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9-끝. 고경필 백두학원 이사장 “배우고 기술 익혀야 日서 무시 안 당한다” 민족학교의 정신 지켜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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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18   |  발행일 2016-10-18 제6면   |  수정 2022-05-1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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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필 백두학원 이사장(왼쪽)이 하태윤 오사카총영사로부터 훈장과 훈장증을 받고 기념 촬영을 했다. <고경필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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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학원 고경필 이사장(69)의 아버지 고시종씨는 열다섯 나이로 일본행 정기선에 올랐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일본의 선진 기술을 배워 가족을 배불리 먹이겠다.’ 그 일념으로 그는 고향을 떠났다. 얼굴도 모른 채 갓 결혼식을 올린 열네살 아내와 함께였다. 일본으로 온 아버지는 금속부품 공장에 들어갔다. 모진 수모를 당했지만 이를 악물고 금속 가공기술을 배웠다. 운 좋게 배운 기술로 회사도 설립했고 규모도 키워나갈 즈음, 고대했던 광복이 됐다. 귀향을 꿈꾸며 버텨온 세월이었지만,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사연은 구구절절 안타깝다.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돌아가리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삶을 다시 꾸려나갔다.

고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벌여놓은 사업과 살던 터전을 버리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살다보니 좋은 날도 왔다. 이후 유모차 등을 제조·판매하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사업은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경기가 나빠지면서 회사도 문을 닫았다. 고 이사장이 고교 1학년이 되던 해였다.

고 이사장의 어린시절은 아버지의 회사가 성장하던 때라 경제적인 어려움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고교 1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의 파산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아르바이트로 가계를 꾸려가야 했다.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제조하던 상품의 일부를 제조하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금속제 가구 제조 업체였다. 회사는 그럭저럭 큰 규모로 성장했고, 지금은 장남에게 물려준 상태다.

◆흰 머리가 되도록 조국을 잊지 말자

광복이 되었지만 많은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남은 이들은 ‘백두동지회’를 만들었다. 흰머리가 되도록 조국을 잊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자는 뜻이 담겨있다. 당시 고무공장으로 크게 사업을 번창시킨 제주도 출신의 사업가 조규훈씨가 앞장을 섰다. 공부를 하고 기술을 익혀야 이곳 일본땅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십시일반 돈을 내서 학교를 세웠다. 일본 학교가 아니라 한국 학교를 세워 우리의 것을 제대로 가르치겠다는 뜻이었다.


광복돼도 고국에 못가는 사람들
십시일반으로 해외 첫 한국학교
代이어 이사 역임해 ‘민족 교육’
정체성 지키며 日사회 정착 기여



설립 및 인허가 순서대로 따져 본다면 해외에서 가장 먼저 동포들의 손으로 세운 학교, 그래서 한국학교라고 불리기보다 민족학교라고 불리는 학교, 백두학원이 운영하는 건국학교다. ‘조국을 건국한다’는 숭고한 소원을 담은 ‘건국’이라는 이름을 따 건국공업학교, 건국고등여자학교로 명명했다.

고 이사장은 “당시 일본에는 100만명 정도가 살았다. 우리말을 쓰지도 못하게 했다. 비록 지금은 일본에 남았지만 남은 사람도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갈 것이다. 그러려면 한국어를 공부해야 한다. 건국고등학교를 세운 이유였다. 조선학교 폐쇄령 이후 128개나 되는 조선학교 중에 정식 사립학교로 일본정부의 인정을 받은 유일한 민족학교였다”고 설명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 내에 거주하던 재일 조선인은 ‘국어 강습소’라는 조선어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교육시설을 전국 각지에 만들었다.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이들은 일본 사회에 동화되지 않는 문제적 집단이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렸다. 운동장과 건물이 있어야 한다는 등의 까다로운 설립 인가 요건도 내세웠다. 한신교육 투쟁이 일어난 배경이다. 건국학원만이 유일하게 인가를 받고 살아남았다.

고 이사장의 아버지 고시종씨는 1952년부터 1976년까지 24년간 백두학원의 이사와 상임이사를 역임했으며 고 이사장과 그의 여섯 형제는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고 이사장은 1996년 백두학원이 50주년을 맞던 해 교우회(동창회) 회장이 되어 이사를 역임해 왔다. 부이사장도 9년간 역임했다. 고 이사장은 지난 7월 재일동포 자녀의 교육환경 조성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능력 있는 세계 시민 길러낼 것

지난달, 오사카 스미요시의 백두학원을 찾은 날은 일요일이었다. 교문을 들어서자 반가운 한국말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다음날 있을 학교 학예발표회를 앞두고 연습을 위해 휴일인데도 학교를 찾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대강당에서는 전통예술부의 사물놀이 공연 연습이 한창이었다.

건국고등학교 전통예술부 사물놀이 공연팀은 오사카부 대표로, 전국에서 선발된 200여개 팀이 참가하는 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탈 정도의 실력을 자랑한다. 10여년째 오사카부 대표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이들의 정기공연에는 1천여명에 이르는 관객이 몰려든다. 대부분은 재일 한국인들이다. 공연이 끝나면 공연장은 늘 울음바다가 된다.

“백두 금강 영봉은 우리의 기상/ 압록 두만 흐름은 우리의 발전/ 금수강산 삼천리 무궁 낙원에/ 문화의 금자탑을 굳게 세우세”

백두학원 건국초·중·고등학교의 교가다. 사물놀이 공연이 한창인 체육관의 무대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애국가, 그리고 왼쪽에는 한글로 교가가 새겨진 대형 액자가 걸려있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모두 같은 교가를 부른다.

교가는 초대 교장 이경태 선생의 글에 현제명이 곡을 썼다. 2006년 발간된 백두학원 창립 60주년 기념지 ‘건국’에는 “해방 조국의 새로운 기수들! 평화롭고 부강한, 그리고 문화의 향기 드높은 살기 좋은 낙원, 조선! 원대한 이상과 포부에, 끓어 오르는 정열과, 두 번 다시 식민지 민족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절실한 심정에서 전력을 기울여 탄생한 것이 이 교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 이사장은 “재건된 조국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문화국가로 인도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민족교육이라는 설립 취지에 따라 70년 동안 민족 정체성을 지키며 동시에 일본 현지 사회에서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면서 “지금까지의 민족교육이 민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국인으로서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 자아의 형성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분야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교양과 능력을 갖춘 세계 시민으로서의 대한의 아들과 딸로 키우는 데 힘을 쏟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인 고 이사장의 국적은 한국이다. 살아있는 동안 국적을 버리지 말라고 당부한 아버지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다. 재일동포 2세로 미야기현 센다이시 출신인 그의 아내 역시 한국인이다. 고 이사장의 집에는 재일동포 5세 어린이가 있다. 이 아이가 스스로 입학하기를 원하는 학교, 그리고 ‘이 학교에서 배우길 잘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민족학교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글·사진=오사카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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