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2. 주한미군 결혼이민 황남희씨

  • 최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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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04   |  발행일 2017-07-04 제6면   |  수정 2022-05-18 17:26
“불우한 韓생활 탈출하려 미국 왔지만…이젠 한국 가서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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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5일 하와이 빅아일랜드에서 황남희씨를 만났다. 인터뷰 도중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황씨는 한국에서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인문사회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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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는 장녀를 쥐잡듯이 잡았다. 공부를 못하도록 책을 찢고 술 심부름까지 시켰다. 삶이 지긋지긋했다. 어느날 친구 엄마가 말했다. “미국 가서 살아라.” 귀가 솔깃했다. 지옥 같은 한국을 탈출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꿈만 같았다.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 2화는 주한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정착한 한 한인 여성의 이야기다.

친구엄마 소개로 주한미군 만나
애정없는 생활 10년도 안돼 이혼

남편이 키우는 아이 양육비 위해
점원·청소 등 하루 16시간 일해

15년 만에 밟은 고국의 땅 감회
어린시절 못 느끼던 情 느껴져


◆아들 바라던 집안에 태어난 첫째딸

이름은 황남희(59). 아버지의 고향은 안동 와룡면 와룡리다. 산에서 돌을 깨던 아버지는 전처와의 사이에 딸 둘을 낳았다. 아들을 바라며 어머니와 재혼했지만 다시 딸이 태어났다. 바로 남희씨였다. 그는 유년기 내내 아버지의 미움을 받았다. 매일 같이 술을 사오라고 했다. 책을 찢거나 불질러 학교에 못 가는 일도 잦았다. 명절에 부침개를 부치고 있으면 그의 아버지는 애써 만든 걸 다 던져버렸다. 하루는 연탄불을 남희씨에게 던졌는데 연탄이 궁둥이에 눌어붙어 한동안 앉지도 눕지도 못했다.

그러다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늘 동생을 방에 데리고 들어가 안은 채 잠들었다. 100원짜리 지폐로 동생의 엉덩이를 닦아주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어머니는 남희씨를 아버지와 떼어놓으려 중학생이던 그를 서울 먼 친척집에 식모살이로 보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그 집을 나와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좋은 사람을 찾아 결혼하면 삶이 편해질까’하는 생각에 다시 대구에 왔다. 처음 들른 곳이 친구 집. 친구 엄마가 말했다. “남희야,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미국사람 만나서 미국 가서 편하게 살아라.” 어지럽던 삶의 답을 찾았다. ‘한국 땅을 벗어나자!’

◆한국을 벗어나자!

친구 엄마는 미군부대(대구시 남구 봉덕동)에서 일하던 한 주한미군을 소개해 줬다. ‘헬로(hello)’도 할 줄 몰랐다. 다행히 남편이 한국어를 조금 했다. 당시 그에게 애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집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첫 번째이자 마지막 목표였다.

미국인과 결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열아홉 살. 국제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보호자의 인감도장이 필요했다. 출국 날짜가 다가오자 급한 마음에 배 다른 둘째 언니에게 “결혼해야 되니 언니 이름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미워하던 둘째 언니는 선뜻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당시 경찰과 결혼한 상태였지만 남희씨의 결혼을 위해 형부와 서류상 이혼을 했다.

결혼 후 대구에서 약 2년 동안 살면서 첫 딸을 낳았다. 1984년 7월21일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미국에 도착했다. 새 삶이 펼쳐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혼을 둘째 언니 이름 ‘순화’로 한 탓에 남희씨의 모든 미국 기록물에는 언니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남희’는 한국 서류상 아직 미혼이다.

애정을 쌓지 못한 남편과는 10년도 안 돼 이혼했다. 그 사이 아들을 낳았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기나 해, 아님 말이라도 잘 통해, 서로 속마음도 모르고 겉으로만 사는 거였죠. 집에서 한국음식 만들면 냄새 난다고 얼마나 싫어했는데요.”

◆고단했던 미국에서의 삶

미국에서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 뉴욕에 발디딘 순간을 떠올리자 한숨부터 나왔다.

도착과 동시에 소시지 공장에 취업했다. 한국 사람은 남희씨 혼자였다. 오전 5시에 출근해 오후 7시에 돌아왔다. 일주일 중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했다. 직원 대부분이 흑인이었는데, 영어를 못해 그들과의 대화는 꿈도 꾸기 힘들었다.

소시지 공장에서 3년 일하고 둘째아들이 한 살 될 무렵 플로리다로 이사했다. 이혼하면서 아이들은 남편이 키우고, 남희씨는 양육비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 지인을 따라 하와이로 옮긴 뒤 양육비 월 300달러를 벌기 위해 하루 16시간 일했다. 낮에는 8시간 동안 빌딩 청소를 하고 밤에는 식당 점원으로 일했다. 일이 끝나면 새벽 2시. 식당에서 4시간 정도 자고 다시 출근했다. 주말엔 부잣집에서 청소를 했다.

미국에서의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지만 한동안 한국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미국에 온 지 15년이 지나서야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에 갔다. 마흔 살 가까이 돼 한국에 가자 어린 시절 느끼지 못한 정이 새삼 느껴졌다. 부모가 엮어주지 않은 배 다른 형제들과도 마음을 텄다.

“일흔살 다 된 언니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좋은데 데려가 주고…. 미국에 온 걸 후회하지 않지만 이제는 한국으로 가고 싶어요.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면서 여유롭게 사는 거지. 돈·명예를 떠나 아프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어요.”

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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