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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7] 중국 내 경상도 마을
먹고살기 위해, 일본에 속거나 떠밀려 중국으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국적을 포기해야 했던 이들이 있다. 이들은 결국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 55개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으로, 그렇게 중국 사람이 되어버렸다. 현재 중국 내 조선족 인구는 183만명에 이른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 이후 만주국을 만들었고, 이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당시 일본인 신분이던 조선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말을 듣지 않으면 끊임없이 부역을 부과했고, 졸지에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조선인들은 고향을 등지게 됐다. 1936년부터 1940년 사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약 2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 중 길림성의 알라디촌, 흑룡강성의 홍신촌 등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모여 ‘중국내 경상도 마을’을 만들어 이어오고 있다. 일본에 의해 중국 내 조선족이 되어버린 그들. 광복 7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그들은 조국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국적 회복이 아니라 고향 방문조차 쉽지 않았던 시대는 지났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 땅을 밟은 이들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네 시선 탓에 여전히 갇혀 살고 있다. 1936∼40년 만주 이주 25만 조선인광복 후 귀향 못한 채 조선족의 삶길림성 알라디촌 등 고향사람 모여중국내 ‘경상도 마을’로 전통 이어부모 세대 쓰던 말과 문화 그대로한옥민속촌과 곳곳에 한글현수막낯익은 고추문화축제·김치공장도한국 묻힌 조상얘기엔 눈시울 붉혀◆중국 내 경상도 마을 ‘알라디’지난달 18일 오후 2시쯤 중국 길림성 길림시 용담구 우라가진 알라디촌. 길림시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내달리자 고속도로 변에 커다란 알림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알라디촌 조선족민속촌’이라고 적혀 있었다. 중국 내 경상도 마을이라고 하지만, 중국 내 다른 마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양쪽으로 수양버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5분가량 더 달려가자 한옥 모양으로 세워진 마을 출입문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에는 ‘어서 오세요’라는 한글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출입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에는 서까래 등을 올린 10채가량의 한옥이 모여 있는 한옥민속촌이 나타났다. 발걸음을 옮긴 곳은 ‘알라디 조선족 소학교’. 학교 운동장 안으로 들어서자 ‘알라디 조선족민속촌 촌민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라는 한글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동네 주민들은 이틀 뒤 열릴 ‘제5회 알라디 민속촌 고추문화 관광축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대회 준비를 위해 운동장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빼놓지 않는 것이 바로 ‘씨름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매년 경기종목에서 씨름을 빼놓지 않고 있는 것. 한복을 차려입고 장구와 꽹과리, 징 등으로 사물놀이를 벌이는 것도 필수요소 중 하나라고 한다. “고춧가리가 모자린다. 버뜩 좀 더 챙기온나.” “미주바리 단디 묶어라. 국물 흐르마 우얄라 카노.”다음 날인 19일 오전 다시 찾은 알라디 김치공장에서는 경상도 사투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고추로 유명한 알라디는 ‘민속촌 고추문화 관광축제’ 때 이곳을 찾는 공산당 간부 등에게 한국 전통의 고추장과 된장, 그리고 김치를 담가 선물하고 있다. 김치를 담그고 있던 방금자씨(여·58)는 “시집을 가기 전에는 친정어머니, 가고 나서는 시어머니가 담그는 김치를 보고 그대로 만들고 있으예”라며 “이곳에 사는 조선족의 집 마당에는 다들 배추를 심고, 어릴 때부터 매년 김장하는 거 보고 자라니까 따로 배우는 것은 없지예. 말투도 늘 듣던 거라서”라며 웃어 보였다. 함께 있던 김순덕씨(여·48)는 “한국에서 오셨니껴. 맛있니더. 먹어 보이소”라며 김치를 길게 찢어 건넸다. “너무 크다. 썰어 달라”고 하자, “김치는 손으로 찢어서 이렇게 먹어야 지맛 아입니꺼. 밥이 있어야 하는데 아십네예”라고 말했다. 부모의 고향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투는 경상도 사투리 그대로였다.◆빼앗긴 국적, 서류에 막힌 귀국중국으로 건너온 지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이들은 아직도 경상도의 말과 문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1세대는 거의 다 죽었고, 한국에서 태어나 부모 등에 업혀서야 중국으로 건너왔던 1.5세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그런 탓에 현재 살고 있는 이들은 한국보다 중국에서 더 오래 살아 이곳이 편하다고 말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이런 마음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표현했다.고향에 대한 기억도 없고, 심지어 중국에서 태어난 이들도 한국 땅에 묻힌 할아버지 이야기에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어렵게 말문을 열자 눈물샘도 열렸다. 깊게 파인 얼굴 주름을 타고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글·사진=중국 길림시에서 노인호기자 sun@yeongnam.com▨도움말=<사>인문사회연구소 신동호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일제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이주한 경상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중국 길림성 알라디촌의 김치공장에서 조선족 여인들이 김치를 담가 비닐봉투에 담고 있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경상도 사투리는 물론, 집집마다 배추를 키워 겨울을 앞두고는 김장을 한다.경상도가 고향인 이들이 모여 사는 중국 길림성 알라디촌 출입구. 마을로 들어오는 쪽에는 ‘어서 오세요’, 나가는 쪽에는 ‘반갑습니다’‘또 오세요’라는 안내현수막이 한글로 내걸려 있다.
2015.10.06
[디아스포라 .6] 流民이 된 사람들
1943년 탄광 징용 끌려온 아버지60년대까지 부두서 귀국선 고대평생 귀향 짐 꾸려놓고 풀지못해유언도 “나 대신 고향 꼭 가거라”70년대 와서야 ‘러’ 국적 취득사할린 동포 복잡한 귀국절차에“남고 싶어 남은 것도 아닌데…”사할린 코르사코프시(市) 한인회장 이태준씨(66)는 부두에 나가 귀국선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까지 선하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자 사할린 섬 곳곳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할린 남단의 항구도시 코르사코프로 몰려들었다. 떠나온 고향,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의 아버지 이상한씨(1918~85)도 귀국선을 기다렸던 수많은 한인 중 하나였다. 영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1943년 5월 일제의 징용에 끌려 사할린에 도착했고, 브이코프 탄광에서 노무자로 일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코르사코프 항구로 가면 고국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을 데리고 코르사코프로 왔다. 귀국선이 본격적으로 코르사코프 부두로 들어온 것은 1948년부터다. 그러나 모두 일본 배였고, 고국 조선의 배는 한척도 들어오지 않았다.“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태우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조선인이 일본 국적자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인 혹은 일본인과 결혼한 사람, 그 자식들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수많은 배가 부두로 들어왔지만 조선 사람이 탈 배는 없었습니다. 소련도 조선인의 귀국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코르사코프 부두 구릉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조선인들은 멀리서 배가 나타나면 바닷가로 우르르 달려갔다. 그러나 조선인들을 태울 배는 없었고, 그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서야 했다. 짧은 여름이 가고 혹독한 겨울이 닥치자 사람들은 바닷가 구릉에 천막을 치거나 움막을 짓고 살며 배를 기다렸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비우고 떠난 집에 들어가 살면서 배를 기다렸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아버지는 일요일만 되면 부두로 나가 배를 기다렸습니다. 조선 사람들 상당수가 삼삼오오 짝을 이루고 앉아 배를 기다렸습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이면 종일 모여앉아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일어서 집으로 갔습니다. 배가 온다, 언제 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 때마다 사람들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우리끼리 배를 타는 순번을 정하기도 했습니다.”언제라도 길이 열리면 바로 고향으로 가겠다고 아버지는 평생 짐보따리를 몇 개나 싸놓고 풀지도 않고 간직했다. 그랬던 아버지는 “언젠가 나 대신 고향땅을 꼭 한번 다녀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면서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귀국선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걸요.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아버지는 집에서도 러시아말을 쓰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전에는 밖에서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말을 쓰더라도 집에서는 한국말만 하도록 했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조국의 언어였으니까요.”귀국선이 결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할린 동포들은 조금씩 러시아말을 쓰기 시작했고,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조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고, 아이들 장래를 위해서라도 러시아말을 쓰고, 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러시아말을 쓰기 시작한 탓에 사할린 동포 2세 중에는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에 종사하거나 교수가 되거나 고위직 공무원에 진출한 사람이 거의 없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던 사할린 북부 지방 사람들이 귀국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러시아말을 배우고 러시아의 문화에 편입하면서 전문직이나 고위직 공무원에 다수가 진출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 회장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사할린 동포 1세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돌아가지 못했다. 사할린에 오고 싶어 오지 않았고, 사할린에 남고 싶어 남은 것도 아니다. 한국 정부는 영주 귀국을 한 사람에 한해서 집도 주고, 2만달러씩 위로금도 준다. 약간의 연금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영주 귀국은 절차가 복잡할 뿐만 아니라 가족 간 또 하나의 이별을 담보로 한다. 사할린에 자식들을 모두 두고 떠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가고 싶어도 여건상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이들을 마치 외국인처럼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방치하니 사할린에 있는 동포는 동포가 아니란 말이냐는 자조섞인 말도 터져나온다. 많은 사람이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섭섭해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글·사진=러시아 코르사코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1943년에 강제징용된 이태준씨 아버지와 고향(영천) 사람들이 사할린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태준 코르사코프시 한인회장.
2015.09.25
[디아스포라 .5] ‘이산’의 역사가 시작된 곳
1945년 8월 광복이 되었다. 사할린의 4만여 한인에게 광복은 곧 ‘집에 가는 것’이었다. 브이코프, 홈스크, 삭조르스크, 우글레고르스크에서 살던 한인들은 살던 집을 버리고 가꾸던 텃밭도 남겨둔 채 봇짐을 둘러메고 수백㎞ 떨어진 코르사코프항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참새떼처럼 까맣게 모여앉아 사할린 겨울의 모진 바람을 맞으며, 고향 바다 어디쯤에선가 올 귀국선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먹고살기 위해 일터로 나갔다가도 해만 떨어지면 행여 배를 놓칠까 항구로 다시 몰려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기다리다 ‘누군가는 굶어 죽고, 누군가는 얼어 죽고 또다른 누군가는 미쳐 죽어’ 무덤이 언덕을 메웠다. ◆ 버려지고 잊힌 사람들코르사코프는 사할린의 가장 큰 항구도시다. 사할린으로 들어오는 교통수단이라고는 배편뿐이던 예전에는 사할린과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주된 교통 요지였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인들이 귀환할 때 이용했던 귀항지이기도 하다. 사할린 한인들은 배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들리면 항구로 몰려들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곧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리라’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배는 끝내 오지 않았고 기다림에 지친 이들은 고향 땅이 보이는 언덕에 하나둘씩 묻혔다.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위령탑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탑이다. 항구에 까맣게 모여든 4만 사할린 韓人배 놓칠까 못 떠나다 굶어죽고 미쳐죽고…연이은 분단·전쟁·가난에 귀국길 좌초日은 1949년 마지막배까지 31만 이송 대조51년 日국적 박탈 뒤 蘇는 무국적자로 억류“이곳서 서러움 많아도 곧 한국 갈거니까”소련국적 취득 거부하며 끝까지 버텼지만…종전 이후 남사할린에 남아있던 조선인은 4만3천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1946년 12월9일 체결된 ‘소련지구송환미소협정’에 따라 귀환대상자는 ‘일본인 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한정됐다. 일본은 일본 호적에 등재된 사람만 일본인으로 간주하고 본국으로 송환했다. 1946년 12월 일본의 귀국선이 홈스크항에서 일본 하코다테로 향한 후 1949년 7월23일 마지막 귀국선 운센마루가 사할린을 떠날 때까지 총 31만명의 일본인이 귀국했다. 우리나라는 일제 말 인구의 20% 이상이 해외에 거주하는 전형적인 유민(流民)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세기까지 해외 거주 인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민의 역사는 일본 침략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이들 유민은 마땅히 한국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연이은 분단과 전쟁, 가난으로 귀국길은 막혀 버렸다. 사할린 한인들에 대해 가장 직접적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러시아는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와 노동력 보충이라는 현실적 요구에 따라, 한국은 반공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을 버렸다. 그렇게 이산의 아픈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70년, 그렇게 헤어진 이산가족과 해외동포의 귀환과 정착을 위한 제도는 여전히 미미하다.◆ 무국적자로 50년을 버티다 사할린에 남겨진 한인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남사할린에 남겨진 일본인을 송환시키면서 조선인은 배제했다. 그러다가 일본은 1951년, 사할린 한인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해 버렸다. 소련은 국적법에 따라 사할린 한인을 무국적자로 규정하였다. 러시아는 20만명 넘는 일본인들이 귀환하면서 사할린 내 노동력 부족 위기에 직면하자 한인들을 무국적자라는 취약한 위치로 만들어 이들을 사할린에 억류시켰던 것이다. 무국적자는 러시아 내에서도 거주지에서 4㎞ 이상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권이 제한됐다. 사실상 살고 있던 행정구역 밖으로 못 벗어났던 셈이다. 그렇게 사할린 한인들의 또다른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 시작됐다.영일군이 고향인 김임순씨(79)와 남편 한문형씨(82)는 영주 귀국한 한인 1세대다. 강제 징용된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사할린으로 왔다. 아버지는 젠놉스크에서 탄부로 일했다. 광복이 돼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온 가족이 이곳 코르사코프로 왔다. 배를 기다리던 그 하루하루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기다리는 날이 길어질수록 아버지는 자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는 날엔 고향 생각에 울기만 했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울었다. “친한 소련 공산당원이 ‘소련 국민은 한국을 가도 무국적자인 한인은 절대 한국을 갈 수 없다’고 충고를 했어. 전 세계 어디라도 소련 국민은 가지만 한인은 못 간다. 그래서 소련 국적을 받으면 한국 가는 길이 열리려나 하면서 그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여 1952년에 일찌감치 소련 국적을 받았지. 하지만 버티다가 힘들고 모진 세월을 보낸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무국적자 사할린 한인들은 취업 자체도 제한적이었고 급여나 진급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았다.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고 무국적의 설움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끝끝내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던 것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 행여라도 국적이 문제 되지 않을까 하는 오직 그 이유였다. “소련 국적이 있으면 한국으로 못 가면 어떻게 하나, 그게 걱정이었지. 당장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고, 멀리 갈 수도 없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도 못해도 곧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던 거지. 언제든지 한국 간다. 가야 되지. 거기 친척들도 있고 부모도 있고 형제들도 있으니 그게 언제라도 가야 한다. 그때가 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있어야지. 그랬던 거야.” 그들에게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고향으로 떠나는 그날을 위해 존재했을 뿐이었다. 이토록 간절한 그들의 열망에 우리는 어떤 화답을 했던가.글·사진 = 러시아 코르사코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맑은 날이면 멀리 홋카이도가 보이는 러시아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 이곳에서 4만여 한인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렸다. 작은 사진은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위령탑. 이역만리에서 고향을 그리다가 죽은 이들은 넋이라도 고향으로 가겠다며 고향 방향으로 묘를 썼다고 한다.
2015.09.18
[디아스포라 .4] 일제와 세월이 갈라놓은 부부
그를 ‘배용권’(99)으로 불러야 할까, ‘배태권’(95)으로 불러야 할까. 모든 공식 기록상으로 그는 ‘99세 배용권’이다. 그러나 부모가 지어준 원래 이름은 ‘배태권’이다. ‘배태권’인 그가 ‘배용권’이 된 것은 71년 전, 그의 형 ‘배용권’ 앞으로 징용영장이 날아오면서부터다. 24세 때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가9개월 뒤 終戰…너도나도 항구로“하지만 조선行 배는 오지 않았소”막장서 고향·가족 지워가며 살다45년 만에 일본서 어머니와 재회고향방문때 반세기만에 만난 아내“못지킨 약속…다음生엔 함께살자”◆올 수도 갈 수도 없던 세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집(그의 고향은 경북 공산면 덕산리: 현재의 대구시 동구 덕곡동)으로 징용영장이 날아왔다. 징용 대상자는 형 배용권이었다. “당시 나는 결혼한 지 1년이 채 안되어 자식이 없었소. 형님한테는 자식이 있었고. 그래서 집안에서 의논해서 내가 형 이름으로 징용을 왔소.” 그날 이후 그는 ‘배용권’이 되었다. ‘2년이면 돌아온다’고 갓 결혼한 아내와 굳게 약속하고 떠났다.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대구 시내 사람들과 성서면, 공산면, 하양면, 영천 사람들까지 징용영장을 받고 나온 180명이 대구 칠성정거장 옆 조일여관에서 하루를 묵은 뒤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에서 다시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배를 탔고, 기차와 배를 번갈아 타며 아오모리와 하코다테, 와카나이를 지나 사할린까지 왔다. 꼬박 보름이나 걸려서 닿은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검은 땅, 오도마리(브이코프)였다. “1944년 12월에 갔소. 그리고 9개월쯤 일했는데 전쟁이 끝났다고 합디다.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간다며 너도나도 탄광촌을 떠나 항구가 있는 코르사코프로 갔소. 하지만 조선으로 돌아가는 배는 오지 않았소.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졌소. 어떤 사람은 코르사코프에 눌러 앉았고, 어떤 사람은 사할린스크로 갔고, 어떤 사람은 돌린스크로 갔고, 또 어떤 사람은 먹고 살 길이 없어 다시 브이코프 탄광으로 돌아왔소.”배운 것도 가진 것도 장사를 할 재주도 없던 그는 브이코프 탄광에서 계속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제징용으로 탄광에 도착한 이후 30여 년의 세월을 검은 석탄을 캐며 살았다. 캄캄한 어둠 속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막장 같은 삶이었다. ◆다음 세상에서 같이 삽시다“전쟁이 끝나고도 10년 가까이 혼자 살았소. 그러다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여자를 만나 아들·딸 자식을 다섯 낳았소. 지금은 다 자라 시집 장가 갔고, 손자 손녀들도 있소. 고향에 두고 온 사람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올 수도 갈 수도 없는 세월이었소.”고향의 부모와 형제, 아내를 기억에서 지워가며 살던 그는 1989년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일본을 방문했고, 거기서 고향의 가족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인의 도움으로 어머니와 동생을 일본에서 만났다. 아버지와 형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늙은 어머니는 그의 얼굴을 보자 “니가 살아 있었나. 죽은 줄 알았는데 니가 살아 있었나”며 “내가 이렇게 오래 사니 니를 다시 본다. 니를 다시 본다”며 울었다. 그렇게 재회하고 2년 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대구의 고향 마을도 방문했다. 아버지 산소도 찾았고 아내도 만났다. 아내는 11년 동안이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남편을 기다리다 자식이 있는 남자와 재혼해 자식을 낳고 산다고 했다. 2년 만에 돌아온다던 남편은 50여 년의 세월을 지나 할아버지가 되어 돌아왔다. 야속한 세월이었다. 아내는 말했다. “우리 이 세상에서는 네 잘못했느니 내 잘못했느니 따지지 맙시다. 세월이 그래 놓았지 않습니까. 이 세상 떠나면,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우리 같이 사입시다.” 그는 “고향도 많이 변했더라. 이제는 골짜기 산에는 농사를 안 지어도 될 만큼 잘산다고 하더라. 나라가 못 살아서 우리가 이래 됐는데, 이제 잘산다고 하니 좋소”라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글·사진=러시아 브이코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배태권씨가 징용으로 끌려와 30여 년을 일한 사할린 브이코프 탄광. 현재 가동을 중지한 브이코프 탄광은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으며, 인적 끊긴 탄광 여기저기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평생을 형의 이름으로 살아온 배태권씨가 브이코프 문화센터에서 자신의 지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2015.09.11
[디아스포라 .3] 남사할린 최대의 강제징용 탄광촌
사할린 주도(州都)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서쪽으로 비포장길을 1시간30분 가량 달리면 일제강점기 가장 많은 한인이 끌려간 탄광마을 브이코프를 만난다. 1939년 400여명의 조선인이 끌려온 이래 최대 1천700여명이 이곳에서 강제노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경상도, 전라도 이남 지역 사람이 90%였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조선인의 집단 강제동원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끌려온 대부분은 탄광이나 벌목장, 비행장·도로·철도 등 군수시설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1944년 7월말 현재 남사할린에서 가동하던 26개 탄광 가운데 조선인은 25개 탄광에서 7천801명(탄광부 6천120명)이 일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 시간이 멈춘 곳, 고통은 계속된다 한때 남사할린 최대 규모의 탄광촌이던 브이코프의 시간은 1940년대에서 그대로 멈췄다. 가라후토 광업주식회사가 운영하던 브이코프의 나이부치 탄광은 당시 약 7천만t의 저탄량을 자랑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채탄량이 2천t을 넘었다. 하지만 채탄량이 줄어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은 이곳을 떠났고 마을은 생기를 잃었다. 집은 색이 바랬고 인적은 끊겼다. 강제로 끌려와 청춘을 탄광에서 보내야 했던 20명을 포함한 370여명의 한인이 아직 이곳에 살고 있다. 1939년 이후 사할린에 끌려온 탄부들은 가족들을 불러올 수 있었다. 일본이 독신 노동자의 가족을 불러오거나 같은 마을의 친지들을 불러들이는 ‘연고모집’을 적극 장려했기 때문이다. 탄부들의 탈출을 방지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탄광인력으로 투입하려는 계산이었다. 브이코프로 강제 징용 온 탄부들도 탄광회사를 통해 가족들을 불렀다. 그래서 브이코프 탄광촌은 조선에서 온 탄부들과 그 가족이 마을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사할린의 작은 조선마을’인 셈이었다.韓人 1700명 강제노역 브이코프日, 탈출 막으려 가족도 불러들여戰線 확대되자 이번엔 강제징병종전 후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혈육과 생이별…이국서 삶 마감브이코프 문화센터에서 만난 김영자씨(73)도 그랬다. 김천이 고향인 아버지 김개복씨(1905~1958)가 이곳 브이코프로 끌려온 것은 1940년. 다섯 살, 두 살이던 두 딸을 데리고 어머니 조순금씨(1914~2009)는 “남편이 있는 곳으로 보내준다”는 말에 이 먼 곳으로 왔다.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탄광에서 일하던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 여섯째 막내가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태어났을 때였다. 그 삶이 어땠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씨는 “그런 세월이 없었다”고 치를 떨었다.“머리 검고 눈동자가 검은데 아무리 여기서 태어나고 살았다고 여기가 고향일 수 있겠느냐”는 김씨는 올림픽 이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시선이 좋아졌다. 무조건 한국이 강한 나라,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제일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 이중징용, 사할린서 다시 일본으로필리핀에서 버마(현 미얀마)까지 전선을 확대했던 일본은 전쟁 수행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대책 마련에 나섰다. 조선에서 대대적 식량공출과 학도병 등 징병과 강제징용 등 인력충원을 했고 본토와 사할린 등지에서는 산업현장의 효율적인 생산과 인력관리를 위한 통폐합과 노동력의 재배치를 추진했다. 이에 따라 사할린의 주요 탄광을 휴·폐광하고 노동력을 일본 본토로 재배치하게 된다. 사할린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이동하는, 즉 ‘이중징용’(일본은 이를 ‘전환배치’라 표현했다)을 당하게 된 것.이에 따라 총 26개 탄광 중 에스코르(현 우글레고르스크) 이북의 탄광 14곳이 문을 닫고 조선인 3천여명에 대한 이중징용이 이뤄졌다. 이들 중 가족이 있는 인원은 1천여명, 가족의 수는 3천500여명에 달했다. 가족이 일본으로 함께 이동한 경우는 후쿠시마로 간 125명과 개인적으로 이동한 서너명이 전부였다. 이중징용은 1944년 8월25일부터 9월16일 사이 삼엄한 경비과 감시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 지역은 후쿠시마, 이바라키, 규슈(후쿠오카, 나가사키)였다. 1945년 8월15일. 벼락처럼 찾아온 광복. 이중징용된 조선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의 혼란 속에서 사할린으로 가는 교통망은 무너졌다. 규슈의 후쿠오카에서 사할린으로 돌아가는데 무려 석 달이 걸렸다. 홋카이도 와카나이까지 어렵게 갔더라도 소련이 점령해 해안선이 봉쇄된 사할린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할린 조선인이 폭격으로 몰살 당했다, 사할린의 가족들이 귀국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믿었던 것이 탈이었다.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할린에 있는 가족과의 재회는 점점 어려워졌다. 사할린으로 떠날 때는 부모·형제·자매와 헤어지고 일본으로 이중징용되면서 사할린의 처자식과 헤어져야 했던, 고향으로 갈 수도 사할린으로 갈 수도 없었던, 그들의 아픈 역사다. 글·사진= 러시아 브이코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의 사할린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비.가라후토 광업주식회사가 운영하던 사할린 브이코프의 나이부치 탄광은 한때 남사할린 최대 규모의 탄광촌이었지만 채탄량이 줄면서 탄광도 문을 닫았다. 가동이 멈춘 나이부치 탄광의 모습이 을씨년스럽다.강제 징용된 아버지를 따라 온가족이 고향인 김천을 떠나 사할린 브이코프로 옮겨 온 김영자씨.
2015.09.07
[디아스포라 .2] 낯선 땅에서 외롭게 눈감다
우리가 ‘사할린’이라고 부르는 곳은 정확하게 말하면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이다. 러시아에서 추방 당한 죄수들이 살던 유형지인 이곳을 안톤 체호프는 ‘슬픈 틈새’라고 불렀다. 조선에서는 빛나는 섬 ‘화태도(華太島)’로, 일본에서는 자작나무의 섬이라는 뜻으로 ‘가라후토’라고 불렀다. 1905년 러일전쟁 후 남사할린을 차지한 일본의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1945년까지 약 15만명의 조선인이 사할린에 들어왔다. 그중 75%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72년前 경주 고향인 고행자씨 父초야도 못치르고 이역 탄광으로1년 뒤 생이별한 아내와의 재회 곧 돌아갈 생각에 고된 삶 감내새벽마다 韓 라디오 들으며 눈물좋은 건 갖고갈거라 평생 모으다1990년 소련 개방후 고향땅 밟곤이틀 내내 울다가 다시 사할린行사할린 총 인구 50만명 중 18만여명이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살고 있다. 이곳의 한인은 1만6천여명. 사할린 전체 한인(3만1천600명)의 절반이 되는, 가장 많은 한인이 살고 있는 도시다. 한인은 러시아 소수민족 중 최대(6.5%)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살고 있는 고행자씨(69)의 아버지 고승생씨(1918~1994)의 고향은 경주다. 1943년 결혼했다.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날 밤, 초야도 치르지 못한 신혼방으로 일본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열여덟 철없던 신부 윤임순씨(1927~2007)는 끌려가는 남편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날이 밝자 부모님이 남편의 사진 한 장을 주었다. 처음으로 찬찬히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로부터 1년.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윤씨는 한 장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무작정 사할린으로 왔다. 남편은 샥조르스크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있었다. 탄광의 노동 조건은 열악했다. 채탄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못 올라오게 했기 때문에 하루 10~12시간, 때로는 15시간도 일해야 했다. 노무자들은 함바라 불리는 합숙소에서 통제된 생활을 강요당했고 반항하거나 도망치다가는 문어방으로 불리는 ‘타코베야’라는 형벌방에 갇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2명이 들어가면 1명은 죽어서 나온다는 곳이었다. 임금은 형식적으로 지급되었지만 고향으로의 송금이나 강제저축, 후생연금 등의 명목으로 공제되고 용돈 정도만 지급받았다. 일당제로 지급되는 임금은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작업을 쉴 때는 받을 수 없었고 숙박비, 노동복, 장비 등의 명목으로 또다시 떼이게 마련이었다. 강제저축 통장은 구경도 하지 못했고 이마저 일본의 패전과 함께 허공에 사라졌다. 일본 우정성의 조사에 따르면 1997년 기준으로만 59만계좌에 1억8천만엔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향으로 곧 돌아갈 생각에 고씨의 아버지도 임금의 대부분을 고향의 형님에게 부쳐달라고 탄광회사에 말했다. 그러나 탄광회사는 몇 번 돈을 부쳐주는 듯 하더니 더 이상은 부쳐주지 않았다. 돈을 저금해서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런 탓에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을 했지만, 집은 지독히 가난했다. 아침을 먹고 점심 도시락을 싸서 탄광으로 일하러 가는데, 도시락을 쌀 밥이 있을 리 없었다. 윤씨는 산나물을 뜯어 죽을 끓여 5남매의 주린 배를 채웠다. 그러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시장에 내다 팔았다. 텃밭 한켠에서는 배추, 감자, 당근을 키웠다. 러시아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라 1980년까지도 농사는 한국 사람들이 주로 지었다. 지금도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시장 ‘바자르’에서는 김치나 직접 기른 채소와 꽃을 파는 한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씨의 기억에 남은 아버지는 새벽마다 라디오 틀어놓고 한국 소식 듣던 모습이다. 이불이 들썩이도록 소리내어 운 적도 여러 번이다. 좋은 물건이 생기면 한국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가겠다고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결국엔 낡고 쓸모없게 되어버린 것들이었다. 고향땅을 밟기 전엔 절대 눈을 못 감는다며 실낱 같은 희망으로 평생을 살았던 고씨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소원을 이루었다. 1990년 소련이 개방되면서 고씨는 부모님과 함께 고향 큰 집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그 이틀 동안 아버지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내내 꺼이꺼이 울기만 했다. 고씨도 부모님의 고향,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한다. 한국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사할린에 한국의 발전된 모습이 소개된 것도 한몫을 한다. 고씨는 “법 개정이 되어 45년 이후 출생자들도 영주 귀국이 가능하다면 한국으로 가고 싶다”면서 “국적은 러시아지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 사람 아닌가. 아이들에게 직접 체험한 한국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글·사진=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의 한인묘. 러시아인들이 봉분을 만들지 않고 비석만 세우는 데 반해 한인들은 봉분을 만들고 잔디도 심어, 뚜렷하게 구분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귀향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은 가슴 깊이 간직해 온 고향 주소를 차가운 비석에 남긴 채 죽어 이곳 공동묘지에 묻혔다.한인2세 고행자씨. 고씨의 아버지는 일본군에 의해 신혼 첫날밤 사할린으로 끌려와 탄광 노역을 했다.
2015.08.28
[디아스포라 .1] 돌아오지 못한 사람...사할린으로 끌려갔던 조선인과 후손 3만여명, 아직도 그곳에…
집.에.가.자.1945년 8월15일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 일본의 항복 선언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 맞춰 구호를 외친다.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의 한 장면이다. 그들이 광복의 기쁨에 환호하며 외친 말은 ‘대한독립만세’가 아니라, ‘집에 가자’였다. “만주에서 우리는 지붕이 무너져도 고치지 않았어. 왜 그런지 알아? 곧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이청천 독립군 부대 저격수인 ‘암살’의 여주인공 안옥윤의 말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그들은 어떻게 되었던가.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고향으로 돌아갔던가. 집에 간다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그날로부터 무려 70년. 여전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사할린, 그곳에만 아직도 3만여명이 ‘남아’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들의 물음에 우리는 답해야 한다.◆ 누구도, 무엇도 잊지 않겠다지난 16일 오전 10시 . 광복 70주년을 맞은 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이날 하루는 아주 특별하게 시작됐다. 브이코프, 홈스크, 우글레고르스크, 코르사코프 등 사할린 전역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이 유즈노사할린스크 중심에 있는 ‘승리의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러시아의 전승기념 광장이다. 정장을 곱게 차려 입은 한인들의 헌화와 참배가 길게 이어졌고, 사물놀이와 풍악대의 화려한 공연도 펼쳐졌다.행사 참석자들은 30여분간 놀이패를 따라 거리행진을 했다. 휴일을 맞아 느긋한 아침을 보내던 러시아인들이 요란한 풍악소리를 듣고 거리로 몰려들었다. 日 강제연행으로 7만여명 징용전쟁 끝났지만 협정으로 발묶여한-소 수교때까지 45년간 잊혀져귀환 못하고 살아가는 한인들사할린 최대 소수민족으로 정착해마다 광복절때 한자리 모여 풍악 울리고 한국음식 함께 나눠임용군 사할린주 한인회장은 “광복절이 원래 15일이지만, 러시아 한인들은 양력 8월15일을 추석 명절로 쇠고 있어서 행사를 하루 늦췄다”면서 “해마다 맞는 광복절이지만 70년이 되는 올해의 의미는 더욱 특별하고 행사도 예년보다 신경을 써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올레그코제먀코 사할린 주지사, 블라디미르 박 사할린 네벨스크시 시장 등도 행사에 참석했다. 인구 50만여명의 사할린에서 한인은 최대의 소수민족이다. 40여분간에 걸친 거리 행진 끝에 행렬이 다다른 곳은 스탈리차 체육관. 1천여명의 한인이 참석한 가운데 음악공연, 장기자랑, 노래자랑 등이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행사가 진행되는 체육관 옆 잔디밭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함께 풀어놓고 한바탕 질펀한 잔치판도 벌인다. 빈대떡과 인절미와 술떡, 김치와 깍두기, 집에서 담갔다는 막걸리가 한국식 그대로다. 70년을 잊지 않고 이 맛을 기억하고 지켜온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고국에서 온 가수의 노래가 울려퍼지자 행사도 절정으로 치닫는다.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흥에 겨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노래에 맞춰 태극기와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잠시 이곳이 러시아라는 사실을 잊는듯 하다. 마치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 그 곳, 고향에라도 온 듯. ◆ 검은 대륙으로 끌려간 조선인사할린의 일제 때 지명은 가라후토, 화태(樺太)다. 아이누어로 ‘자작나무의 섬’이란 뜻이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승전의 대가로 북위 50도 이남, 사할린의 절반을 러시아로부터 할양받았다. 사할린은 일본의 군사요지였다. 이곳에 일본은 공군 비행장, 해군기지 등의 건설 공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했고 목재, 석탄 등을 일본으로 내보내는 보급기지로 삼았다. 본격화된 식민지 개발은 필연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였으며 그 대상은 조선인이었다. ‘자유모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지만 일본은 ‘조선인내지이입 알선요강’과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관알선’ ‘징용령’이라는 강제연행으로 무차별 차출에 나섰다. 그렇게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은 7만명을 넘었다. 1944년 8월 연합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이곳에서 생산한 석탄을 일본으로 운반하기 어렵게 되자 이곳의 조선인 노동자를 다시 일본의 탄광으로 재징용하는 ‘이중징용’의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른바 전환배치 혹은 이중징용의 희생자는 최소 3천여명에서 많게는 2만여명에 이른다. 1945년, 전쟁은 끝났고 사할린에 살고 있던 4만3천여명의 조선인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1946년 12월9일 체결된 미소협정에 따라 귀환 대상자는 일본인 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한정됐다. 일본은 일본 호적을 기준으로 일본인만 받아들였고 당시 조선 호적으로 편제된 조선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6년 12월5일부터 49년 7월22일까지 총 29만2천590명의 일본인들이 일본땅으로 귀환했다. 1956년 10월19일 옛소련과 일본은 수교에 합의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1957년 8월1일부터 59년 9월28일까지 잔류 일본인,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 그 가족의 귀환도 이루어져 1천541명의 조선인이 일본으로 송환됐다.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기까지 45년간 4만여명의 강제동원된 조선인과 그 후손들은 사할린에 버려졌다. 세상은 그렇게 그들을 잊었다. 현재 사할린에는 한인 1세 600여명을 포함해 3만여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 글·사진=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 중심에 있는 ‘승리의 광장’에서 지난 16일 풍악대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유즈노사할린스크 스탈리차 체육관에서 지난 16일 열린 광복 70주년 기념 축하 공연에 참석한 한인들이 러시아 국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즐거워하고 있다.
2015.08.21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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