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8. 백진훈 일본 민진당 참의원

  • 이은경
  • |
  • 입력 2016-10-04   |  발행일 2016-10-04 제6면   |  수정 2022-05-18 17:41
日 참의원 유일한 한국계 3선…“한·일 우호관계 가교역할 하고 싶다”
20161004
재일동포 2세인 일본 민진당 참의원 백진훈 의원이 지난달 9일 의원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 의원은 ‘아버지의 나라 한국, 어머니의 나라 일본’이라는 홍보 포스터를 내세워 재일한국인 최초로 3선에 성공했다.
20161004
20161004

백진훈. 그의 일본 이름은 하쿠신쿤이다. 재일동포 2세인 일본 민진당 참의원 백진훈 의원(58)은 지난 7월 치러진 선거에서 3선에 성공했다. ‘아버지의 나라 한국, 어머니의 나라 일본’이라는 홍보 포스터를 내세운 그는 정책 공약으로 평화헌법 수호, 집단자위권 행사 용인과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넓히는 안보법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1958년 도쿄 신주쿠 출신으로 2004년 7월 참의원 선거에 비례로 처음 당선된 그는 2010년 연임 이후 북한 납치문제 등에 관한 특별위원장과 민주당 홍보위원장 등을 맡았다. 일본 참의원 가운데 유일한 한국계다.


선친은 경산 출신…日여성과 결혼
수교 후 고향방문때 아이처럼 들떠

한반도문제 다루는 방송 출연 유명
2004년 민주당 비례대표로 첫 당선
영주외국인 참정권 부여 법안 추진

재일동포 극심한 차별받고 살아
그들이 느끼는 슬픔 생각해주길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부뿐

경산에서 태어난 백 의원의 아버지는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무렵 일본으로 건너왔다. 어렵사리 독학으로 대학에까지 입학했으나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귀국을 하려 했으나 설상가상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일어났다. 돌아갈 길은 막막해졌고 그러다가 아내를 만났다. 백 의원의 어머니는 도쿄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일본인이었다.

딸이 ‘조센징’과 결혼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부모는 없었다. 어머니는 집을 나왔고 곧이어 백 의원을 낳았다. 그렇게 집을 나온 어머니는 백 의원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서야 친정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힘들게 대학에 입학했지만 결국 학업을 마치지 못한 아버지는 좌절했다. 가난에서 벗어나 성공하는 길은 공부뿐이라는 믿음으로 버텼는데 숙명을 이길 순 없었다. 올곧고 완고한 성격의 아버지는 불의와 차별을 견디지 못했고 자주 문제를 일으키면서 해고당했다. 아버지의 직업은 시시때때로 바뀌었고 빚은 늘어갔다. 가난했으나 도움을 줄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외롭고 힘든 세월이었다.

경산 남산면 반곡동. 백 의원은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뒤 함께 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했던 날의 기억을 들려준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수도 적고 좀체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그날 아버지는 마치 소풍 나온 초등학생처럼 들떠서 쉬지 않고 떠들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흥분한 모습을 그는 본 적이 없었다.

◆운동 선수·연예인 아니면 깡패

니혼대 건축공학과 대학원을 전 과목 A의 성적으로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백 의원의 꿈은 컸다. 그의 지도교수는 일본 최고 건축회사에 직접 입사 추천까지 해주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그를 면접에서 배제시켰다. 건강검진에서 혈압 수치가 약간 높게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혈압수치는 정상범위 내에서 조금 높았을 뿐 아무런 문제될 것 없는 수준이었다. 낙심한 그에게 누군가가 ‘충고’를 해주었다. “한국사람이 여기서 보통사람처럼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운동 선수나 연예인, 깡패는 될 수 있어도.”

“초등학교 입학 때 다른 친구들은 모두 입학통지서가 나오는데 나는 부모님이 손을 잡고 학교에 찾아가서 입학을 ‘허락’받아야 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보이스카우트도 한국인이라고 못 들어갔다. 많은 상처를 받았으나 소수인·외부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어려서부터 익혔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다. 최근에는 조금 달라졌지만 재일한인들은 일본 사회의 차별과 편견 때문에 일류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조차 취업하기가 힘들었다. 자라면서 많은 상처를 받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교포사회의 노력 덕분에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아버지의 나라 한국, 어머니의 나라 일본

1994년부터 최근까지 조선일보 일본지사장을 지낸 백 의원은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유명해졌으며, 특히 일본인 납북사건과 관련해 전문가로 단골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렸다. 그러던 중 2003년 말 민주당으로부터 선거 입후보 제의를 받게 됐다. 뜻밖이었다. ‘조센징’이라 불려온 그에게 선거만큼 자신과 무관한 것도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쭉 ‘외국인’으로 살아왔으니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었고 2010·2016년 두 번의 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는 평화헌법 수호와 집단 자위권 반대, 일본인 납북문제 해결, 한·일 우호관계 강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백 의원은 “일본에서는 아직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재일한국인이 스스로 한국인임을 숨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재일한국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선거에 나간 것은 어떤 의미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말했다.

백 의원은 말한다. “한국인임을 숨기고 이 나라 일본에서 생활하는 재일동포를 비난할 수는 없다. 왜 자신의 국적을 숨기면서 비굴하게 사느냐고 비난하거나 한국사람이 한국말도 못하느냐고 비웃기도 한다.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이를 참아내며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가는 재일동포가 고국 동포에게까지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할 때 그들이 느끼는 슬픔이 어떤 것일지 한번 생각해봐 주길 바란다.”

그는 20만표 이상을 얻어 당선되었다. 그는 “각자 한 표밖에 없는 소중한 투표권을 한국인인 내게 던졌다는 것은 일본에는 한국과 일본이 손을 맞잡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다. 한국과 일본, 역사적으로 서로 많은 영향을 끼쳐왔던 두 나라의 진정한 우호관계를 위한 가교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재일한국인 2세대, 한일 가교역할 하겠다

물론 그의 진심이 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백진훈’의 일본식 표기인 하쿠신쿤을 이름으로 쓰고 있다. 재일동포 대부분은 일본에 귀화하거나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 한국계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백 의원은 그가 참의원이 된 것 자체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거의 매일 차별어가 잔뜩 들어간 e메일을 받고 있다. ‘한국의 스파이’니 ‘공작원’이니 하는 악플도 끊이지 않는다.

그는 그것조차 ‘존재의 의미’라고 해석한다. “숨어서 정치가가 된 것이 아니라서 자랑스럽다”는 그는 투표권이 없더라도 동포 사회가 정치력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 의원은 “영주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외국인이지만 일본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방 참정권을 줌으로써 지역 주민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소속감과 책임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백 의원은 스스로를 ‘재일한국인 2세대의 마지막’이라 했다.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 세대, 그 고생을 보고 자란 2세대와 그 다음 세대는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3세대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인과 결혼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어느 쪽이냐고 묻는 것은 의미 없다. 그들에게 한국의 의미는 그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 이제 우리는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 함께 걸어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글·사진= 일본 도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