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로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①‘전설의 체육영웅’ 황 마이 운데예비치씨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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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04   |  발행일 2018-07-04 제6면   |  수정 2022-05-18 17:18
“카자흐 고려인 최초의 스피드스케이팅 공훈 트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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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스포츠영웅 황 마이 운데예비치씨가 유년시절을 기억하며 격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고려인 1세로 8세 때 강제 이주열차를 탔다.

영남일보는 고려인 강제이주 81주년을 맞아 ‘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을 총 7회에 걸쳐 연재한다. 옛 소련시절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한 고려인 1세대를 비롯해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2·3세대 동포의 생애사와 라이프스토리를 소개한다. 첫 회는 독립군의 아들로 태어나 8세 때 강제이주 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에 정착, 전설적인 체육영웅으로 자리매김한 황 마이 운데예비치씨의 이야기다.


8세 때 카자흐 아크몰라로 이주
거적때기 하나 없는 힘든 생활
가난 벗어나려 체육기술大 입학
20년간 스피드스케이팅 지도자로
100여명 세계정상급선수 길러내

“러시아는 나에게 육신의 고향
카자흐스탄은 내 삶 바친 나라”


◆유년기와 청년기는 일본과 독일이 빼앗아갔다

황 마이 운데예비치씨(89)는 1929년 5월1일, 러시아 연해주 ‘싸말리’라는 빨치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운데 이름 ‘마이’는 러시아어로 5월이란 뜻. 그의 아버지(황운정)와 삼촌은 일찍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황운정 지사(1899~1989)는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온성과 종성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참여한 뒤 40여 명의 동지와 함께 만주로 갔다 러시아로 건너가 연해주 솔밭관부대에서 독립군 간부로 무장투쟁에 가담했다. 그러던 황 지사는 35년 일본의 첩자로 몰려 소련경찰에 체포돼 3년형을 선고 받고 카자흐스탄 카라간다로 유배됐다. 이후 1958년 복권돼 지방의 당위원장과 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2005년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며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 인근 루스쿨로바 공동묘지에 잠들어있다.

“천장이 뚫린 낡은 집에 살던 기억이 나는데, 6세 때 경찰이 와 아버지를 잡아갔어. 어린 3남매를 두고 어머니가 홀로 됐지. 어쨌든 살아야했기에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비로비잔’으로 가 바느질, 재봉일 같은 것을 했어. 먹을 게 없어 떨어진 빵조각이라도 찾아야 할 정도로 배가 고팠지. 옷도 없어 아버지 옷을 입고 나중에 그것이라도 팔려고 하니 사는 사람이 없어.”

3남매와 함께 길바닥으로 나앉은 그의 어머니는 살면서 3번이나 자살을 생각했단다. 한번은 아무르강에 빠져 죽으려다 길 가던 채소장수에 의해 살아났다고 한다. 우연히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기찻길의 전기발전소에서 일하는 옛 빨치산 중대 관계자와 만나 그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1937년 8세 때 생사의 갈림길에 선다.

“어머니께서 1주일 뒤 이주를 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줬어. 옷이나 음식은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야. 4가구용 기차간에 8가구가 탔지. 낮에는 정차하고 밤에만 이동했어. 화장실에도 못 가고…. 가는 도중에 사람이 죽으면 삽이 없어 땅을 팔 수가 없었지. 시신을 돌로 덮든지, 기차 밖으로 던지든지 했어. 한번은 바이칼호수를 지날 때였어. 열대여섯살 되는 청소년 7~8명이 기차 위에 올라가 ‘바이칼호수 달빛은 청명한데, 기찻길 옆에 꽃은 피었고. 내 심장 속 꿈이 있는데 고향의 친구들이여 잘 있어라’라고 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 모두 기차 밑으로 떨어져 죽었지. 이튿날 담당 감시원이 ‘절대 이 일을 발설해선 안 된다’고 했어.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이야.”

고려인들은 현 카자흐스탄 북부 아크몰라 지역 허허벌판에 내버려졌다. 그곳에 구덩이를 파고 임시거처를 마련했다.

“크질오르다 지역으로 유배당한 사람들은 아크몰라보다 따뜻하고 물고기도 많아 덜 힘들었는데, 아크몰라는 생존 자체가 어려운 곳이었지. 거적때기 하나 없어 매우 추웠고 배고팠어. 그 힘든 과정을 겪었기에 우리가 질긴 민족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그의 가족은 아크몰린스크(현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로 거처를 옮겼다.

“석탄 수송 기차가 굽은 곳을 지날 때 떨어뜨린 석탄파편을 주워 겨울에 땔감으로 썼어. 지게나 양동이에 석탄파편을 담아 지고 다닌 게 하루 일과였던 것 같아. 그런데 어른이 돼 생각해보니 그게 하체 단련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 감자 한 알만 있어도 굉장한 거야. 하루는 어머니가 물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1시간 이상 부싯돌을 피우려다 잘 안 되자 주저앉아 흐느끼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이불이 없어 가족이 밀짚을 덮고 잤는데, 내가 ‘배고프다’고 하니 “빨리 잠들어라. 내일이면 빵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달랬지만 다음날 아침에도 빵은 여전히 없었어.”

그는 아크몰린스크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말이 학교였지 교재는 물론 공책이나 연필도 없어 공부할 형편이 안 됐다. 1941년 그의 아버지가 출소해 가족 곁으로 왔지만 일자리가 없어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학교는 집에서 6㎞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맹추위를 뚫고 걸어다녔다.

“4~5학년 때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어. 학교에 갈 때마다 전쟁에 나간 친구들의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지. 부상으로 불구가 돼 돌아오는 어른들도 많이 봤어. 시험같은 것도 없었지. 집에서 가축을 기르고 땔감을 줍는 게 일이었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지.”

◆인생의 전환점이 된 러시아 레닌그라드

그는 초등학교를 힘들게 다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카자흐스탄의 카즈셀 마쉬라는 농장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8세 때 황 마이 운데예비치는 더 이상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소르토발스키 체육기술대학에 들어갔다 다시 레닌그라드 해군양성학교(현 체육기술대학)로 전학했다.

“전상자로부터 헐벗고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 레닌그라드에 있는 해군양성학교에 가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다고 해 어머니를 설득했지. 어머니는 울며불며 말렸는데, 결국 친구와 함께 가기로 했어. 고려인들은 공식적으로 이주 허가가 나지 않아 일반열차가 아닌 화물열차를 타고 갔어. 아크몰라에서 모스크바까지 열흘쯤 걸렸지. 열차표를 살 돈이 없어 화물칸에 몰래 탔는데 발각돼 쫓겨나면 또 다른 화물열차로 바꿔 타고…, 먹을 걸 살 돈도 없어 눈빛으로 구걸했지. 한번은 경찰이 빵을 먹고 있었는데 배고픈 눈초리로 그걸 계속 보고 있었던 거야. 그 경찰이 빵을 먹다 빵조각을 땅바닥에 내버렸는데 그걸 주워먹었지. 그때 나를 조롱하듯 바라보던 그 경찰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카자흐스탄 스피드스케이팅 영웅으로

해군양성학교 재학시절 운동신경이 뛰어나 체조 등 다양한 스포츠에 재능이 있던 그는 1952년 스케이팅 트레이너의 권유로 스케이팅에 입문했다. 1953년 레닌그라드 체육기술대학 졸업 후 카자흐스탄 메데우스포츠팀 일원으로 스피드스케이팅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1954년부터 카자흐스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코치 겸 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4년 뒤 고려인으로선 옛 소련연방이 수여하는 카자흐스탄공화국 최초의 스피드스케이팅 공훈트레이너가 됐다. 그가 가르친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 세계신기록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그는 러시아 여인과 결혼해 딸을 하나 낳았다. 황 마이 운데예비치는 스피드스케이팅 지도자를 20여 년간 역임하면서 100여 명의 세계정상급 선수를 길러냈다. 그 가운데에는 Y. Malyshev, V. Geiderich, K. Seregina, L. Veronina 등과 같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도 있다. 그가 지도한 제자 중 30여 명이 현재 러시아를 비롯한 CIS국가의 공훈트레이너가 됐다. 1966년엔 석사학위를 따고 1990년 국립 카자흐스탄대 체육학과(동계스포츠 전공) 교수로 임용됐으며 현재까지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가 동계스포츠와 관련해 발표한 논문만 140편이 넘는다.

카자흐스탄공화국 문화체육발전 훈장을 수훈하고, 10대 명예스포츠 인사에도 포함됐다. 구순을 1년 앞둔 그는 KazAST 관광 및 스포츠아카데미 이사장 및 고문을 역임하고 있다.

“2011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알마티에서 열린 동계아시안게임 때 국기게양 후보로 선정될 기회가 있었는데, 국기를 들고 가다 쓰러지면 어떻게 되냐고 해서 떨어진 적이 있지(웃음). 하지만 난 아직도 세계격투기대회에도 나갈 수 있을 만큼 건강해. 90년 가까이 되는 인생사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어. 특히 배고픔과 추위가 힘들었지. 나에게 러시아는 육신의 고향이고 카자흐스탄은 내 삶을 바친 나라야. 한국은 부모의 고향이니 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지. 언제 어디에 있어도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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