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3. 유학이민 최영호 하와이대 명예교수 “미국 속 한국 유지하려면 한인커뮤니티 애국심 위주 탈피해야”

  • 최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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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10   |  발행일 2017-07-10 제6면   |  수정 2022-05-18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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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최영호 전 하와이대 명예교수(왼쪽)를 만났다. 최 전 교수는 미국에서 한인이민사 및 독립운동사에 정통한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오른쪽은 부인 김민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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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세계 무대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소년의 아버지는 매일 이렇게 기도했다. 하지만 경산의 가난한 시골집에서 자란 그에게 ‘세계 무대’란 요원한 환상이었다. 당장 하루하루를 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러다 청년기에 우연히 얻게 된 유학의 기회는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놨다. 달랑 30달러를 들고 떠난 미국 유학생활을 거쳐 그는 훗날 미주 한인 이민사 및 독립운동사 분야의 촉망받는 학자가 됐다. 백발의 노인이 된 소년은 “미국 유학은 제2의 인생을 열어준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 3화는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가 학자가 된 어느 대구·경북민의 이야기다.

◆정체성 찾지 못한 소년기

최영호(86). 1931년 6월13일 경산군 경산면 중방동 343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과거시험을 보겠다며 빚을 내 서울로 떠난 뒤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교육을 받아 계몽된 사람들이었다.

학창시절 최씨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하고 장래를 꿈꿔보지도 못한 채 청소년기를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다닌 초등학교에서는 일본인 선생이 서예 수업시간에 ‘일본정신’ ‘동방예배’ 등을 쓰도록 강요했다. 한때 ‘사람들은 왜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도록 해 달라고 빌지 않을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도 집안일을 거들기 바빴다. 보따리장사를 하러 다닌 어머니를 도와 방학 때마다 부산에서 경산 사과를 팔았다. 부모님이 신문배달소를 운영할 땐 신문배달부를 자처했다.


일제시대 유년기 정체성 혼란
광복을 맞고서야 한국인 자각

6·25전쟁 발발하자 자원 입대
군대서 美시인 권유로 유학길
하와이대 사학과 교수로 부임
한인 이주사·독립운동사 연구

청소년 정착 프로그램 운영도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대봉동 소방서에서 일왕이 항복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한복을 입은 한국인 선생님은 태극기를 꺼내 애국가를 가르쳤다. “그때 태극기를 처음 봤어요. 가슴이 꽝 하는 게 ‘아, 내가 한국인이었구나’를 자각하게 되더라고요.”

◆우연히 떠나게 된 미국 유학

1950년 대구사범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다. 장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고민 없이 시험을 봐 자원입대했다.

57년 군대 시절 일본에서 제29차 국제팬클럽(PEN·국제적인 문학가 단체) 세계대회가 열렸다. 당시 영어를 잘했던 최씨는 외국 문인들을 보좌했다. 그 자리에서 미국 시인 ‘제레미 잉갈스’를 만났다. 미국 일리노이주 소재에 한 대학 교수로 있던 제레미는 최씨에게 미국 유학을 제안했다. “그때 나는 미국 유학을 도저히 생각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지. 제레미가 유학할 생각이 없냐고 묻기에 갈 길이 있으면 가고 싶다고 했어.”

제레미는 최씨 인생의 제2막을 열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주립대학교 입학허가서를 받았지만 항공권을 살 돈이 없었다. 갈 운명이 아니라며 포기의 기로에 서 있던 때 이모들의 도움으로 비행기 삯을 마련했다. 은행에서 급하게 30달러를 환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유학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맞은 계기였어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감도 전혀 없었고 장래를 꿈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말 그대로 미국 유학으로 삶이 변했죠.”

◆하와이로 건너와 꽃핀 인생

최씨의 인생은 1970년 하와이로 건너오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와이주립대 역사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는데, 그는 이때부터 한국인의 미주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65년 신이민법 제정으로 한국인이 미국에 몰려들어 오는데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한국인 이민사가 거의 정리돼 있지 않은 거예요.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연구자도 없었고요. 나라도 해야겠다 싶었죠.”

최씨는 하와이 이민 초기(1900년대 초)와 중기(1965년 이후)의 한인 이민사 자료를 수집했고 드러나지 않았던 한인 독립운동사를 발굴했다. 연구에 힘 쏟은 결과 오늘날까지 미국 내에서 미주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정통한 몇 안 되는 학자로 꼽힌다.

최씨는 또한 1970년대 한인 청소년들이 미국사회에 순조롭게 정착할 수 있도록 청소년 프로그램을 개설·운영했다.

“한국이 미국에 비해 경제여건이 안 좋던 때니까 아이들은 영어도 못 배우고 부모 따라 오는 거예요. 부모는 밤낮으로 일하니까 돌볼 수도 없었고요. 한국 학생들이 조직을 만들어 협박하거나 돈을 빼앗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이 아이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그는 한인인권투쟁위원회를 만들어 70년대 한인차별반대운동도 전개했다.

오랜 기간 한국인의 미국 정착사를 관찰하고 경험해 온 그는 한인사회에 대한 인식 변화 과정을 설명했다.

“8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인들이 스스로 ‘한국인인 게 부끄럽다’고 말했는데 88올림픽을 거치면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됐죠. 차차 좋아지다가 2002년 월드컵이 완전히 제압을 했어요.”

최씨는 앞으로 한인커뮤니티의 정의가 다양해져야 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한국어를 구사하거나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들이 한인커뮤니티에 속했죠. 하지만 앞으로는 그 정의가 다양화돼야 ‘미국 속의 한국’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가 가졌던 민족주의, 애국심에서 벗어나 문화·사상·사회적으로 국제화된 개념의 한인커뮤니티를 재정립해야 됩니다.”

글=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상북도, 인문사회연구소

※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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