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6] 流民이 된 사람들

  • 이은경
  • |
  • 입력 2015-09-25   |  발행일 2015-09-25 제5면   |  수정 2022-05-19 09:56
‘자식은 사할린에 두고…’ 韓 정부의 영주귀국 조건에 또 발목
<>이태준 코르사코프시 한인회장
20150925
1943년에 강제징용된 이태준씨 아버지와 고향(영천) 사람들이 사할린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태준씨 제공>

 

1943년 탄광 징용 끌려온 아버지
60년대까지 부두서 귀국선 고대
평생 귀향 짐 꾸려놓고 풀지못해
유언도 “나 대신 고향 꼭 가거라”
70년대 와서야 ‘러’ 국적 취득

사할린 동포 복잡한 귀국절차에
“남고 싶어 남은 것도 아닌데…”


사할린 코르사코프시(市) 한인회장 이태준씨(66)는 부두에 나가 귀국선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까지 선하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자 사할린 섬 곳곳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할린 남단의 항구도시 코르사코프로 몰려들었다. 떠나온 고향,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의 아버지 이상한씨(1918~85)도 귀국선을 기다렸던 수많은 한인 중 하나였다. 영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1943년 5월 일제의 징용에 끌려 사할린에 도착했고, 브이코프 탄광에서 노무자로 일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코르사코프 항구로 가면 고국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을 데리고 코르사코프로 왔다.

귀국선이 본격적으로 코르사코프 부두로 들어온 것은 1948년부터다. 그러나 모두 일본 배였고, 고국 조선의 배는 한척도 들어오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태우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조선인이 일본 국적자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인 혹은 일본인과 결혼한 사람, 그 자식들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수많은 배가 부두로 들어왔지만 조선 사람이 탈 배는 없었습니다. 소련도 조선인의 귀국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코르사코프 부두 구릉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조선인들은 멀리서 배가 나타나면 바닷가로 우르르 달려갔다. 그러나 조선인들을 태울 배는 없었고, 그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서야 했다. 짧은 여름이 가고 혹독한 겨울이 닥치자 사람들은 바닷가 구릉에 천막을 치거나 움막을 짓고 살며 배를 기다렸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비우고 떠난 집에 들어가 살면서 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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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코르사코프시 한인회장.
“1960년대 중반까지도 아버지는 일요일만 되면 부두로 나가 배를 기다렸습니다. 조선 사람들 상당수가 삼삼오오 짝을 이루고 앉아 배를 기다렸습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이면 종일 모여앉아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일어서 집으로 갔습니다. 배가 온다, 언제 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 때마다 사람들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우리끼리 배를 타는 순번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언제라도 길이 열리면 바로 고향으로 가겠다고 아버지는 평생 짐보따리를 몇 개나 싸놓고 풀지도 않고 간직했다. 그랬던 아버지는 “언젠가 나 대신 고향땅을 꼭 한번 다녀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면서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귀국선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걸요.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아버지는 집에서도 러시아말을 쓰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전에는 밖에서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말을 쓰더라도 집에서는 한국말만 하도록 했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조국의 언어였으니까요.”

귀국선이 결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할린 동포들은 조금씩 러시아말을 쓰기 시작했고,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조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고, 아이들 장래를 위해서라도 러시아말을 쓰고, 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러시아말을 쓰기 시작한 탓에 사할린 동포 2세 중에는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에 종사하거나 교수가 되거나 고위직 공무원에 진출한 사람이 거의 없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던 사할린 북부 지방 사람들이 귀국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러시아말을 배우고 러시아의 문화에 편입하면서 전문직이나 고위직 공무원에 다수가 진출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 회장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사할린 동포 1세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돌아가지 못했다. 사할린에 오고 싶어 오지 않았고, 사할린에 남고 싶어 남은 것도 아니다. 한국 정부는 영주 귀국을 한 사람에 한해서 집도 주고, 2만달러씩 위로금도 준다. 약간의 연금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영주 귀국은 절차가 복잡할 뿐만 아니라 가족 간 또 하나의 이별을 담보로 한다. 사할린에 자식들을 모두 두고 떠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가고 싶어도 여건상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이들을 마치 외국인처럼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방치하니 사할린에 있는 동포는 동포가 아니란 말이냐는 자조섞인 말도 터져나온다. 많은 사람이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섭섭해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글·사진=러시아 코르사코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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