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3] 남사할린 최대의 강제징용 탄광촌

  • 이은경
  • |
  • 입력 2015-09-07   |  발행일 2015-09-07 제5면   |  수정 2022-05-19 09:55
사할린서 또 일본으로 ‘二重징용’…그들을 기억하는 건 찬 비석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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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의 사할린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비.

사할린 주도(州都)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서쪽으로 비포장길을 1시간30분 가량 달리면 일제강점기 가장 많은 한인이 끌려간 탄광마을 브이코프를 만난다. 1939년 400여명의 조선인이 끌려온 이래 최대 1천700여명이 이곳에서 강제노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경상도, 전라도 이남 지역 사람이 90%였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조선인의 집단 강제동원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끌려온 대부분은 탄광이나 벌목장, 비행장·도로·철도 등 군수시설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1944년 7월말 현재 남사할린에서 가동하던 26개 탄광 가운데 조선인은 25개 탄광에서 7천801명(탄광부 6천120명)이 일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 시간이 멈춘 곳, 고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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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후토 광업주식회사가 운영하던 사할린 브이코프의 나이부치 탄광은 한때 남사할린 최대 규모의 탄광촌이었지만 채탄량이 줄면서 탄광도 문을 닫았다. 가동이 멈춘 나이부치 탄광의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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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징용된 아버지를 따라 온가족이 고향인 김천을 떠나 사할린 브이코프로 옮겨 온 김영자씨.

한때 남사할린 최대 규모의 탄광촌이던 브이코프의 시간은 1940년대에서 그대로 멈췄다. 가라후토 광업주식회사가 운영하던 브이코프의 나이부치 탄광은 당시 약 7천만t의 저탄량을 자랑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채탄량이 2천t을 넘었다. 하지만 채탄량이 줄어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은 이곳을 떠났고 마을은 생기를 잃었다. 집은 색이 바랬고 인적은 끊겼다. 강제로 끌려와 청춘을 탄광에서 보내야 했던 20명을 포함한 370여명의 한인이 아직 이곳에 살고 있다.

1939년 이후 사할린에 끌려온 탄부들은 가족들을 불러올 수 있었다. 일본이 독신 노동자의 가족을 불러오거나 같은 마을의 친지들을 불러들이는 ‘연고모집’을 적극 장려했기 때문이다. 탄부들의 탈출을 방지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탄광인력으로 투입하려는 계산이었다. 브이코프로 강제 징용 온 탄부들도 탄광회사를 통해 가족들을 불렀다. 그래서 브이코프 탄광촌은 조선에서 온 탄부들과 그 가족이 마을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사할린의 작은 조선마을’인 셈이었다.


韓人 1700명 강제노역 브이코프
日, 탈출 막으려 가족도 불러들여

戰線 확대되자 이번엔 강제징병
종전 후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
혈육과 생이별…이국서 삶 마감


브이코프 문화센터에서 만난 김영자씨(73)도 그랬다.

김천이 고향인 아버지 김개복씨(1905~1958)가 이곳 브이코프로 끌려온 것은 1940년. 다섯 살, 두 살이던 두 딸을 데리고 어머니 조순금씨(1914~2009)는 “남편이 있는 곳으로 보내준다”는 말에 이 먼 곳으로 왔다.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탄광에서 일하던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 여섯째 막내가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태어났을 때였다. 그 삶이 어땠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씨는 “그런 세월이 없었다”고 치를 떨었다.

“머리 검고 눈동자가 검은데 아무리 여기서 태어나고 살았다고 여기가 고향일 수 있겠느냐”는 김씨는 올림픽 이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시선이 좋아졌다. 무조건 한국이 강한 나라,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제일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 이중징용, 사할린서 다시 일본으로

필리핀에서 버마(현 미얀마)까지 전선을 확대했던 일본은 전쟁 수행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대책 마련에 나섰다. 조선에서 대대적 식량공출과 학도병 등 징병과 강제징용 등 인력충원을 했고 본토와 사할린 등지에서는 산업현장의 효율적인 생산과 인력관리를 위한 통폐합과 노동력의 재배치를 추진했다. 이에 따라 사할린의 주요 탄광을 휴·폐광하고 노동력을 일본 본토로 재배치하게 된다. 사할린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이동하는, 즉 ‘이중징용’(일본은 이를 ‘전환배치’라 표현했다)을 당하게 된 것.

이에 따라 총 26개 탄광 중 에스코르(현 우글레고르스크) 이북의 탄광 14곳이 문을 닫고 조선인 3천여명에 대한 이중징용이 이뤄졌다. 이들 중 가족이 있는 인원은 1천여명, 가족의 수는 3천500여명에 달했다. 가족이 일본으로 함께 이동한 경우는 후쿠시마로 간 125명과 개인적으로 이동한 서너명이 전부였다. 이중징용은 1944년 8월25일부터 9월16일 사이 삼엄한 경비과 감시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 지역은 후쿠시마, 이바라키, 규슈(후쿠오카, 나가사키)였다.

1945년 8월15일. 벼락처럼 찾아온 광복. 이중징용된 조선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의 혼란 속에서 사할린으로 가는 교통망은 무너졌다. 규슈의 후쿠오카에서 사할린으로 돌아가는데 무려 석 달이 걸렸다. 홋카이도 와카나이까지 어렵게 갔더라도 소련이 점령해 해안선이 봉쇄된 사할린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할린 조선인이 폭격으로 몰살 당했다, 사할린의 가족들이 귀국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믿었던 것이 탈이었다.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할린에 있는 가족과의 재회는 점점 어려워졌다. 사할린으로 떠날 때는 부모·형제·자매와 헤어지고 일본으로 이중징용되면서 사할린의 처자식과 헤어져야 했던, 고향으로 갈 수도 사할린으로 갈 수도 없었던, 그들의 아픈 역사다.

글·사진= 러시아 브이코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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