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2] 낯선 땅에서 외롭게 눈감다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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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28   |  발행일 2015-08-28 제5면   |  수정 2022-05-19 09:54
신방서 日軍에 끌려간 남편…아내는 사진 한 장 들고 사할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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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의 한인묘. 러시아인들이 봉분을 만들지 않고 비석만 세우는 데 반해 한인들은 봉분을 만들고 잔디도 심어, 뚜렷하게 구분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귀향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은 가슴 깊이 간직해 온 고향 주소를 차가운 비석에 남긴 채 죽어 이곳 공동묘지에 묻혔다.

우리가 ‘사할린’이라고 부르는 곳은 정확하게 말하면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이다. 러시아에서 추방 당한 죄수들이 살던 유형지인 이곳을 안톤 체호프는 ‘슬픈 틈새’라고 불렀다. 조선에서는 빛나는 섬 ‘화태도(華太島)’로, 일본에서는 자작나무의 섬이라는 뜻으로 ‘가라후토’라고 불렀다. 1905년 러일전쟁 후 남사할린을 차지한 일본의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1945년까지 약 15만명의 조선인이 사할린에 들어왔다. 그중 75%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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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2세 고행자씨. 고씨의 아버지는 일본군에 의해 신혼 첫날밤 사할린으로 끌려와 탄광 노역을 했다.

72년前 경주 고향인 고행자씨 父
초야도 못치르고 이역 탄광으로
1년 뒤 생이별한 아내와의 재회
곧 돌아갈 생각에 고된 삶 감내

새벽마다 韓 라디오 들으며 눈물
좋은 건 갖고갈거라 평생 모으다
1990년 소련 개방후 고향땅 밟곤
이틀 내내 울다가 다시 사할린行

사할린 총 인구 50만명 중 18만여명이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살고 있다. 이곳의 한인은 1만6천여명. 사할린 전체 한인(3만1천600명)의 절반이 되는, 가장 많은 한인이 살고 있는 도시다. 한인은 러시아 소수민족 중 최대(6.5%)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살고 있는 고행자씨(69)의 아버지 고승생씨(1918~1994)의 고향은 경주다. 1943년 결혼했다.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날 밤, 초야도 치르지 못한 신혼방으로 일본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열여덟 철없던 신부 윤임순씨(1927~2007)는 끌려가는 남편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날이 밝자 부모님이 남편의 사진 한 장을 주었다. 처음으로 찬찬히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로부터 1년.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윤씨는 한 장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무작정 사할린으로 왔다.

남편은 샥조르스크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있었다. 탄광의 노동 조건은 열악했다. 채탄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못 올라오게 했기 때문에 하루 10~12시간, 때로는 15시간도 일해야 했다. 노무자들은 함바라 불리는 합숙소에서 통제된 생활을 강요당했고 반항하거나 도망치다가는 문어방으로 불리는 ‘타코베야’라는 형벌방에 갇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2명이 들어가면 1명은 죽어서 나온다는 곳이었다.

임금은 형식적으로 지급되었지만 고향으로의 송금이나 강제저축, 후생연금 등의 명목으로 공제되고 용돈 정도만 지급받았다. 일당제로 지급되는 임금은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작업을 쉴 때는 받을 수 없었고 숙박비, 노동복, 장비 등의 명목으로 또다시 떼이게 마련이었다. 강제저축 통장은 구경도 하지 못했고 이마저 일본의 패전과 함께 허공에 사라졌다. 일본 우정성의 조사에 따르면 1997년 기준으로만 59만계좌에 1억8천만엔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향으로 곧 돌아갈 생각에 고씨의 아버지도 임금의 대부분을 고향의 형님에게 부쳐달라고 탄광회사에 말했다. 그러나 탄광회사는 몇 번 돈을 부쳐주는 듯 하더니 더 이상은 부쳐주지 않았다. 돈을 저금해서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런 탓에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을 했지만, 집은 지독히 가난했다. 아침을 먹고 점심 도시락을 싸서 탄광으로 일하러 가는데, 도시락을 쌀 밥이 있을 리 없었다. 윤씨는 산나물을 뜯어 죽을 끓여 5남매의 주린 배를 채웠다. 그러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시장에 내다 팔았다. 텃밭 한켠에서는 배추, 감자, 당근을 키웠다. 러시아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라 1980년까지도 농사는 한국 사람들이 주로 지었다. 지금도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시장 ‘바자르’에서는 김치나 직접 기른 채소와 꽃을 파는 한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고씨의 기억에 남은 아버지는 새벽마다 라디오 틀어놓고 한국 소식 듣던 모습이다. 이불이 들썩이도록 소리내어 운 적도 여러 번이다. 좋은 물건이 생기면 한국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가겠다고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결국엔 낡고 쓸모없게 되어버린 것들이었다.

고향땅을 밟기 전엔 절대 눈을 못 감는다며 실낱 같은 희망으로 평생을 살았던 고씨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소원을 이루었다. 1990년 소련이 개방되면서 고씨는 부모님과 함께 고향 큰 집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그 이틀 동안 아버지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내내 꺼이꺼이 울기만 했다.

고씨도 부모님의 고향,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한다. 한국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사할린에 한국의 발전된 모습이 소개된 것도 한몫을 한다. 고씨는 “법 개정이 되어 45년 이후 출생자들도 영주 귀국이 가능하다면 한국으로 가고 싶다”면서 “국적은 러시아지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 사람 아닌가. 아이들에게 직접 체험한 한국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글·사진=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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