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6. 김영철 교토국제학원 부이사장

  • 백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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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9-06   |  발행일 2016-09-06 제6면   |  수정 2022-05-18 17:40
부친 염색공장서 35년간 한우물…“가슴엔 늘 한국인 의식 꿈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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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교토국제학원 부이사장이 일본의 한 식당에서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재일(在日) 조선인의 삶은 치열했다. 일본인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았던 모진 세월이었다. 그 세월 속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혼란도 늘 함께했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일본에 사는 한국인’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절약 통해 사업 일궈…서러움에 눈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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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교토국제학원 부이사장(70)은 경북 고령(운수면)이 고향이다. 재일 조선인 2세로 현재 ‘교토 경북도민회’ 부회장 직도 맡고 있다. 그의 부친(1918년생)은 16세 때 외삼촌의 주선으로 일본 교토에 혈혈단신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후 그의 부친은 염색공장에서 일을 하며 기반을 잡아 나갔다.


고령 출신 교토경북도민회 부회장
생존본능 발동…매사에 최선 다해
트로트·판소리·클래식 다 좋아해
재일조선인 3·4세 미래 걱정스러워



김 부이사장은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한 셈이다. 월급보다는 용돈 정도 벌었다고 보는 게 맞다”고 전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렇게 받은 ‘용돈’의 대부분을 저축하는 데 썼다고 한다. 5엔이 손에 쥐어졌다면 그중 4엔을 저금통에 넣었다. 이 돈은 고향을 오가는 비용으로 쓰였다.

김영철 부이사장은 다른 재일 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기를 거쳐야만 했다.

그는 “어린 시절 동네에 죄다 일본인만 살았다. 우리 집은 김치를 담가 먹고 한약도 달여 먹었는데, 일본인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서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이지메(왕따)를 우려한 때문인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집안 풍습’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사이가 좋았던 일본인 친구도 김 부이사장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거리를 두곤 했다. 이후 그는 공부는 물론 스포츠, 싸움까지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실력을 갖춰 무시를 당하지 않겠다는 ‘생존본능’이었던 셈이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야구부 주장을 맡았고, 학생회장 직도 거쳤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시골 등지에서 배달되는 쌀을 싼값에 구입해 이를 되파는 소위 ‘쌀장사’를 했다. 아버지가 염색공장에 다니며 번 돈을 합해 형편이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한다.

김 부이사장은 “날마다 정오쯤에 쌀을 실은 차가 역에 도착했는데, 이 역이 학교를 오가는 길에 있었다”며 “모친께서 쌀을 받기 위해 역에 나가면, 일본인 친구들이 이를 보고는 놀려댔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다른 길로 돌아가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하지만 중2 때부터 생각이 좀 바뀌었다. 어머니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며 “한번은 비가 내리는 날 내가 직접 쌀을 가지러 갔는데 그만 쌀을 실은 자전거가 넘어지면서 길바닥에 다 쏟아버렸다. 서러워서 펑펑 울었다. 그 일을 계기로 좀 더 똑바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 일본에서의 삶 편치 않아…교포 사회의 미래 걱정

김 부이사장은 대학 졸업 후 25세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본격적으로 염색공장(마루혜 염색공장)을 운영했다. 주로 기모노를 염색하는 곳이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35년 정도 일했다. 호경기를 만나 수입이 좋았다. 건물 확장을 거듭해 한때는 661㎡(200평) 정도였지만, 자동화 바람이 불면서 안타깝게도 사업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민단 본부 단장까지 지냈던 이우영 교토국제학원 전 이사장의 요청으로 이곳 부이사장 자리를 맡게 됐다.

김 부이사장은 일본에 대해 마음 놓고 살기 힘든 곳이라 표현했다. 그는 “항상 한국인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살아왔다. 마음속에 깊이 남겨진 불씨가 있는 듯하다”며 “한국을 위해 뭔가 해야 하고,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경북도민회 활동을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라고 말했다.

그의 부모 또한 민족의식이 강했다. 김 부이사장은 어린 시절 ‘단장의 미아리 고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어머니를 보았다. 그는 LP판을 들으며 한국어를 배웠다. 서른 즈음에는 함께 일하던 인부들 앞에서 트로트 곡을 부르며 흥을 한껏 끌어올리기도 했다.

김 부이사장은 “지금도 장사익의 음반은 모두 소장하고 있을 정도”라며 “판소리도 좋아하고 클래식도 좋아한다. 음악과 술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호탕하게 웃었다. 김 부이사장은 “재일동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교민 사회에 대해 ‘지원이 필요한 곳’이라는 등의 인식만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현재 1세대 재일 조선인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우리와 같은 2세도 한국 사회에 관심없는 이들이 많다. 아직까지는 도민회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며 “3, 4세의 80% 정도는 일본 국적을 취득한 채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사진=<사>인문사회연구소
공동기획 : 경상북도·인문사회연구소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6-일본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 교토국제학교는?
1947년 개교·교화 무궁화…졸업생은 2천500여명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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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교토국제학교는 광복 직후 재일 조선인들이 자녀의 민족 교육을 위해 힘을 모아 1947년 문을 열었다. 교화도 무궁화이다. ‘학교법인 교토국제학원’(이사장 김황)이 운영하고 있다. 김영철 ‘교토 경북도민회’ 부회장이 이곳 부이사장직을 맡고 있으며, 현 학교장은 하동길씨다. 지금까지 2천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개교 당시에는 중학교 과정만 있었지만, 1963년부터는 고교 과정도 개설됐다. 학교 명칭은 ‘동방학원’(1951년), ‘교토한국중학’(1958년)으로 각각 변경됐다가 2004년부터 지금의 교명을 사용하고 있다. 이때 일본정부로부터 정식 중·고교로 인가받았다.

김황 이사장은 “재일동포 및 학교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초기의 ‘한국계 민족학교’에서 현재와 같은 ‘한국계 국제학교’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며 “학생 구성은 재일동포계, 본국에서 온 학생은 물론 일본인 학생이나 중국계 학생 등 국적이 다양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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