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3부> 1. 권순기 베이징상립대투자고문유한공사 회장

  • 노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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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7   |  발행일 2016-10-27 제9면   |  수정 2022-05-18 17:43
中서 자랐지만 ‘안동 권씨’교육 받아…“한국 기업 성공때 뭉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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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2016 한중 민간 경제협력 포럼’에 참석한 권순기 회장 일행이 국내 한 대학 관계자들과 의료산업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권 회장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을 돕는 것은 물론 한국 병원의 중국 설립, 대학 간 교류 등에도 도움을 줬다(왼쪽). 권 회장 일행이‘2016 한중 민간 경제협력 포럼’에 참석 후 국내 한 대학병원을 찾아 의료산업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중일경제발전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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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2016 한중 민간 경제협력 포럼’에 참석한 권순기 회장이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운데) 등 한국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포럼의 실무책임은 한중일경제발전협회가 맡았고, 집행회장이 권 회장이다. <한중일경제발전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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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집안의 장손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 땅에 묻혔다.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잠시 중국으로 몸을 피한다는 것이 생이별의 시작이었다. 반드시 돌아온다는 생각에 고향땅에 장남도 두고 떠났는데 결국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린성의 목재상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본인 사장 밑에서 목숨을 걸고 일을 하면서도, 중국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두 딸에게는 한국인이 지켜야 할 것, 그리고 양반이 갖춰야 할 도리에 대한 교육을 한시도 놓치지 않았다. 컨설팅 업체인 베이징상립대투자고문유한공사 권순기 회장(59)의 아버지 이야기다.

권 회장 아버지 日 징집 피해서
중국 지린성으로 왔다 귀국못해
타국서 ‘한국의 핏줄’늘 가르쳐

지린성의 요직 두루 거친 권회장
中 진출 한국 기업에는 ‘해결사’
컨설팅 등 통해 성공 투자 이끌어
연간 매출만 1억6천만 달러 기록
“조국은 중국” 양국의 상생 강조


권 회장의 아버지는 191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안동권씨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장손이었다. 일본의 강제 징집을 피해 1939년 중국 지린성으로 몸을 피했다. 대륙 침략을 위해 1931년 9월 만주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한 일본은 이후 1937년 7월 베이징 교외에서 일어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의 작은 사건을 빌미로 중국 내륙지역을 공격하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길어지자 군인을 충원하기 위해 식민지였던 한국의 청년들을 강제징집한 시기였다.

권 회장의 할아버지는 ‘장남이 강제징집당하면 대가 끊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네 살난 아들을 떼놓고 중국으로 몸을 피하라고 강권했다. 그렇게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연변에 터를 잡았다. 한국에서 당시 고등학교까지 마친 권 회장의 아버지였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목재를 옮기는 등 막노동밖에 없었다. 일본의 강제징집을 피해왔더니, 사장이 일본 사람이었다.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이 험해 목숨을 잃는 동료도 적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3년을 버텼다. 그렇게 중국말을 어느 정도 익힌 그는 도로 측량과 다리설계 등을 하며 돈을 모았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을 위한 준비를 하는 사이, 1950년 6·25전쟁이 터졌고 고국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정전된 이후 권 회장의 아버지는 이산가족을 찾는 한국의 라디오 방송에 수도 없이 사연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1988년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50년 전 고향 주소로 편지를 보냈고 이를 삼촌이 받기에 이른다. 이후 한국에 남아 있던 아들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40년 가까이 생사를 알 수 없었던 탓에, 고국에서는 그의 생일에 맞춰 10년 가까이 제사를 모시던 때였다.

◆조국은 중국, 그러나 핏줄은 한국

지난달 28일 제15차 세계한상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권 회장을 제주도에서 만났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그는 “현재 조국은 중국이지만, 제 몸 속에 흐르는 피는 한국”이라고 말했다. 자라는 동안 아버지로부터 ‘안동권씨 문중’과 ‘양반’이 갖춰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육받았고, 그 안에는 한국인에 대한 긍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그가 하는 일은 중국에 투자하는 외국기업, 특히 한국과 일본 기업인과 중국 간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민간차원이지만, 그는 중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탓일까. 그는 어려운 한국말을 쉽게 구사하면서도 인터뷰 중간 중간 ‘조국은 중국’이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핏줄이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내비쳤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 등도 돕고 있지만, 한국기업의 문제가 해결됐을 때, 투자 이후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지린성 지린시에서 태어난 권 회장은 조선족 소학교를 졸업한 이후 중·고등학교 과정은 중국인 학교를 다녀야 했다. 살던 곳이 워낙 시골이라 조선족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 회장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국 민족, 특히 안동권씨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늘 강조했다. 권씨 집안이 얼마나 뼈대 있는 집안인지, 한국의 양반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늘 강조했다. 권 회장은 지금도 1년에 한 번은 안동을 찾는다. 문중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농촌에서 일하다 중국 문화대혁명 직후 군에 입대한 그는 제대 후 공안국(경찰), 기계공장 총경리, 호텔 사장 등 지린성에서 요직을 거친 뒤 1990년 베이징에 진출했다. 중국 내 소수민족을 관리하는 베이징 민족사무위원회에서 그를 스카우트했고, 위원회 산하 민족개발총공사 부총리(부사장)로 일하며 중국 정부 내 인맥을 쌓았다. 이런 인맥을 바탕으로 권 회장은 1996년 베이징상립대(上立大, 높이 세우고 크게 돕는다)투자고문유한회사를 설립, 20년째 운영하고 있다. 회사 창립 당시 중국에는 컨설팅을 해주는 ‘고문유한회사’라는 명칭 자체가 없을 때였지만, 지금은 중국 주요도시는 물론 서울과 대만·홍콩·일본 등지에 분회를 두고 있다.

◆한국기업의 중국 내 디딤돌 역할할 것

현재 그는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기업들의 ‘문제해결사’로 불린다. 현재까지 거래한 한국 기업은 100여곳에 이르고, 30여곳은 현재 컨설팅 중이다.

권 회장은 현대자동차의 중국 진출을 견인했고 LG디스플레이가 광저우시에 40억달러를 투자할 때 이를 중개했다. 또 LS그룹의 장쑤성 우시시 공장설립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삼성그룹, SK, 현대 조선소 등의 중국진출, 그리고 중국과의 합작과정에 빚어진 갈등도 해결했다. SK가 산시성 국영기업과 합작하다 갈라설 때 생긴 여러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해준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 병원의 중국 내 설립, 대학간 교류 등도 성사시켰다. 이렇게 올리는 매출이 연간 1억6천만달러에 이른다.

그는 늘어나는 매출보다 중국의 발전과 한국 기업의 동반성장에 도움을 줬다는 것에 더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 창립 당시는 개방 초기라 한국 기업들이 중국의 규정과 사회제도 등을 몰라 많이 실패했다. 이들이 편하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로 창업했다”며 “중국에 투자하고자 하는 여러 나라의 기업을 위해 투자 자문을 하지만, 한국기업 문제를 해결했을 때 같은 핏줄이라 기쁨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을 돕는 데 여생을 바치고 싶다"고 덧붙였다.

권 회장은 한·중 FTA 체결에 따라 보다 많은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FTA 체결 이후 양국이 협력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졌고, 특히 한국의 안전식품이 주목을 받고 있다는게 그의 판단이다. 안전한 식품을 수출할 적기인 만큼 한국의 관련기업이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는 것.

또 중국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건강과 환경 분야도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진출 업종이라고 진단했다. 한류 영향으로 불티나게 팔리는 한국 화장품 공장을 중국에 세워 시장을 공략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조언했다.

권 회장은 “한국은 자원도 적고, 국토도 좁아 너무 어렵다. 북한과의 관계가 지금보다 평화롭게 개선되면 서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도 현재의 민감한 문제를 잘 처리하고 발전적으로 나가면 지금보다 서로가 더 행복해질 것”이라며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찾아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노인호기자 sun@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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