 일을 하고 있어요. 제 연금이 한달에 80달러, 아내가 150달러를 받습니다. 한국의 기초노령연금이 인상됐다는데, 저도 해당이 되는지 모르겠어요(웃음). ”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왕산가의 독립운동구한말 13도창의군 의병총대장으로 한양 진공작전을 펼쳤던 왕산(旺山) 허위 선생(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구미시 임은동 출신이다. 왕산가(旺山家)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문가 중 하나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만 10여 명에 이른다. 왕산의 백형인 허훈(건국훈장 애국장)은 유학자로 논 3천마지기를 팔아 독립군자금을 지원하고, 진보지역 의병장으로 참전했다. 맏손자인 허종은 만주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자금 모집 활동을 했다. 계형인 허겸(건국훈장 애족장)은 경기도에서 의병을 조직한 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인 부민단 초대 단장을 지내다 만주에서 별세했다. 왕산의 사촌동생인 허형과 허필 또한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했다. 허필의 아들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으로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 등과 항일무장투쟁을 하다 전사했다. 중국 선양9·18역사박물관에 그의 행적이 전시돼 있다. 또 허형의 아들 허민, 허발, 허규도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딸 허길의 아들이 저항시인 이육사다. 왕산의 직계 제자로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 열사가 있다.※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구한말 의병대장 왕산 허위 선생의 친손자 허가이 블라디슬라브 구코비치가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시 교외 자택 정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허가이 블라디미르 구코비치는 러시아 출신 여성(루드밀라)과 결혼했다. 결혼식 때 찍은 사진(오른쪽 위).왕산 허위 존영
2018.07.17
[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로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①‘전설의 체육영웅’ 황 마이 운데예비치씨
영남일보는 고려인 강제이주 81주년을 맞아 ‘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을 총 7회에 걸쳐 연재한다. 옛 소련시절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한 고려인 1세대를 비롯해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2·3세대 동포의 생애사와 라이프스토리를 소개한다. 첫 회는 독립군의 아들로 태어나 8세 때 강제이주 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에 정착, 전설적인 체육영웅으로 자리매김한 황 마이 운데예비치씨의 이야기다. 8세 때 카자흐 아크몰라로 이주 거적때기 하나 없는 힘든 생활 가난 벗어나려 체육기술大 입학 20년간 스피드스케이팅 지도자로 100여명 세계정상급선수 길러내“러시아는 나에게 육신의 고향 카자흐스탄은 내 삶 바친 나라”◆유년기와 청년기는 일본과 독일이 빼앗아갔다황 마이 운데예비치씨(89)는 1929년 5월1일, 러시아 연해주 ‘싸말리’라는 빨치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운데 이름 ‘마이’는 러시아어로 5월이란 뜻. 그의 아버지(황운정)와 삼촌은 일찍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황운정 지사(1899~1989)는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온성과 종성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참여한 뒤 40여 명의 동지와 함께 만주로 갔다 러시아로 건너가 연해주 솔밭관부대에서 독립군 간부로 무장투쟁에 가담했다. 그러던 황 지사는 35년 일본의 첩자로 몰려 소련경찰에 체포돼 3년형을 선고 받고 카자흐스탄 카라간다로 유배됐다. 이후 1958년 복권돼 지방의 당위원장과 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2005년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며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 인근 루스쿨로바 공동묘지에 잠들어있다.“천장이 뚫린 낡은 집에 살던 기억이 나는데, 6세 때 경찰이 와 아버지를 잡아갔어. 어린 3남매를 두고 어머니가 홀로 됐지. 어쨌든 살아야했기에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비로비잔’으로 가 바느질, 재봉일 같은 것을 했어. 먹을 게 없어 떨어진 빵조각이라도 찾아야 할 정도로 배가 고팠지. 옷도 없어 아버지 옷을 입고 나중에 그것이라도 팔려고 하니 사는 사람이 없어.”3남매와 함께 길바닥으로 나앉은 그의 어머니는 살면서 3번이나 자살을 생각했단다. 한번은 아무르강에 빠져 죽으려다 길 가던 채소장수에 의해 살아났다고 한다. 우연히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기찻길의 전기발전소에서 일하는 옛 빨치산 중대 관계자와 만나 그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1937년 8세 때 생사의 갈림길에 선다. “어머니께서 1주일 뒤 이주를 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줬어. 옷이나 음식은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야. 4가구용 기차간에 8가구가 탔지. 낮에는 정차하고 밤에만 이동했어. 화장실에도 못 가고…. 가는 도중에 사람이 죽으면 삽이 없어 땅을 팔 수가 없었지. 시신을 돌로 덮든지, 기차 밖으로 던지든지 했어. 한번은 바이칼호수를 지날 때였어. 열대여섯살 되는 청소년 7~8명이 기차 위에 올라가 ‘바이칼호수 달빛은 청명한데, 기찻길 옆에 꽃은 피었고. 내 심장 속 꿈이 있는데 고향의 친구들이여 잘 있어라’라고 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 모두 기차 밑으로 떨어져 죽었지. 이튿날 담당 감시원이 ‘절대 이 일을 발설해선 안 된다’고 했어.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이야.”고려인들은 현 카자흐스탄 북부 아크몰라 지역 허허벌판에 내버려졌다. 그곳에 구덩이를 파고 임시거처를 마련했다. “크질오르다 지역으로 유배당한 사람들은 아크몰라보다 따뜻하고 물고기도 많아 덜 힘들었는데, 아크몰라는 생존 자체가 어려운 곳이었지. 거적때기 하나 없어 매우 추웠고 배고팠어. 그 힘든 과정을 겪었기에 우리가 질긴 민족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그의 가족은 아크몰린스크(현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로 거처를 옮겼다.“석탄 수송 기차가 굽은 곳을 지날 때 떨어뜨린 석탄파편을 주워 겨울에 땔감으로 썼어. 지게나 양동이에 석탄파편을 담아 지고 다닌 게 하루 일과였던 것 같아. 그런데 어른이 돼 생각해보니 그게 하체 단련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 감자 한 알만 있어도 굉장한 거야. 하루는 어머니가 물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1시간 이상 부싯돌을 피우려다 잘 안 되자 주저앉아 흐느끼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이불이 없어 가족이 밀짚을 덮고 잤는데, 내가 ‘배고프다’고 하니 “빨리 잠들어라. 내일이면 빵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달랬지만 다음날 아침에도 빵은 여전히 없었어.”그는 아크몰린스크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말이 학교였지 교재는 물론 공책이나 연필도 없어 공부할 형편이 안 됐다. 1941년 그의 아버지가 출소해 가족 곁으로 왔지만 일자리가 없어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학교는 집에서 6㎞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맹추위를 뚫고 걸어다녔다. “4~5학년 때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어. 학교에 갈 때마다 전쟁에 나간 친구들의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지. 부상으로 불구가 돼 돌아오는 어른들도 많이 봤어. 시험같은 것도 없었지. 집에서 가축을 기르고 땔감을 줍는 게 일이었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지.” ◆인생의 전환점이 된 러시아 레닌그라드그는 초등학교를 힘들게 다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카자흐스탄의 카즈셀 마쉬라는 농장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8세 때 황 마이 운데예비치는 더 이상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소르토발스키 체육기술대학에 들어갔다 다시 레닌그라드 해군양성학교(현 체육기술대학)로 전학했다. “전상자로부터 헐벗고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 레닌그라드에 있는 해군양성학교에 가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다고 해 어머니를 설득했지. 어머니는 울며불며 말렸는데, 결국 친구와 함께 가기로 했어. 고려인들은 공식적으로 이주 허가가 나지 않아 일반열차가 아닌 화물열차를 타고 갔어. 아크몰라에서 모스크바까지 열흘쯤 걸렸지. 열차표를 살 돈이 없어 화물칸에 몰래 탔는데 발각돼 쫓겨나면 또 다른 화물열차로 바꿔 타고…, 먹을 걸 살 돈도 없어 눈빛으로 구걸했지. 한번은 경찰이 빵을 먹고 있었는데 배고픈 눈초리로 그걸 계속 보고 있었던 거야. 그 경찰이 빵을 먹다 빵조각을 땅바닥에 내버렸는데 그걸 주워먹었지. 그때 나를 조롱하듯 바라보던 그 경찰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카자흐스탄 스피드스케이팅 영웅으로해군양성학교 재학시절 운동신경이 뛰어나 체조 등 다양한 스포츠에 재능이 있던 그는 1952년 스케이팅 트레이너의 권유로 스케이팅에 입문했다. 1953년 레닌그라드 체육기술대학 졸업 후 카자흐스탄 메데우스포츠팀 일원으로 스피드스케이팅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1954년부터 카자흐스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코치 겸 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4년 뒤 고려인으로선 옛 소련연방이 수여하는 카자흐스탄공화국 최초의 스피드스케이팅 공훈트레이너가 됐다. 그가 가르친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 세계신기록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그는 러시아 여인과 결혼해 딸을 하나 낳았다. 황 마이 운데예비치는 스피드스케이팅 지도자를 20여 년간 역임하면서 100여 명의 세계정상급 선수를 길러냈다. 그 가운데에는 Y. Malyshev, V. Geiderich, K. Seregina, L. Veronina 등과 같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도 있다. 그가 지도한 제자 중 30여 명이 현재 러시아를 비롯한 CIS국가의 공훈트레이너가 됐다. 1966년엔 석사학위를 따고 1990년 국립 카자흐스탄대 체육학과(동계스포츠 전공) 교수로 임용됐으며 현재까지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가 동계스포츠와 관련해 발표한 논문만 140편이 넘는다.카자흐스탄공화국 문화체육발전 훈장을 수훈하고, 10대 명예스포츠 인사에도 포함됐다. 구순을 1년 앞둔 그는 KazAST 관광 및 스포츠아카데미 이사장 및 고문을 역임하고 있다.“2011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알마티에서 열린 동계아시안게임 때 국기게양 후보로 선정될 기회가 있었는데, 국기를 들고 가다 쓰러지면 어떻게 되냐고 해서 떨어진 적이 있지(웃음). 하지만 난 아직도 세계격투기대회에도 나갈 수 있을 만큼 건강해. 90년 가까이 되는 인생사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어. 특히 배고픔과 추위가 힘들었지. 나에게 러시아는 육신의 고향이고 카자흐스탄은 내 삶을 바친 나라야. 한국은 부모의 고향이니 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지. 언제 어디에 있어도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카자흐스탄의 스포츠영웅 황 마이 운데예비치씨가 유년시절을 기억하며 격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고려인 1세로 8세 때 강제 이주열차를 탔다.
2018.07.04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끝> 7. ‘코리안-아메리칸 드림’이민 2세 백호씨
약 700만명. 외교부가 집계한 우리나라 재외동포의 수다. 외국에서 태어난 이들의 후손까지 고려하면 세계에 뻗어있는 한국인의 줄기는 감히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미국 재외동포 정착사 114주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 또 다른 향후 100여년을 그려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재외동포의 후손들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완벽한 외국인이 돼 있을 수도 있고, 양국의 문화를 토대로 발전한 새로운 모습의 한국인일 수도 있다. 영남일보는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 마지막 회로 이민 2세의 ‘코리안-아메리칸 드림’에 주목했다. 이민 초기 세대가 가슴에 품었던 ‘아메리칸 드림’을 넘어 그들의 후손이 그리는 ‘코리안-아메리칸 드림’의 내일을 살펴본다.◆한국과 미국의 사이…아이들이 있다백호(19). 범 ‘호’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영어 이름은 이를 번역한 ‘타이거’(tiger). 결국은 한글 이름이나 영어 이름이나 그 뜻이 같다.백호씨의 부모는 이민 1세인 백행기(68)·오명순씨(52) 부부다. 유년시절을 경산시 삼남동 74에서 보낸 백행기씨는 1989년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지금의 아내 오씨를 만났다. 둘의 사랑이 피어오르던 무렵 이 둘은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들 부부는 199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들 백호씨를 낳았다. 취학전 집에서 한국어만 사용영어는 나중에 자연스레 배워아버지 운영 태권도장에 놀러온美친구에게 韓 인사법 가르쳐부모님 열정 덕에 익힌 한국문화한국인이라는 게 늘 자랑스러워이민 2세인 백호씨는 영어가 더 편하지만 한국어도 곧잘 하는 편이다. 어려운 한국어 표현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인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 평소 대화할 때 나오는 몸짓은 미국인에 가깝지만 허리를 숙여 인사하거나 고개를 돌려 술을 마시는 모습은 한국인을 닮았다. 미국 친구들과 농구를 하러 가려고 걸친 티셔츠엔 한국 국기와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이 새겨져 있다. 한국과 미국의 사이. 그곳에 백호씨가 있는 것이다. 백호씨의 부모는 그에게 “네가 태어난 곳은 미국이지만 코리안-아메리칸으로 살아야 된다”고 말해왔다.그는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한국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대부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어릴 때부터 백씨의 부모가 한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가르쳐 온 덕이다. 유년시절 그의 놀이터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태권도장이었다. 그곳에서 미국인 친구들에게 태권도 품새를 가르쳤고 함께 연습했다.또 백호씨는 친구들이 도장에 놀러 올 때마다 항상 허리를 숙여 부모님께 인사하도록 시켰다.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 아이들에게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말하도록 가르쳤다. “애들한테 두 손 모으고 고개 숙여서 인사하라고 시켰어요.(웃음) 매일 그렇게 하다 보니까 백인 친구들이 우리 도장에만 오면 똑바로 인사해요. 밖에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인사해도 우리 부모님은 한국 사람이고 태권도는 한국의 무술이니까 그 순간만큼은 한국의 법칙을 따라야 된다고 생각해요.”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생님과 마주치면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악수할 때면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친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가끔 왜 그렇게 인사하냐고 물어봐요. 그러면 제가 이건 한국 문화라고 설명해 주죠. 그러면 애들은 더 이상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아요. 저는 미국인이지만 한국식으로 배웠기 때문에 친구한테든 선생님한테든 한국 방식대로 하는 거예요.”◆“전 코리안-아메리칸이니까요”백호씨가 한국문화를 보다 쉽게 받아들인 배경엔 부모의 노력이 있었다. 이민 1세대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던 부모는 대화를 하기 위해 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국어로 된 동화책을 구해 읽어주고 한인 비디오가게에서 한국 어린이 프로그램 비디오를 빌려 매일 틀어줬다. 아버지 백행기씨는 “미국에 사는 많은 한국인 부모들이 자녀에게 한국어를 안 가르쳐요. 그런데 그 가정들은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대화가 없더라고요. 깊은 말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언어적인 소통이 안 되니까 그런 거예요. 우리 부부는 영어를 배우기에 이미 늦었으니까 아이라도 한국어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지난 110여년의 한인 미국이민사를 거치면서 상당수의 한국인 가정은 자녀에게 일부로 한국어를 안 가르쳤다. 영어를 잘해야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반면 백씨 부부의 한글 교육 열정은 유별났다. 백호씨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할 정도였다. 백호씨는 “한국어를 배우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해요. 집에서도 매일 한국어만 썼거든요.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제가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거예요. 나중에 자연스럽게 크면서 영어를 배웠어요.”백호씨는 자신이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어를 못하는 애들이 많아요. 그런데 저는 한국어를 잘하는 편이어서 엄청 다행이죠.”그는 향후 한국과 미국 두 나라 모두를 돕고 싶다고 했다. “전 어쩔 수 없이 미국에서 태어났고 미국 시민권자예요. 그래도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우선은 이 나라(미국)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거예요. 그러다가 한국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돕고 싶어요. 두 나라 중 특정한 국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요. 전 코리안-아메리칸이니까요.” 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공동기획:인문사회연구소, 경상북도백행기·오명순씨 부부는 1989년 공무원 재직 시절 만나 미국으로 이민간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들 백호씨(맨 왼쪽)를 낳았다. 왼쪽 위의 사진은 등에 태극기와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이 찍혀있고 앞에는 ‘COREA’라고 적혀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는 백호씨의 모습.
2017.08.14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6. 가족초청 美이민 허인희·백복련 씨 부부
“자꾸 친구들이 옆에서 미국 못 가게 하는데 그래도 우얍니꺼. 가족이 가는데 안 갈 수가 있습니꺼.” 먼저 미국에 가 있던 여동생의 초청으로 이민을 결심했다. 1960~80년대 가족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간 많은 이들이 그랬듯 사전에 이민을 준비할 여력은 없었다. 미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할 줄 아는 영어라곤 ‘헬로’ ‘땡큐’ ‘쏘리’가 전부였다. 순전히 가족들에만 의지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해서는 언어장벽으로 인해 ‘미국 속 작은 한국’만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영어를 배울 일이 없어 지금도 영어와는 거리가 멀다.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 6화는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간 한 대구·경북 가족의 이야기다.◆대구에서 연을 맺은 부부허인희씨(79). 대구가 고향인 아버지는 어머니와 일본으로 건너가 고물장사를 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일꾼이 2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허씨는 일본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허씨 부친은 광복 후 직원들을 모조리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허씨가 8세 되던 해였다. 노름을 즐기느라 힘들게 번 돈을 다 날려버린 아버지는 1959년 허씨가 해병대를 제대한 이후 돌아가셨다. 허씨는 대구 중구의 한 주물공장에 다니며 선친의 빈 자리를 메웠다.김천 성내동 출신의 아내 백복련씨(78)와는 그 무렵 만났다. 백씨는 딸 넷 있는 집의 셋째딸이었다. 19세 되던 해 동네 아주머니의 추천으로 대구 서구 비산동 한 가정집에서 베 짜는 일을 시작했다.“베틀이 한 10대 정도 될끼라예. 참말로 베 많이 짰구마. 그때만 해도 김천은 촌이지예. 그래도 나는 대구 와서 안 돌아댕기고 공장에서 일만 했어예.”백씨가 25세 되던 해 지인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3년가량 연애 후 결혼했다. 신혼방은 대구시 북구에 차렸다. 아들 하나를 낳고 결혼식을 올린 뒤 아들 둘을 더 낳았다.그 사이 허씨는 영남주물공장에 취직했다. “월급을 3개월씩 밀려서 받았거든예. 조금씩 가불해서 쓰다 보면 정작 월급날 받을 돈이 없었어예.” 주물공장 다니는 남편과 베 짜는 아내. 이들은 결혼한 지 20여 년이 지난 1987년 9월18일 세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날은 허씨의 49번째 양력 생일이었다.◆이민가방 10개…“최대한 많이 싸!”1980년대 중반. 50대를 목전에 두고 있던 허씨는 갑작스레 직장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여동생은 허씨네 가족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주한미군과 결혼한 여동생은 미국 시애틀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세 아들 중 첫째는 막 20대에 접어들었고 둘째는 17세, 막내는 15세였다.백씨의 지인들은 “미국 가지 마레이. 거기는 한국사람도 없고 아저씨도 못 만난다”며 만류했다. “자꾸 나를 못 가게 하는 거라예. 그래도 가족들이 가는데 안 갈 수가 있나 카면서 왔지예.”첫 해외여행이자 첫 이민. 다섯 가족의 머릿속엔 ‘짐을 최대한 많이 싸야 된다’는 생각으로 꽉찼다. 한 사람당 가방 두 개까지 가지고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민가방 10개를 구했다. 그 중 한 가방엔 라면만 잔뜩 넣었다. “해외여행을 가 본 적도 없고 아무것도 몰랐지예. 미국 가면 먹을 게 없다고 해서 라면만 몇 박스를 샀는지 몰라예. 하와이에서 가방 검사하는데 조사원이 라면 보고 웃더라니까.”김포공항에서 일본, 미국 하와이를 거쳐 LA, 시애틀로 가는 일정. 처음 오른 미국행 여정은 시작부터 고됐다. 힘들게 미국에 왔지만 그곳에서도 일자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미국에 와서 취직을 하려는데 마음처럼 안 되더라고요. 사과 따러 며칠 동안 워싱턴까지 갔다가 돈은 못 벌고 길 위에서 고생만 하고 오기도 했어예.”시애틀에 도착한 지 약 두 달. 계속 일자리를 못 구해 헤매던 허씨 가족은 하와이에 살고 있던 또 다른 여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하와이로 다시 이주했다. 그곳에서 허씨는 간장 공장, 호텔, 샌드위치 공장, 술집 등에서 일하기 시작했다.그 사이 백씨는 한 한인식당의 주방보조 자리를 구했고 그 식당에서만 약 20년간 일했다. 평일과 주말 가리지 않고 일손이 필요하다면 일하러 갔다. 일흔이 돼서야 일을 그만뒀다.◆“영어 몰라도 상관없어예”“영어라 카는 거는 지금까지도 일절 몰라예.” 부부 중 특히 백씨는 지금까지도 지극히 한국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한인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파마를 할 때는 한인이 운영하는 미용실을 찾는다. 그 때문인지 백씨의 머리스타일은 여느 한국 노년 여성들과 비슷하다. 병원 진료를 받을 때도 병원 내 한국어 통역관을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현재 거주하는 노인아파트에는 한국인 세대가 일부 있어 그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이 때문에 하루 중 영어를 사용할 일은 거의 없다.“여기는예, 한국사람이 많아서 영어 몬해도 됩니더. 쪼매 답답할 때도 있는데예, 그래도 어딜 가든 한국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살 만해예.”막막한 미국생활에 가족은 든든한 힘이 됐다. 세 아들은 객지에서 힘들게 돈 버는 부모를 열심히 도왔다. “우리 애들이 미국 와서 고생 많이 했어예. 주말 아침에 채소 팔러 나간다고 하면 셋 다 그거 도와주겠다고 나서고, 막내는 남의 식당 가서 불판 닦고…. 부모 힘들다고 애들이 일을 계속 해서 그런가 친구들보다 영어를 못 한다 아입니꺼. 힘들 때는 10달러만 달라는 것도 못 줘가지고. 이게 자꾸 내 마음에 남습니더.” 백씨가 말했다.허씨는 “인생 돌이켜보면 고생한 것밖에 없는데 이제는 아무 생각없심더. 우리 가족 먹고사는 걱정만 하면 되니까 고민도 없고예.” 글·사진=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공동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허인희·백복련씨 부부는 50대가 가까이 돼서야 가족초청으로 미국땅에 발을 들였다. 부부는 이민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짙은 경상도 방언을 구사했다. 중앙은 허인희씨 가족 첫 여권 사진.
2017.08.08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5. ‘위장결혼’ 김왕자씨 “별천지 상상하고 온 미국 ‘절망’…지금은 부동산업으로 안정”
‘王’. 김왕자씨(74)의 도미(渡美) 계기가 된 한 글자다. 이발소에서 만난 화교 남성 왕모씨는 왕자씨의 이름에 자신의 성씨 ‘왕(王)’자가 들어가는 것을 운명이라 믿었다.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왕자씨를 잊지 못해 그를 데려가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이미 가정이 있던 왕씨는 대안으로 위장결혼을 제안했다. 왕자씨는 왕씨가 돈 주고 포섭한 중국계 미국인과 결혼하는 것처럼 꾸며 미국 비자를 발급받았다. 미국행 점보여객기에 오르기 전, 왕자씨의 머릿속은 환상의 나라 미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 5화는 위장결혼으로 미국에 건너간 어느 대구·경북 여성의 이야기다. 渡美 9개월만에 동거남과 이혼 고달픈 현실에 자살까지 생각 어느날 일이라도 해보자 결심 식당 전전 하루벌어 하루살아 한의원에서 근무할땐 영어 한마디도 몰라 눈치로 버텨◆‘왕(王)’자로 맺어진 운명김왕자(金王子). 아들에게나 지어줄 법한 이름 탓에 집에서는 왕(王)자에 점 하나만 찍어 옥(玉)자나 옥희라고 불렀다. 대구 안심면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총각 시절 일자리를 구하러 일본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서 살림을 차렸다. 왕자씨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10남매 중 셋째, 자매 중 맏이였다.왕자씨가 4세 되던 해 가족들은 한국으로 왔다. 유년시절 아버지는 왕자씨를 자주 때렸다. 16세의 왕자씨는 아버지를 피해 빨간 치마와 하얀 적삼을 입고 서울로 도망쳤다. 당시 친오빠와 수양오빠가 서울에 살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남의 집에서 아기 돌보는 일을 했다. 일하러 간 곳 중에는 김응용 전 프로야구감독의 집도 끼어 있었다. “나는 18세, 김 전 감독은 20대 초반이었어. 야구가 뭔지도 몰랐는데 그 집에만 가면 그 양반이 작은 방 안에서 뭘 휘휘 내두르더라고. 나중에 신문을 보니까 그 사람이 야구선수였던 거야.”가사도우미로 이집 저집 떠돌던 왕자씨는 이발사였던 수양오빠를 따라 이발소에서 면도사로 일했다. 그곳에서 첫 번째 남편 탁모씨를 만났다. 짧은 인연이었다. 결혼한 지 4년, 왕자씨 나이 23세에 탁씨는 사망했다.이후 화교 출신의 왕모씨를 만났다. 그는 왕자씨의 이름에 자신의 성씨 ‘왕(王)’자가 들어간다는 점을 알고 난 후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미 가정도 있었고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간 후였지만 왕자씨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제안한 게 위장결혼. “자기 성씨랑 내 이름 ‘왕’자가 똑같으니까 운명이라고 믿었나봐. 목숨 걸고 나를 미국에 데려가겠다 하더라고.”◆위장결혼으로 미국에 입성하다위장결혼. 겁은 났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국행은 왕자씨도 내심 바라던 바였다. 왕씨는 적극적으로 왕자씨의 미국 위장결혼을 주도했다. 계약 결혼할 중국계 미국 남성을 구해 1974년 6월 한국으로 보냈다. 왕자씨가 위장결혼할 상대 신모씨였다.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허위로 결혼식을 치르고 웨딩사진을 찍었다. 신씨와 나이차가 22세나 난 탓에 이민 수속을 밟는 중에도 여러 번 의심을 받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위장결혼 1년 뒤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왕씨가 돈 주고 신씨랑 계약한 거지. 70년대 중반엔 위장결혼이 흔했거든. 신문을 보면 미국에 가려고 계약 결혼하다가 적발됐다는 기사도 많이 나왔어.”미국의 현실은 상상 속 별천지와 너무 달랐다. 믿었던 왕씨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왕씨가 돈을 많이 버는 줄 알았어. 그런데 와서 보니까 호텔 도어맨인 거야. 자기 입에도 풀칠하기 바쁜데 어떻게 날 도와주겠어.”신씨와의 동거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예민했던 신씨는 왕자씨가 조금만 소음을 내도 성질을 부렸다. 언어가 안 통해 외출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7개월. 집에서만 세월을 보냈다.“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직장도, 돈도 없고 영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금문교에 가서 죽어버릴까 생각도 자주 했는데 어딘지를 몰라서 못 죽었어.”◆애증의 나라, 미국절망 속에 빠져있던 왕자씨를 바꾼 건 한순간의 생각이었다. “어느 날 집 앞 공원을 걷는데 햇살이 너무 눈부신 거야. 그때 ‘일이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지.” 처음 취직한 곳은 한 일식당이었다. 그 사이 신씨와는 동거 9개월 만에 이혼했다. 왕씨에게도 결별을 통보했다. 일식당에서 나와 중식당, 안경장사, 가정도우미, 한의원 보조 등의 일을 했다. 길게는 하루 9시간씩 근무했다.돈을 벌지 않으면 굶어야 했다. 매일 일을 해야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도 원하는 대로 낳기 힘들었다. 신씨 이후 두 명과 결혼했지만 임신할 때마다 아이를 지우길 반복했다. 그렇게 받은 낙태수술이 모두 7번. “매일 돈 벌러 다니니까 애를 돌볼 시간도 없고 봐 줄 사람도 없잖아. 애 엄마인 걸 알면 일자리도 못 구해. 어쩔 수가 없었던 거야. 당장 내가 먹고 살려면 애를 지워야했던 거지.”치열하게 일하면서 눈치는 저절로 빨라졌다. “객지에서 살면서 배운 거라곤 눈치 말고 더 있겠어. 영어 모르는 걸 티낼 수는 없잖아. 한의원에서 일할 때 전화로 주소를 불러주는데 스펠링을 모르니까 발음하는 대로 한글로 다 받아 적은 거야. 그렇게 해서 물건을 보내고 그랬어.”오늘날 왕자씨에게 미국은 ‘애증의 나라’로 기억돼 있다. “여기 와서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에요. 지나고 나니까 이제야 추억이 되고 행복했던 기억만 남지. 지금은 부동산업을 하면서 편하게 살고 있어요. 그래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미국엔 안 올거야 나는.” 글·사진=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김왕자씨는 자신을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위장결혼으로 미국에 입국할 때 “하늘에서 돈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왼쪽 상단은 김왕자씨의 위장결혼식 때 사진.
2017.07.26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4. 한인 사업가 김시면씨 가발·염색사업으로 성공가도…맨몸으로 이룬 ‘아메리칸 드림’
땡전 한 푼 없이 미국에 왔다. 주머니는 텅텅 비어있었지만 가슴속 ‘아메리칸 드림’의 열망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다. 한국은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굶주린 배를 쥐어잡고 살던 나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기회의 땅’ 미국에 몸을 던졌다. 초창기 사업들은 아픈 패배감을 안겨줬다. 하지만 다가온 기회들을 놓치지 않았고, 오늘날 미주동포를 대표하는 한인 사업가가 됐다.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 4화는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간 대구·경북민의 이야기다.◆아, 꿈의 나라 아메리카!매일 버텨야 했다. 일제의 그늘은 점차 걷혀가고 있었지만 사는 건 똑같이 형편없었다. 동네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다리가 비틀어진 채 죽어나갔다. 하루 한 끼 굶는 일은 예사였다. 김시면씨(81)는 그 시기 안동시 임동면 지례동에서 태어났다. 1936년 3월1일 6남매 중 첫째였다. 7살 터울의 바로 아래 동생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었다. 전기기술자였던 김씨의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아 전국을 떠돈 탓에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 건 김씨. 하루는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어머니가 동생을 낳았고, 김씨가 대문에 금줄을 매달았다.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 남산동으로 이주했다.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당대 수재들이 모여있다는 대구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성장기를 거치며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 ‘한국에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였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인력과 기술이 있어도 돈과 물자가 부족해 사업으로 성공하기 힘들었다.군대 시절 휴가 때 만난 지금의 아내 김옥자씨는 한국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친오빠가 보건사회부 이민국장으로 있었던 옥자씨는 김씨에게 미국 유학 이야기를 종종 꺼냈다. 그렇게 도미(渡美)의 꿈은 구체화돼 갔고 가슴속 ‘아메리칸 드림’은 더욱 커졌다. 김씨는 군 제대와 동시에 외무부 유학시험을 봐 합격했다. 정부에선 양식을 먹는 방법, 머리에 접시를 얹고 춤추는 방법 등을 가르쳐줬다.“1960년대 초 우리나라 GNP가 겨우 50달러였어요. 4층짜리 반도호텔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니까 얼마나 가난했소. 한국에서는 도저히 성공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미국 갈 때도 다시 한국에 돌아갈 생각 없었어요.”◆땡전 한 푼 없이 시작한 유학1961년 김씨는 그토록 바라던 미국 땅에 발을 들였다. 인생을 다시 꾸려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단 한 푼도 없이 왔다.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은 LA. “내가 왜 LA에 정착했느냐. 기후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곳이 도산 안창호 선생부터 시작해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요람이라는 거죠. 한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지역이 LA였기 때문에 여기로 왔어요.”1961년 무일푼으로 LA에 정착고철수입·한약판매 사업 실패아내 옥자씨 권유로 가발사업1975년 성남시에 공장도 차려GNP 75달러 열악하던 시절 韓정부에 5만달러 기부하기도한미동포재단 이사장 등 역임캄캄한 밤에 도착해 LA 비행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미국 주재 한국총영사였다. 운이 좋았다. 총영사의 소개로 만난 한인유학생회장은 자신의 집 인근 숙박업소에 김씨를 재워줬다. 또 도산 안창호가 조직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건물에서 묵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는 그곳에서 페인트칠을 하며 방값을 갈음했다.LA 남가주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일을 병행했다. 기차에 실려 온 짐을 트럭으로 옮겨 싣는 일이었다. “체격이 좋아 보여야 뽑히니까 면접 때 어깨에 뽕 넣고 가고 그랬지. 제대로 못 먹고 일하니까 힘이 없잖아요. 배 위에다가 짐을 얹어서 나르다 보니 나중에 확인해 보면 배가 온통 긁혀있기도 했죠.” 이후 유대인이 운영하던 수출입회사에 취직했다.그사이 옥자씨가 미국으로 건너왔고 결혼식을 올렸다. ‘기회의 땅’에 정착했다는 사실 자체로 설레던 시절이었다.◆‘아메리칸 드림’ 꿈을 이루다이민 초기 ‘아메리칸 드림’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쟁 후 한국에 남은 고철 덩어리를 수입해 판매하는 일, 한약 도매상 등을 전전했지만 하는 일마다 헛방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가발가게에서 일하던 아내는 가발업의 전망이 밝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가발을 패션 아이템으로 여겨 여러 개씩 소유하고 있었다. “처음엔 아내가 기계 두 대 갖다 놓고 ‘네 머리 잘라서 가져오면 원하는 스타일의 가발을 만들어주겠다’고 시작한 거죠. 그렇게 돈 벌면서 한국에서 엿이랑 바꾼 머리카락 수입해 오고 도매로 무역을 하게 됐죠.”회사명은 시즈통상. 1970년에는 경기도 성남시에 공장까지 차렸다. 공장이 세워지자 인근 주민들은 일자리를 달라며 몰려들었다. “성남 주민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 모두 서로 살겠다고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몰라요. 한국 비행장에 내리면 가발사업을 하겠다고 사람들이 새카맣게 몰려왔어요. 정말 비참할 때였어요.”김씨는 이 사업을 계기로 ‘아메리칸 드림’을 달성했다. 이민 10년 뒤 가발사업으로 번 돈 5만달러를 정부에 기부했다. 우리나라 GNP가 75달러에 불과하던 때다. 또 해외교포가 조국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조국에 드리는 탑’을 김포국제공항에 세우기도 했다. 그의 성공기는 아직도 미국 한인사회 내에서 회자되고 있다.가발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그는 의류염색사업을 시작했다. 유년기 대구에서 봤던 염색공장이 영향을 미쳤다. “대구에서 자라면 염색공장 한 번씩 보잖아요. 그때 미국에 있던 한인들이 의복사업을 많이 했는데 갑자기 염색공장이 떠오르더라고.”김씨는 한미동포재단 이사장, 한미역사유물보존회 회장 등을 맡아 미주 한인사회를 위해서도 힘썼다. 공로를 인정받아 지금껏 표창장 13개를 받았다.“한국은 객지 같은 고향이지. 풍습이나 생활방식이 다 다르니까 거기(한국)서는 내가 먹히질 않아요. 친구들이랑 대화도 통하지 않고 말이야. 생각이 다르니까 안 돼.” 글·사진=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상북도, 인문사회연구소※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지난달 8일 LA에서 김시면씨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성공한 과정을 들려주며 “사는 건 고달팠지만 마음만은 힘들지 않았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2017.07.19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3. 유학이민 최영호 하와이대 명예교수 “미국 속 한국 유지하려면 한인커뮤니티 애국심 위주 탈피해야”
‘아이들이 세계 무대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세요.’소년의 아버지는 매일 이렇게 기도했다. 하지만 경산의 가난한 시골집에서 자란 그에게 ‘세계 무대’란 요원한 환상이었다. 당장 하루하루를 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러다 청년기에 우연히 얻게 된 유학의 기회는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놨다. 달랑 30달러를 들고 떠난 미국 유학생활을 거쳐 그는 훗날 미주 한인 이민사 및 독립운동사 분야의 촉망받는 학자가 됐다. 백발의 노인이 된 소년은 “미국 유학은 제2의 인생을 열어준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 3화는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가 학자가 된 어느 대구·경북민의 이야기다.◆정체성 찾지 못한 소년기최영호(86). 1931년 6월13일 경산군 경산면 중방동 343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과거시험을 보겠다며 빚을 내 서울로 떠난 뒤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교육을 받아 계몽된 사람들이었다.학창시절 최씨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하고 장래를 꿈꿔보지도 못한 채 청소년기를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다닌 초등학교에서는 일본인 선생이 서예 수업시간에 ‘일본정신’ ‘동방예배’ 등을 쓰도록 강요했다. 한때 ‘사람들은 왜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도록 해 달라고 빌지 않을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도 집안일을 거들기 바빴다. 보따리장사를 하러 다닌 어머니를 도와 방학 때마다 부산에서 경산 사과를 팔았다. 부모님이 신문배달소를 운영할 땐 신문배달부를 자처했다.일제시대 유년기 정체성 혼란광복을 맞고서야 한국인 자각6·25전쟁 발발하자 자원 입대군대서 美시인 권유로 유학길하와이대 사학과 교수로 부임한인 이주사·독립운동사 연구청소년 정착 프로그램 운영도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대봉동 소방서에서 일왕이 항복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한복을 입은 한국인 선생님은 태극기를 꺼내 애국가를 가르쳤다. “그때 태극기를 처음 봤어요. 가슴이 꽝 하는 게 ‘아, 내가 한국인이었구나’를 자각하게 되더라고요.”◆우연히 떠나게 된 미국 유학1950년 대구사범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다. 장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고민 없이 시험을 봐 자원입대했다.57년 군대 시절 일본에서 제29차 국제팬클럽(PEN·국제적인 문학가 단체) 세계대회가 열렸다. 당시 영어를 잘했던 최씨는 외국 문인들을 보좌했다. 그 자리에서 미국 시인 ‘제레미 잉갈스’를 만났다. 미국 일리노이주 소재에 한 대학 교수로 있던 제레미는 최씨에게 미국 유학을 제안했다. “그때 나는 미국 유학을 도저히 생각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지. 제레미가 유학할 생각이 없냐고 묻기에 갈 길이 있으면 가고 싶다고 했어.”제레미는 최씨 인생의 제2막을 열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주립대학교 입학허가서를 받았지만 항공권을 살 돈이 없었다. 갈 운명이 아니라며 포기의 기로에 서 있던 때 이모들의 도움으로 비행기 삯을 마련했다. 은행에서 급하게 30달러를 환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미국 유학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맞은 계기였어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감도 전혀 없었고 장래를 꿈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말 그대로 미국 유학으로 삶이 변했죠.”◆하와이로 건너와 꽃핀 인생최씨의 인생은 1970년 하와이로 건너오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와이주립대 역사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는데, 그는 이때부터 한국인의 미주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65년 신이민법 제정으로 한국인이 미국에 몰려들어 오는데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한국인 이민사가 거의 정리돼 있지 않은 거예요.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연구자도 없었고요. 나라도 해야겠다 싶었죠.”최씨는 하와이 이민 초기(1900년대 초)와 중기(1965년 이후)의 한인 이민사 자료를 수집했고 드러나지 않았던 한인 독립운동사를 발굴했다. 연구에 힘 쏟은 결과 오늘날까지 미국 내에서 미주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정통한 몇 안 되는 학자로 꼽힌다.최씨는 또한 1970년대 한인 청소년들이 미국사회에 순조롭게 정착할 수 있도록 청소년 프로그램을 개설·운영했다. “한국이 미국에 비해 경제여건이 안 좋던 때니까 아이들은 영어도 못 배우고 부모 따라 오는 거예요. 부모는 밤낮으로 일하니까 돌볼 수도 없었고요. 한국 학생들이 조직을 만들어 협박하거나 돈을 빼앗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이 아이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그는 한인인권투쟁위원회를 만들어 70년대 한인차별반대운동도 전개했다.오랜 기간 한국인의 미국 정착사를 관찰하고 경험해 온 그는 한인사회에 대한 인식 변화 과정을 설명했다. “8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인들이 스스로 ‘한국인인 게 부끄럽다’고 말했는데 88올림픽을 거치면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됐죠. 차차 좋아지다가 2002년 월드컵이 완전히 제압을 했어요.”최씨는 앞으로 한인커뮤니티의 정의가 다양해져야 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한국어를 구사하거나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들이 한인커뮤니티에 속했죠. 하지만 앞으로는 그 정의가 다양화돼야 ‘미국 속의 한국’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가 가졌던 민족주의, 애국심에서 벗어나 문화·사상·사회적으로 국제화된 개념의 한인커뮤니티를 재정립해야 됩니다.” 글=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상북도, 인문사회연구소※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지난 5월 최영호 전 하와이대 명예교수(왼쪽)를 만났다. 최 전 교수는 미국에서 한인이민사 및 독립운동사에 정통한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오른쪽은 부인 김민자씨.
2017.07.10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2. 주한미군 결혼이민 황남희씨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는 장녀를 쥐잡듯이 잡았다. 공부를 못하도록 책을 찢고 술 심부름까지 시켰다. 삶이 지긋지긋했다. 어느날 친구 엄마가 말했다. “미국 가서 살아라.” 귀가 솔깃했다. 지옥 같은 한국을 탈출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꿈만 같았다.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 2화는 주한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정착한 한 한인 여성의 이야기다.친구엄마 소개로 주한미군 만나애정없는 생활 10년도 안돼 이혼남편이 키우는 아이 양육비 위해점원·청소 등 하루 16시간 일해15년 만에 밟은 고국의 땅 감회어린시절 못 느끼던 情 느껴져◆아들 바라던 집안에 태어난 첫째딸이름은 황남희(59). 아버지의 고향은 안동 와룡면 와룡리다. 산에서 돌을 깨던 아버지는 전처와의 사이에 딸 둘을 낳았다. 아들을 바라며 어머니와 재혼했지만 다시 딸이 태어났다. 바로 남희씨였다. 그는 유년기 내내 아버지의 미움을 받았다. 매일 같이 술을 사오라고 했다. 책을 찢거나 불질러 학교에 못 가는 일도 잦았다. 명절에 부침개를 부치고 있으면 그의 아버지는 애써 만든 걸 다 던져버렸다. 하루는 연탄불을 남희씨에게 던졌는데 연탄이 궁둥이에 눌어붙어 한동안 앉지도 눕지도 못했다.그러다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늘 동생을 방에 데리고 들어가 안은 채 잠들었다. 100원짜리 지폐로 동생의 엉덩이를 닦아주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어머니는 남희씨를 아버지와 떼어놓으려 중학생이던 그를 서울 먼 친척집에 식모살이로 보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그 집을 나와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좋은 사람을 찾아 결혼하면 삶이 편해질까’하는 생각에 다시 대구에 왔다. 처음 들른 곳이 친구 집. 친구 엄마가 말했다. “남희야,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미국사람 만나서 미국 가서 편하게 살아라.” 어지럽던 삶의 답을 찾았다. ‘한국 땅을 벗어나자!’◆한국을 벗어나자!친구 엄마는 미군부대(대구시 남구 봉덕동)에서 일하던 한 주한미군을 소개해 줬다. ‘헬로(hello)’도 할 줄 몰랐다. 다행히 남편이 한국어를 조금 했다. 당시 그에게 애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집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첫 번째이자 마지막 목표였다.미국인과 결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열아홉 살. 국제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보호자의 인감도장이 필요했다. 출국 날짜가 다가오자 급한 마음에 배 다른 둘째 언니에게 “결혼해야 되니 언니 이름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미워하던 둘째 언니는 선뜻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당시 경찰과 결혼한 상태였지만 남희씨의 결혼을 위해 형부와 서류상 이혼을 했다.결혼 후 대구에서 약 2년 동안 살면서 첫 딸을 낳았다. 1984년 7월21일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미국에 도착했다. 새 삶이 펼쳐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혼을 둘째 언니 이름 ‘순화’로 한 탓에 남희씨의 모든 미국 기록물에는 언니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남희’는 한국 서류상 아직 미혼이다.애정을 쌓지 못한 남편과는 10년도 안 돼 이혼했다. 그 사이 아들을 낳았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기나 해, 아님 말이라도 잘 통해, 서로 속마음도 모르고 겉으로만 사는 거였죠. 집에서 한국음식 만들면 냄새 난다고 얼마나 싫어했는데요.”◆고단했던 미국에서의 삶미국에서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 뉴욕에 발디딘 순간을 떠올리자 한숨부터 나왔다.도착과 동시에 소시지 공장에 취업했다. 한국 사람은 남희씨 혼자였다. 오전 5시에 출근해 오후 7시에 돌아왔다. 일주일 중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했다. 직원 대부분이 흑인이었는데, 영어를 못해 그들과의 대화는 꿈도 꾸기 힘들었다.소시지 공장에서 3년 일하고 둘째아들이 한 살 될 무렵 플로리다로 이사했다. 이혼하면서 아이들은 남편이 키우고, 남희씨는 양육비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 지인을 따라 하와이로 옮긴 뒤 양육비 월 300달러를 벌기 위해 하루 16시간 일했다. 낮에는 8시간 동안 빌딩 청소를 하고 밤에는 식당 점원으로 일했다. 일이 끝나면 새벽 2시. 식당에서 4시간 정도 자고 다시 출근했다. 주말엔 부잣집에서 청소를 했다.미국에서의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지만 한동안 한국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미국에 온 지 15년이 지나서야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에 갔다. 마흔 살 가까이 돼 한국에 가자 어린 시절 느끼지 못한 정이 새삼 느껴졌다. 부모가 엮어주지 않은 배 다른 형제들과도 마음을 텄다. “일흔살 다 된 언니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좋은데 데려가 주고…. 미국에 온 걸 후회하지 않지만 이제는 한국으로 가고 싶어요.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면서 여유롭게 사는 거지. 돈·명예를 떠나 아프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어요.” 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지난 5월25일 하와이 빅아일랜드에서 황남희씨를 만났다. 인터뷰 도중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황씨는 한국에서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2017.07.04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1. 하와이 인권변호사 에스더 정희 권씨
‘지상낙원의 꿈’이 깨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매일 10시간.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빛을 견디며 자랄만큼 자란 사탕수수를 벴다. 고된 노동 끝에 매달 손에 쥔 돈은 10여달러 남짓. 고향 생각을 잠시도 떨쳐내기 힘들었다. 고국에서 사진신부가 온다는 소식은 마른 땅에 내리는 빗줄기였다. 사진으로 얼굴을 본 신부를 만나 미국에 살림을 차렸다. 미국땅에 한국인 가족이 탄생한 첫 순간이었다. 영남일보는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을 통해 한인 정착기를 들여다볼 예정이다. 동포들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한인사회 형성과정을 7회에 걸쳐 따라간다. 첫 회는 미국 한인 이민사의 시작점인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와 사진신부다.◆“늘 바쁜 사람들”에스더 정희 권(89). 1928년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인권변호사로 생애를 보냈다. 이민법을 전공한 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률지원활동을 했다.다문화 사회에 익숙했던 권씨일본인 배우자 만나 결혼가구 개발로 美특허받은 아버지사업 번창하자 독립운동자금 대어머니는 영남부인회 조직 활동딸 데리고 한국 3·1운동 참여도“돌이켜보면 내 삶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였어요. 어머니가 생전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살아야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지금의 성정은 어머니한테서 온 것 같아요.” 그는 이런 점을 인정받아 92년 하와이 ‘올해의 여성변호사상’을 받았다.정희씨의 어머니는 대구 출신 ‘사진신부’ 이희경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던 이씨는 한국의 여성과 하와이의 남성이 사진교환만으로 혼인하는 사진신부 제도를 택했다. 당시 사진 이외에 출신지, 성격, 나이 등은 알기 힘들었다. 1912년 바다를 건넌 그를 맞은 건 여섯살 연상의 남편 권도인씨. 남편 권씨는 앞선 1905년 2월13일 시베리아호를 타고 하와이로 건너왔다. 당시 17세의 안동 출신 소년은 사탕수수밭에서 일했다. 월급 2달러를 더 받기 위해 나이를 18세라고 속였는데, 결국 들통나 16달러밖에 받지 못했다. 정희씨는 선친이 이 사실을 맘에 담고 평생 동안 아쉬워했다고 회상했다. 대구·경북 출신 부부는 하와이에서 2남2녀를 낳았다. 막내 정희씨는 아버지와 유독 가까웠다.유년시절 부모는 “늘 바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가정을 꾸린 뒤 개인 사업을 준비했다. 1924년 가구 개발로 미국 특허를 받았고 이를 토대로 28년 가구점을 열었다. 나중엔 샌프란시스코에 지점을 낼 정도로 번창했다. “어릴 땐 부모님을 뵙기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교회랑 여성모임에 갔고, 아버지는 공장에 가거나 발명품을 생각하기에 바빴어요.”미국 사회에 뿌리내리려 애쓰던 부모의 빈 자리를 채운 건 장녀 정숙씨. 집에선 ‘두번째 엄마’(second mom)이라고 불렸다.대구·경북 출신의 부부는 독립운동 지원에도 관심을 뒀다. 선친은 사업으로 번 돈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후원했다. 독립운동 지원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지방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치하 언니 정숙씨를 데리고 한국으로 가 3·1운동에도 직접 참여했다. 또 하와이 한인사회 부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28년에는 경상도 출신 부인들로 구성된 영남부인회를 조직했다.◆한국과 미국의 갈림길 선 자녀들권도인·이희경씨 부부가 하와이에 뿌리를 내리는 동안 자녀들은 서로 다른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자랐다. 늦게 태어난 영철·정희씨 남매는 ‘다문화 사회’에 더 익숙해졌다.셋째인 영철씨는 “학교에 들어갔는데 학생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일본인, 하와이 원주민, 필리핀인이 조금씩 있는거예요. 그땐 영어를 배우려고 모였다고만 생각했죠. 점차 다문화를 경험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했어요. 결국 내가 살아야되는 건 한국이 아닌 미국의 다문화사회였으니까요”라고 했다. 정희씨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그나마 있던 한국어 교육기관들도 문을 닫았어요. 한국 식료품점은 물론 라디오방송도 없었고요. 한국인과 미국인의 경계에 있던 우리는 미국 사회에 더 섞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했다.배우자를 택하는 것도 손위 남매와 달랐다. 생전 일본인과의 결혼을 용납하지 않았던 어머니로 인해 정숙·영만씨는 한국인과 결혼했다. 하지만 영철·정희씨 남매는 일본인 배우자를 만났다. 정희씨는 “작은 오빠(영철)와 저는 당시 하와이에 한국인이 너무 없어 일본인과 결혼했는데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불가능했겠죠. 일본인과 결혼하면서 한국인으로 남을거냐, 일본인으로 살거냐를 선택받았는데 우리 부부는 그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말했다.하지만 수 년 전 아버지의 생전 나이와 비슷해지자 정희씨는 점차 한국에 대한 애착을 느끼기 시작했다. “2012년 한국에 갔을 때 한국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을 거고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우리 부모가 대구·경북민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나한테는 굉장히 중요해졌어요”. 글·사진=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상북도, 인문사회연구소※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지난 5월28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권영철·정희 남매를 만났다. 남매는 대화 중 “아이고 죽겠다” 라고 하는 등 이따금씩 한국어를 사용하기도 했다.권도인·이희경 부부. 권씨는 양복, 이씨는 한복을 입고 있다.아버지 권도인과 장녀 정숙씨.
2017.06.26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3부·끝> 김설화 백두산 조선족 양로원장
연변대 의학원서 임상의학 전공고국 그리워하는 어르신들 위해어머니 이어 양로원 원장직 맡아“고향의 흙을 한국서 보내줬으면”일제강점기, 일본의 강압에 떠밀려 중국으로 온 이들의 손주뻘인 조선족 3세들이 중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2세대의 경우 한국에서 태어나 함께 중국으로 간 경우도 있지만, 3세대는 거의 대부분 중국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이들은 한국말을 할 수는 있지만 중국어가 더 편하다.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급하면 중국말이 튀어나오는 식이다. 더욱이 조선족 학교가 점점 사라지다 보니 한국문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벅찬 상황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조선족 3세대들은 한국의 문화를 지키며,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끊어질 것 같은 고국과의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중에는 여성들도 적지 않다. 김설화 원장(39)도 그중 한 명이다. 김 원장은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조선족 어르신을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모시는 백두산조선족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다. 구미가 고향인 김 원장의 외할머니는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있을 정도로 ‘배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일본의 강압은 더 견디기 힘들었고, 그렇게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도망쳤다. 중국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은 강했다. 김 원장의 어머니는 8남매. 이 중 6명이 중국에서 대학 공부까지 마쳤다. 조선족 3세인 김 원장이 외할머니의 고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끊임없이 한국사람이라는 것, 같은 핏줄인 한국사람에 대한 동포애를 강조했던 것만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교육은 연변대학 의학원에서 임상의학을 전공해 의사로 편하고 보장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그를 조선족 어르신들을 모시는 양로원장으로 이끈 힘이 됐다. 백두산조선족양로원을 처음 만들어 초대 원장을 지낸 김 원장의 어머니 손옥남씨(66). 중국 내 한 사범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5년 정도 일한 어머니 손씨는 퇴직 후 사업자등록증 등을 발급하는 공사국으로 옮겨 부국장까지 올랐다. 이후 2002년 퇴직해 2006년 지금의 양로원을 설립했다. 그는 딸을 의대로 보냈지만 의사로 키울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의사인 딸이 양로원에 계신 동포 어르신들을 잘 치료해줄 수 있길 기대했으며 졸업하자마자 양로원장 자리를 넘겨줬다. 김 원장은 “조선족 1, 2세대의 경우 고국을 그리워하다가 결국 중국에서 생을 마감하는 수가 많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거나 혼자 남겨진 경우도 많아 외로운 말년을 보낸다. 이를 오랫동안 지켜본 어머니는 2년 동안 준비를 거쳐 양로원을 설립했고, 내가 의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이를 이어받게 했다”며 “나 자신만 생각하면 의학원 졸업 후 의사로 일하는게 더 좋지만, 어머니가 동포 어르신들을 이어받아야 한다며 원장직을 맡으라고 했고 나도 주저없이 동의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의 양로원에는 170여명의 조선족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다. 103세 할머니가 최고령이다. 중국 정부의 지원 없이 이곳에 사는 어르신들이 내는 돈과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운영하고 있다. 100% 조선족만 받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홈페이지도 한글로 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추석, 단오 등을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고 김치, 송편 등의 음식도 함께 만들어 먹고 있다. 이곳 어르신들은 고향의 풍경이 담긴 사진을 많이 찾는다. 김 원장은 신문사나 잡지사 등을 통해 어르신들이 살았다는 고향의 예전 모습과 지금 모습을 담은 사진을 구해 보여주기도 한다. 몸이 불편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하는 어르신들에게 사진으로나마 고국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다. 그러다보니 적지 않은 사진이 모였고, 조금 더 모이면 전시회도 열 계획이다.“어르신 중에 고향이 대구·경북인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의 고향 사진도 좋고 그 곳의 흙도 좋고 조금씩 양로원으로 담아 보내 주면 그들이 생을 마감할 때 외롭지 않게 함께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문사도 좋고 행정기관도 좋고 이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80% 이상이 치매를 앓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이 살던 고향과 가족 이야기는 종종 합니다. 고국 땅을 밟을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게 도와드리는 일에 힘을 보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인호기자 sun@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지원을 받았습니다.>백두산조선족양로원의 최장수 어르신은 올해로 103세다. 100세 생일 때는 특별한 이벤트도 진행하고 있다. 2014년 100세 생일을 맞은 한 어르신의 생일잔치에서 관계자들이 어르신들에게 큰절을 하고 있다.
2016.11.03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3부> 1. 권순기 베이징상립대투자고문유한공사 회장
안동권씨 집안의 장손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 땅에 묻혔다.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잠시 중국으로 몸을 피한다는 것이 생이별의 시작이었다. 반드시 돌아온다는 생각에 고향땅에 장남도 두고 떠났는데 결국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린성의 목재상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본인 사장 밑에서 목숨을 걸고 일을 하면서도, 중국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두 딸에게는 한국인이 지켜야 할 것, 그리고 양반이 갖춰야 할 도리에 대한 교육을 한시도 놓치지 않았다. 컨설팅 업체인 베이징상립대투자고문유한공사 권순기 회장(59)의 아버지 이야기다. 권 회장 아버지 日 징집 피해서 중국 지린성으로 왔다 귀국못해 타국서 ‘한국의 핏줄’늘 가르쳐 지린성의 요직 두루 거친 권회장 中 진출 한국 기업에는 ‘해결사’ 컨설팅 등 통해 성공 투자 이끌어 연간 매출만 1억6천만 달러 기록“조국은 중국” 양국의 상생 강조권 회장의 아버지는 191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안동권씨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장손이었다. 일본의 강제 징집을 피해 1939년 중국 지린성으로 몸을 피했다. 대륙 침략을 위해 1931년 9월 만주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한 일본은 이후 1937년 7월 베이징 교외에서 일어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의 작은 사건을 빌미로 중국 내륙지역을 공격하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길어지자 군인을 충원하기 위해 식민지였던 한국의 청년들을 강제징집한 시기였다. 권 회장의 할아버지는 ‘장남이 강제징집당하면 대가 끊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네 살난 아들을 떼놓고 중국으로 몸을 피하라고 강권했다. 그렇게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연변에 터를 잡았다. 한국에서 당시 고등학교까지 마친 권 회장의 아버지였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목재를 옮기는 등 막노동밖에 없었다. 일본의 강제징집을 피해왔더니, 사장이 일본 사람이었다.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이 험해 목숨을 잃는 동료도 적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3년을 버텼다. 그렇게 중국말을 어느 정도 익힌 그는 도로 측량과 다리설계 등을 하며 돈을 모았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을 위한 준비를 하는 사이, 1950년 6·25전쟁이 터졌고 고국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정전된 이후 권 회장의 아버지는 이산가족을 찾는 한국의 라디오 방송에 수도 없이 사연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1988년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50년 전 고향 주소로 편지를 보냈고 이를 삼촌이 받기에 이른다. 이후 한국에 남아 있던 아들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40년 가까이 생사를 알 수 없었던 탓에, 고국에서는 그의 생일에 맞춰 10년 가까이 제사를 모시던 때였다. ◆조국은 중국, 그러나 핏줄은 한국지난달 28일 제15차 세계한상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권 회장을 제주도에서 만났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그는 “현재 조국은 중국이지만, 제 몸 속에 흐르는 피는 한국”이라고 말했다. 자라는 동안 아버지로부터 ‘안동권씨 문중’과 ‘양반’이 갖춰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육받았고, 그 안에는 한국인에 대한 긍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현재 그가 하는 일은 중국에 투자하는 외국기업, 특히 한국과 일본 기업인과 중국 간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민간차원이지만, 그는 중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탓일까. 그는 어려운 한국말을 쉽게 구사하면서도 인터뷰 중간 중간 ‘조국은 중국’이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핏줄이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내비쳤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 등도 돕고 있지만, 한국기업의 문제가 해결됐을 때, 투자 이후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지린성 지린시에서 태어난 권 회장은 조선족 소학교를 졸업한 이후 중·고등학교 과정은 중국인 학교를 다녀야 했다. 살던 곳이 워낙 시골이라 조선족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 회장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국 민족, 특히 안동권씨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늘 강조했다. 권씨 집안이 얼마나 뼈대 있는 집안인지, 한국의 양반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늘 강조했다. 권 회장은 지금도 1년에 한 번은 안동을 찾는다. 문중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농촌에서 일하다 중국 문화대혁명 직후 군에 입대한 그는 제대 후 공안국(경찰), 기계공장 총경리, 호텔 사장 등 지린성에서 요직을 거친 뒤 1990년 베이징에 진출했다. 중국 내 소수민족을 관리하는 베이징 민족사무위원회에서 그를 스카우트했고, 위원회 산하 민족개발총공사 부총리(부사장)로 일하며 중국 정부 내 인맥을 쌓았다. 이런 인맥을 바탕으로 권 회장은 1996년 베이징상립대(上立大, 높이 세우고 크게 돕는다)투자고문유한회사를 설립, 20년째 운영하고 있다. 회사 창립 당시 중국에는 컨설팅을 해주는 ‘고문유한회사’라는 명칭 자체가 없을 때였지만, 지금은 중국 주요도시는 물론 서울과 대만·홍콩·일본 등지에 분회를 두고 있다. ◆한국기업의 중국 내 디딤돌 역할할 것현재 그는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기업들의 ‘문제해결사’로 불린다. 현재까지 거래한 한국 기업은 100여곳에 이르고, 30여곳은 현재 컨설팅 중이다. 권 회장은 현대자동차의 중국 진출을 견인했고 LG디스플레이가 광저우시에 40억달러를 투자할 때 이를 중개했다. 또 LS그룹의 장쑤성 우시시 공장설립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삼성그룹, SK, 현대 조선소 등의 중국진출, 그리고 중국과의 합작과정에 빚어진 갈등도 해결했다. SK가 산시성 국영기업과 합작하다 갈라설 때 생긴 여러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해준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 병원의 중국 내 설립, 대학간 교류 등도 성사시켰다. 이렇게 올리는 매출이 연간 1억6천만달러에 이른다.그는 늘어나는 매출보다 중국의 발전과 한국 기업의 동반성장에 도움을 줬다는 것에 더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 창립 당시는 개방 초기라 한국 기업들이 중국의 규정과 사회제도 등을 몰라 많이 실패했다. 이들이 편하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로 창업했다”며 “중국에 투자하고자 하는 여러 나라의 기업을 위해 투자 자문을 하지만, 한국기업 문제를 해결했을 때 같은 핏줄이라 기쁨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을 돕는 데 여생을 바치고 싶다"고 덧붙였다. 권 회장은 한·중 FTA 체결에 따라 보다 많은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FTA 체결 이후 양국이 협력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졌고, 특히 한국의 안전식품이 주목을 받고 있다는게 그의 판단이다. 안전한 식품을 수출할 적기인 만큼 한국의 관련기업이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는 것. 또 중국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건강과 환경 분야도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진출 업종이라고 진단했다. 한류 영향으로 불티나게 팔리는 한국 화장품 공장을 중국에 세워 시장을 공략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조언했다. 권 회장은 “한국은 자원도 적고, 국토도 좁아 너무 어렵다. 북한과의 관계가 지금보다 평화롭게 개선되면 서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도 현재의 민감한 문제를 잘 처리하고 발전적으로 나가면 지금보다 서로가 더 행복해질 것”이라며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찾아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노인호기자 sun@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지원을 받았습니다.>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2016 한중 민간 경제협력 포럼’에 참석한 권순기 회장 일행이 국내 한 대학 관계자들과 의료산업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권 회장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을 돕는 것은 물론 한국 병원의 중국 설립, 대학 간 교류 등에도 도움을 줬다(왼쪽). 권 회장 일행이‘2016 한중 민간 경제협력 포럼’에 참석 후 국내 한 대학병원을 찾아 의료산업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2016 한중 민간 경제협력 포럼’에 참석한 권순기 회장이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운데) 등 한국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포럼의 실무책임은 한중일경제발전협회가 맡았고, 집행회장이 권 회장이다.
2016.10.27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9-끝. 고경필 백두학원 이사장 “배우고 기술 익혀야 日서 무시 안 당한다” 민족학교의 정신 지켜
백두학원 고경필 이사장(69)의 아버지 고시종씨는 열다섯 나이로 일본행 정기선에 올랐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일본의 선진 기술을 배워 가족을 배불리 먹이겠다.’ 그 일념으로 그는 고향을 떠났다. 얼굴도 모른 채 갓 결혼식을 올린 열네살 아내와 함께였다. 일본으로 온 아버지는 금속부품 공장에 들어갔다. 모진 수모를 당했지만 이를 악물고 금속 가공기술을 배웠다. 운 좋게 배운 기술로 회사도 설립했고 규모도 키워나갈 즈음, 고대했던 광복이 됐다. 귀향을 꿈꾸며 버텨온 세월이었지만,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사연은 구구절절 안타깝다.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돌아가리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삶을 다시 꾸려나갔다. 고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벌여놓은 사업과 살던 터전을 버리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살다보니 좋은 날도 왔다. 이후 유모차 등을 제조·판매하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사업은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경기가 나빠지면서 회사도 문을 닫았다. 고 이사장이 고교 1학년이 되던 해였다. 고 이사장의 어린시절은 아버지의 회사가 성장하던 때라 경제적인 어려움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고교 1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의 파산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아르바이트로 가계를 꾸려가야 했다.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제조하던 상품의 일부를 제조하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금속제 가구 제조 업체였다. 회사는 그럭저럭 큰 규모로 성장했고, 지금은 장남에게 물려준 상태다. ◆흰 머리가 되도록 조국을 잊지 말자광복이 되었지만 많은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남은 이들은 ‘백두동지회’를 만들었다. 흰머리가 되도록 조국을 잊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자는 뜻이 담겨있다. 당시 고무공장으로 크게 사업을 번창시킨 제주도 출신의 사업가 조규훈씨가 앞장을 섰다. 공부를 하고 기술을 익혀야 이곳 일본땅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십시일반 돈을 내서 학교를 세웠다. 일본 학교가 아니라 한국 학교를 세워 우리의 것을 제대로 가르치겠다는 뜻이었다.광복돼도 고국에 못가는 사람들십시일반으로 해외 첫 한국학교代이어 이사 역임해 ‘민족 교육’정체성 지키며 日사회 정착 기여설립 및 인허가 순서대로 따져 본다면 해외에서 가장 먼저 동포들의 손으로 세운 학교, 그래서 한국학교라고 불리기보다 민족학교라고 불리는 학교, 백두학원이 운영하는 건국학교다. ‘조국을 건국한다’는 숭고한 소원을 담은 ‘건국’이라는 이름을 따 건국공업학교, 건국고등여자학교로 명명했다. 고 이사장은 “당시 일본에는 100만명 정도가 살았다. 우리말을 쓰지도 못하게 했다. 비록 지금은 일본에 남았지만 남은 사람도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갈 것이다. 그러려면 한국어를 공부해야 한다. 건국고등학교를 세운 이유였다. 조선학교 폐쇄령 이후 128개나 되는 조선학교 중에 정식 사립학교로 일본정부의 인정을 받은 유일한 민족학교였다”고 설명했다.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 내에 거주하던 재일 조선인은 ‘국어 강습소’라는 조선어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교육시설을 전국 각지에 만들었다.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이들은 일본 사회에 동화되지 않는 문제적 집단이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렸다. 운동장과 건물이 있어야 한다는 등의 까다로운 설립 인가 요건도 내세웠다. 한신교육 투쟁이 일어난 배경이다. 건국학원만이 유일하게 인가를 받고 살아남았다.고 이사장의 아버지 고시종씨는 1952년부터 1976년까지 24년간 백두학원의 이사와 상임이사를 역임했으며 고 이사장과 그의 여섯 형제는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고 이사장은 1996년 백두학원이 50주년을 맞던 해 교우회(동창회) 회장이 되어 이사를 역임해 왔다. 부이사장도 9년간 역임했다. 고 이사장은 지난 7월 재일동포 자녀의 교육환경 조성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능력 있는 세계 시민 길러낼 것지난달, 오사카 스미요시의 백두학원을 찾은 날은 일요일이었다. 교문을 들어서자 반가운 한국말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다음날 있을 학교 학예발표회를 앞두고 연습을 위해 휴일인데도 학교를 찾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대강당에서는 전통예술부의 사물놀이 공연 연습이 한창이었다. 건국고등학교 전통예술부 사물놀이 공연팀은 오사카부 대표로, 전국에서 선발된 200여개 팀이 참가하는 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탈 정도의 실력을 자랑한다. 10여년째 오사카부 대표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이들의 정기공연에는 1천여명에 이르는 관객이 몰려든다. 대부분은 재일 한국인들이다. 공연이 끝나면 공연장은 늘 울음바다가 된다. “백두 금강 영봉은 우리의 기상/ 압록 두만 흐름은 우리의 발전/ 금수강산 삼천리 무궁 낙원에/ 문화의 금자탑을 굳게 세우세”백두학원 건국초·중·고등학교의 교가다. 사물놀이 공연이 한창인 체육관의 무대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애국가, 그리고 왼쪽에는 한글로 교가가 새겨진 대형 액자가 걸려있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모두 같은 교가를 부른다. 교가는 초대 교장 이경태 선생의 글에 현제명이 곡을 썼다. 2006년 발간된 백두학원 창립 60주년 기념지 ‘건국’에는 “해방 조국의 새로운 기수들! 평화롭고 부강한, 그리고 문화의 향기 드높은 살기 좋은 낙원, 조선! 원대한 이상과 포부에, 끓어 오르는 정열과, 두 번 다시 식민지 민족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절실한 심정에서 전력을 기울여 탄생한 것이 이 교가”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이사장은 “재건된 조국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문화국가로 인도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민족교육이라는 설립 취지에 따라 70년 동안 민족 정체성을 지키며 동시에 일본 현지 사회에서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면서 “지금까지의 민족교육이 민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국인으로서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 자아의 형성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분야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교양과 능력을 갖춘 세계 시민으로서의 대한의 아들과 딸로 키우는 데 힘을 쏟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인 고 이사장의 국적은 한국이다. 살아있는 동안 국적을 버리지 말라고 당부한 아버지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다. 재일동포 2세로 미야기현 센다이시 출신인 그의 아내 역시 한국인이다. 고 이사장의 집에는 재일동포 5세 어린이가 있다. 이 아이가 스스로 입학하기를 원하는 학교, 그리고 ‘이 학교에서 배우길 잘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민족학교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글·사진=오사카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고경필 백두학원 이사장(왼쪽)이 하태윤 오사카총영사로부터 훈장과 훈장증을 받고 기념 촬영을 했다.
2016.10.18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8. 백진훈 일본 민진당 참의원
백진훈. 그의 일본 이름은 하쿠신쿤이다. 재일동포 2세인 일본 민진당 참의원 백진훈 의원(58)은 지난 7월 치러진 선거에서 3선에 성공했다. ‘아버지의 나라 한국, 어머니의 나라 일본’이라는 홍보 포스터를 내세운 그는 정책 공약으로 평화헌법 수호, 집단자위권 행사 용인과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넓히는 안보법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1958년 도쿄 신주쿠 출신으로 2004년 7월 참의원 선거에 비례로 처음 당선된 그는 2010년 연임 이후 북한 납치문제 등에 관한 특별위원장과 민주당 홍보위원장 등을 맡았다. 일본 참의원 가운데 유일한 한국계다.선친은 경산 출신…日여성과 결혼수교 후 고향방문때 아이처럼 들떠한반도문제 다루는 방송 출연 유명2004년 민주당 비례대표로 첫 당선영주외국인 참정권 부여 법안 추진재일동포 극심한 차별받고 살아그들이 느끼는 슬픔 생각해주길◆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부뿐경산에서 태어난 백 의원의 아버지는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무렵 일본으로 건너왔다. 어렵사리 독학으로 대학에까지 입학했으나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귀국을 하려 했으나 설상가상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일어났다. 돌아갈 길은 막막해졌고 그러다가 아내를 만났다. 백 의원의 어머니는 도쿄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일본인이었다. 딸이 ‘조센징’과 결혼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부모는 없었다. 어머니는 집을 나왔고 곧이어 백 의원을 낳았다. 그렇게 집을 나온 어머니는 백 의원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서야 친정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힘들게 대학에 입학했지만 결국 학업을 마치지 못한 아버지는 좌절했다. 가난에서 벗어나 성공하는 길은 공부뿐이라는 믿음으로 버텼는데 숙명을 이길 순 없었다. 올곧고 완고한 성격의 아버지는 불의와 차별을 견디지 못했고 자주 문제를 일으키면서 해고당했다. 아버지의 직업은 시시때때로 바뀌었고 빚은 늘어갔다. 가난했으나 도움을 줄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외롭고 힘든 세월이었다. 경산 남산면 반곡동. 백 의원은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뒤 함께 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했던 날의 기억을 들려준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수도 적고 좀체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그날 아버지는 마치 소풍 나온 초등학생처럼 들떠서 쉬지 않고 떠들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흥분한 모습을 그는 본 적이 없었다. ◆운동 선수·연예인 아니면 깡패니혼대 건축공학과 대학원을 전 과목 A의 성적으로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백 의원의 꿈은 컸다. 그의 지도교수는 일본 최고 건축회사에 직접 입사 추천까지 해주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그를 면접에서 배제시켰다. 건강검진에서 혈압 수치가 약간 높게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혈압수치는 정상범위 내에서 조금 높았을 뿐 아무런 문제될 것 없는 수준이었다. 낙심한 그에게 누군가가 ‘충고’를 해주었다. “한국사람이 여기서 보통사람처럼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운동 선수나 연예인, 깡패는 될 수 있어도.”“초등학교 입학 때 다른 친구들은 모두 입학통지서가 나오는데 나는 부모님이 손을 잡고 학교에 찾아가서 입학을 ‘허락’받아야 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보이스카우트도 한국인이라고 못 들어갔다. 많은 상처를 받았으나 소수인·외부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어려서부터 익혔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다. 최근에는 조금 달라졌지만 재일한인들은 일본 사회의 차별과 편견 때문에 일류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조차 취업하기가 힘들었다. 자라면서 많은 상처를 받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교포사회의 노력 덕분에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아버지의 나라 한국, 어머니의 나라 일본1994년부터 최근까지 조선일보 일본지사장을 지낸 백 의원은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유명해졌으며, 특히 일본인 납북사건과 관련해 전문가로 단골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렸다. 그러던 중 2003년 말 민주당으로부터 선거 입후보 제의를 받게 됐다. 뜻밖이었다. ‘조센징’이라 불려온 그에게 선거만큼 자신과 무관한 것도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쭉 ‘외국인’으로 살아왔으니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었고 2010·2016년 두 번의 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는 평화헌법 수호와 집단 자위권 반대, 일본인 납북문제 해결, 한·일 우호관계 강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백 의원은 “일본에서는 아직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재일한국인이 스스로 한국인임을 숨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재일한국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선거에 나간 것은 어떤 의미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말했다. 백 의원은 말한다. “한국인임을 숨기고 이 나라 일본에서 생활하는 재일동포를 비난할 수는 없다. 왜 자신의 국적을 숨기면서 비굴하게 사느냐고 비난하거나 한국사람이 한국말도 못하느냐고 비웃기도 한다.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이를 참아내며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가는 재일동포가 고국 동포에게까지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할 때 그들이 느끼는 슬픔이 어떤 것일지 한번 생각해봐 주길 바란다.”그는 20만표 이상을 얻어 당선되었다. 그는 “각자 한 표밖에 없는 소중한 투표권을 한국인인 내게 던졌다는 것은 일본에는 한국과 일본이 손을 맞잡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다. 한국과 일본, 역사적으로 서로 많은 영향을 끼쳐왔던 두 나라의 진정한 우호관계를 위한 가교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재일한국인 2세대, 한일 가교역할 하겠다물론 그의 진심이 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백진훈’의 일본식 표기인 하쿠신쿤을 이름으로 쓰고 있다. 재일동포 대부분은 일본에 귀화하거나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 한국계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백 의원은 그가 참의원이 된 것 자체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거의 매일 차별어가 잔뜩 들어간 e메일을 받고 있다. ‘한국의 스파이’니 ‘공작원’이니 하는 악플도 끊이지 않는다. 그는 그것조차 ‘존재의 의미’라고 해석한다. “숨어서 정치가가 된 것이 아니라서 자랑스럽다”는 그는 투표권이 없더라도 동포 사회가 정치력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 의원은 “영주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외국인이지만 일본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방 참정권을 줌으로써 지역 주민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소속감과 책임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백 의원은 스스로를 ‘재일한국인 2세대의 마지막’이라 했다.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 세대, 그 고생을 보고 자란 2세대와 그 다음 세대는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3세대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인과 결혼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어느 쪽이냐고 묻는 것은 의미 없다. 그들에게 한국의 의미는 그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 이제 우리는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 함께 걸어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글·사진= 일본 도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재일동포 2세인 일본 민진당 참의원 백진훈 의원이 지난달 9일 의원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 의원은 ‘아버지의 나라 한국, 어머니의 나라 일본’이라는 홍보 포스터를 내세워 재일한국인 최초로 3선에 성공했다.
2016.10.04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7. 진창호 진공방 대표 “선친은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정경화·아이작 스턴 등 거장이 고객”
진창호씨(54)의 아버지는 엄격했다. 말수가 적었으나 그 속엔 거역할 수 없는 단호함이 있었다. 진씨는 그런 아버지가 무서웠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는 모습만은 언제나 멋있었다. 아버지가 만든 바이올린에서는 때론 귀뚜라미 같고 때론 매미 같은 소리가 났다. 어린 시절, 진씨는 톱밥이 날리는 매캐한 아버지의 공방에서 노는 것을 즐겼다. 어둡고 좁은 공방에서 진씨는 버려진 나무 조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만들어진 것들로 놀이를 즐겼다. ‘나도 나중에 아버지처럼 바이올린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주 어릴 때부터 진씨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진씨가 운영하고 있는 진공방(JIN 工房)은 일본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린 제작사다. 정경화, 강동석, 아이작 스턴, 로스트로포비치, 헨릭 쉐링 같은 세계적 명연주자들이 이 공방의 고객이다. 지난 9일 찾아간 도쿄 조후시 미도리가오카에 있는 진씨의 진공방. 33㎡(10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공방에는 갖가지 공구들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체로(첼로)’ ‘무계(무게)’. 서툰 우리말이 쓰여진 공구들은 아버지 진창현씨가 직접 만든 것들이다. 아버지 진씨가 대학을 졸업하고 57년부터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이 공방의 역사도 60년에 이른다. 2012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는 진씨가 공방을 이끌고 있다. ◆동양의 스트라디바리, 경계인의 삶진씨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인 1929년 김천에서 태어났다. 가난에 쪼들리던 열네살 소년은 먹고살기 위해 1943년 혼자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다. 분뇨 리어카를 끌고 군수공장에서 석탄을 옮기고 고철을 주워 팔면서 야간 중학교를 거쳐 메이지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교사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사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조센징’은 절대 교사가 될 수 없었다.절망에 빠져있던 그는 우연히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신비’라는 강연을 듣고 인생 항로를 바꾼다. 20세기 과학으로는 그 신비를 벗기기 불가능하다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능가하는 명기를 만들겠다며 바이올린 제작자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조센징’에게 기술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었다. 혼자서 독학으로 막노동을 해가며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하루 3시간 잠을 자며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일본 3대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시노자키가 첫 고객이었다. 시노자키는 홍난파, 안익태 등과 도쿄음대 동창으로 재일한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쓸모없는 폐자재로 만든 진씨 아버지의 바이올린을 대당 3천엔에 구입했다. 1976년 미국바이올린제작자협회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는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됐다. 피나는 노력 끝에 진씨 아버지는 이 대회에서 6개 부문 중 5개 부문 상을 휩쓸며 금메달을 땄고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1984년에는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세계에서 5명뿐인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도 받았다. ‘다른 이의 감독을 받지 않고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다’(무감사·無監査)는 자격이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는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로 불렸다.진씨 아버지는 83세가 되던 2012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인생은 일본 후지TV가 2004년 ‘해협을 건넌 바이올린’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로 방영했고, 2008년에는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일본 영어 교과서에도 실렸다. 한·일 국교 재개 후인 1968년 5월 김천 고향마을을 찾았다가 북한 간첩이라는 오해를 받아 공안 당국의 고문과 조사까지 받았고,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자 일본 정부가 끈질기게 국적 변경을 요구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정부는 2008년 10월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그에게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그는 평생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합쳐 600여대의 악기를 제작했으며 일본 NHK 교향악단의 악장이 현재 그의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나를 그토록 서럽게 했던 일본 사회의 차별과 모진 역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던 그는 다카오 산에 묻혔다. 고향에서 가져온 태극기와 어릴 적 뛰놀던 낙동강 모래가 그와 함께 묻혔다. 그가 처음 터를 잡고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한 일본 신나가노현 기소군 기소마치 신스이 공원에는 그의 기념비도 세워졌다. 비석에는 진창현씨의 얼굴을 새겼고 비석 옆에는 죽을 때까지 국적을 바꾸지 않은 고인의 뜻을 기려 무궁화가 심어졌다. ◆더 노력해서 부러워할 만큼 훌륭하게 자라라진창호씨의 유년기는 불행했다. 아버지 세대만큼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가난했고 차별은 일상적이었다. 진씨는 “아버지가 유독 엄격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라면서 “재일동포는 보통의 일본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일본에서 살아남으려면 악착같이 공부하고 일해서 일류가 되어야 한다고 아버지는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공부를 아주 많이 시켰으며 열심히 하지 않으면 엄청 혼을 냈다. 평범한 아이였던 진씨는 자면서도 아버지에게 혼나는 꿈에 시달릴 정도로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덕분에 열심히 공부했고, 한눈팔지 않는 성실한 청년으로 자랐다. “아버지께서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제대로 취직도 못하고 기술도 전수할 수 없을 테니 자신이 가진 기술을 물려줘야겠다고 아주 옛날부터 마음먹으셨던 것 같다”는 진씨는 20세가 되던 해,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했다. 만들기만 해서는 잘 만들 수 없다며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연주도 배웠다. 웬만한 앙상블에 참여해서 연주할 정도의 실력도 갖췄다. 진씨는 어릴 때부터 “너, 조선인이지”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분하고 슬퍼할 때마다 아버지는 더 노력해서 더 부러워할 만큼 훌륭하게 자라라고 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창호, 진창숙, 진창용 세 자녀는 함께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있다. 아버지 진씨의 설계도와 재료, 제작 노하우를 그대로 이어받아 ‘진공방’의 명성을 꿋꿋하게 이어가고 있는 이들은, 앞으로 돈이 없어서 좋은 악기를 쓰지 못하는 재능있는 음악인들이 음악적 꿈을 마음껏 펼치도록 악기 지원을 할 계획이다. 또한 아버지의 바이올린과 제작 공구 등 유품을 고향 김천에 기증해 전시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날 찾아간 진씨의 집 대문에는 ‘진창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또렷하게 적힌 문패가 여전히 걸려 있었다. 왜 귀화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그에게 한국이란 어떤 의미일까. “‘먼’ 모국이라고 할까요. 그리움과 향수가 있지만 멀리 있는.” 진씨는 “아버지는 늘 ‘조국을 사랑하지 않으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 조국이 곧 부모’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을 때가 가장 기쁘다고 했다. 글·사진=일본 도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진창호씨가 ‘진공방’의 작업대에서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있다.진창호씨(오른쪽)와 진창용씨. 창호씨는 바이올린을, 창용씨는 활을 제작하고 있다. 바이올린 제작자 진창호씨의 어린 시절. 아버지 진창현씨와 함께 공방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2016.09.27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6. 김영철 교토국제학원 부이사장
재일(在日) 조선인의 삶은 치열했다. 일본인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았던 모진 세월이었다. 그 세월 속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혼란도 늘 함께했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일본에 사는 한국인’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절약 통해 사업 일궈…서러움에 눈물도 김영철 교토국제학원 부이사장(70)은 경북 고령(운수면)이 고향이다. 재일 조선인 2세로 현재 ‘교토 경북도민회’ 부회장 직도 맡고 있다. 그의 부친(1918년생)은 16세 때 외삼촌의 주선으로 일본 교토에 혈혈단신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후 그의 부친은 염색공장에서 일을 하며 기반을 잡아 나갔다.고령 출신 교토경북도민회 부회장생존본능 발동…매사에 최선 다해트로트·판소리·클래식 다 좋아해재일조선인 3·4세 미래 걱정스러워김 부이사장은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한 셈이다. 월급보다는 용돈 정도 벌었다고 보는 게 맞다”고 전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렇게 받은 ‘용돈’의 대부분을 저축하는 데 썼다고 한다. 5엔이 손에 쥐어졌다면 그중 4엔을 저금통에 넣었다. 이 돈은 고향을 오가는 비용으로 쓰였다.김영철 부이사장은 다른 재일 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기를 거쳐야만 했다.그는 “어린 시절 동네에 죄다 일본인만 살았다. 우리 집은 김치를 담가 먹고 한약도 달여 먹었는데, 일본인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서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이지메(왕따)를 우려한 때문인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집안 풍습’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사이가 좋았던 일본인 친구도 김 부이사장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거리를 두곤 했다. 이후 그는 공부는 물론 스포츠, 싸움까지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실력을 갖춰 무시를 당하지 않겠다는 ‘생존본능’이었던 셈이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야구부 주장을 맡았고, 학생회장 직도 거쳤다.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시골 등지에서 배달되는 쌀을 싼값에 구입해 이를 되파는 소위 ‘쌀장사’를 했다. 아버지가 염색공장에 다니며 번 돈을 합해 형편이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한다.김 부이사장은 “날마다 정오쯤에 쌀을 실은 차가 역에 도착했는데, 이 역이 학교를 오가는 길에 있었다”며 “모친께서 쌀을 받기 위해 역에 나가면, 일본인 친구들이 이를 보고는 놀려댔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다른 길로 돌아가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하지만 중2 때부터 생각이 좀 바뀌었다. 어머니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며 “한번은 비가 내리는 날 내가 직접 쌀을 가지러 갔는데 그만 쌀을 실은 자전거가 넘어지면서 길바닥에 다 쏟아버렸다. 서러워서 펑펑 울었다. 그 일을 계기로 좀 더 똑바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일본에서의 삶 편치 않아…교포 사회의 미래 걱정김 부이사장은 대학 졸업 후 25세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본격적으로 염색공장(마루혜 염색공장)을 운영했다. 주로 기모노를 염색하는 곳이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35년 정도 일했다. 호경기를 만나 수입이 좋았다. 건물 확장을 거듭해 한때는 661㎡(200평) 정도였지만, 자동화 바람이 불면서 안타깝게도 사업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민단 본부 단장까지 지냈던 이우영 교토국제학원 전 이사장의 요청으로 이곳 부이사장 자리를 맡게 됐다.김 부이사장은 일본에 대해 마음 놓고 살기 힘든 곳이라 표현했다. 그는 “항상 한국인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살아왔다. 마음속에 깊이 남겨진 불씨가 있는 듯하다”며 “한국을 위해 뭔가 해야 하고,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경북도민회 활동을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라고 말했다.그의 부모 또한 민족의식이 강했다. 김 부이사장은 어린 시절 ‘단장의 미아리 고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어머니를 보았다. 그는 LP판을 들으며 한국어를 배웠다. 서른 즈음에는 함께 일하던 인부들 앞에서 트로트 곡을 부르며 흥을 한껏 끌어올리기도 했다.김 부이사장은 “지금도 장사익의 음반은 모두 소장하고 있을 정도”라며 “판소리도 좋아하고 클래식도 좋아한다. 음악과 술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호탕하게 웃었다. 김 부이사장은 “재일동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교민 사회에 대해 ‘지원이 필요한 곳’이라는 등의 인식만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현재 1세대 재일 조선인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우리와 같은 2세도 한국 사회에 관심없는 이들이 많다. 아직까지는 도민회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며 “3, 4세의 80% 정도는 일본 국적을 취득한 채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사진=<사>인문사회연구소 공동기획 : 경상북도·인문사회연구소※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6-일본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교토국제학교는?1947년 개교·교화 무궁화…졸업생은 2천500여명 배출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교토국제학교는 광복 직후 재일 조선인들이 자녀의 민족 교육을 위해 힘을 모아 1947년 문을 열었다. 교화도 무궁화이다. ‘학교법인 교토국제학원’(이사장 김황)이 운영하고 있다. 김영철 ‘교토 경북도민회’ 부회장이 이곳 부이사장직을 맡고 있으며, 현 학교장은 하동길씨다. 지금까지 2천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개교 당시에는 중학교 과정만 있었지만, 1963년부터는 고교 과정도 개설됐다. 학교 명칭은 ‘동방학원’(1951년), ‘교토한국중학’(1958년)으로 각각 변경됐다가 2004년부터 지금의 교명을 사용하고 있다. 이때 일본정부로부터 정식 중·고교로 인가받았다.김황 이사장은 “재일동포 및 학교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초기의 ‘한국계 민족학교’에서 현재와 같은 ‘한국계 국제학교’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며 “학생 구성은 재일동포계, 본국에서 온 학생은 물론 일본인 학생이나 중국계 학생 등 국적이 다양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김영철 교토국제학원 부이사장이 일본의 한 식당에서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201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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