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디아스포라] 카자흐스탄과 키로기스스탄의 고려인(5부)] ③유가이 빅토르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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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26   |  발행일 2018-07-26 제8면   |  수정 2022-05-18 17:17
“카자흐서 평양·서울 가려고 전 재산 털어 자동차 8대 구입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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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넘긴 유가이 빅토르(왼쪽)는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마지막 소원은 자동차로 유럽대륙에서 출발, 아시아대륙을 거쳐 평양·서울까지 가는 것이다. 그가 동생 유가이 콘스탄틴과 함께 주먹을 쥔 채 파이팅을 하고 있다.

유가이 빅토르(56)는 중앙아시아에서 만난 고려인 중 우리말을 가장 유창하게 했다. 그의 삶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전쟁·사랑·우애·애국 등 영화적 소재들이 풍부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타슈켄트 항공기조립학교 졸업
80년 소련군 입대 훈련 받은 뒤
1년6개월간 아프가니스탄戰 투입
부대원 절반 전사하고 구사일생

99년 자녀의 미래 위해 영국 이민
자동차기술 컬리지 졸업 후
랜드로버공장서 16년간 몸담아

“통일되면 평양∼서울 다시 도전
그땐 고려인 車마니아 다 모을 것”


◆독립운동 가문 출신

“할아버지(유주익)는 빨치산부대에서 독립운동을 했어요. 1900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나 17세 때 연해주로 갔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 씨름선수로 활약했대요. 5형제를 낳았는데 아버지(유 알렉세이)는 둘째예요. 7세 때 가족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인근 ‘주마’라는 곳에 정착을 했죠. 갈대밭이 있는 허허벌판이었는데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인근에 치르치크강이 흘러 잉어가 많았다고 해요.”

유가이 빅토르에 따르면 1937년 강제이주 당시 고려인들은 우슈토베~크줄오르다~쿠스타나이~콕체타프~타슈켄트~사마르칸트 등지로 분산됐다고 했다.

빅토르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인근 카르마르크 콜호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4형제 중 둘째다. 형(로베르토)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기기술자로 일하다 삼성에 입사, 통관업무를 담당했다. 1974년 그의 아버지가 투르크메니스탄 북부 파샤우스주(州)에 위치한 고려인 콜호스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6년간 근무하는 바람에 그곳으로 갔다. 1979년에 60번 중학교를 거쳐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항공기 조립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동생(콘스탄틴)은 투르크메니스탄 국립아시카바르대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동생은 러시아어, 한국어, 독일어, 터키어, 영어, 투르크메니스탄어 등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때 카자흐스탄을 방문할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고려말을 잊지 말라

그의 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 국립타슈켄트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역사·지리·체육교사를 지내다 교장으로 퇴직했다. 할아버지와 달리 키가 작고 농사를 좋아했다. 어머니(조 리디아) 또한 교사였다.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사범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수학·물리를 가르쳤다. 그의 부모는 항상 “고려말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해 집에선 늘 고려말을 썼다.

“유명한 김병화 농장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이죠. 10세 때 김병화 선생 장례식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카르마르크에는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죠.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 후손들이 카르마르크에서 살고 있고, 모스크바엔 김 장군의 손녀가 있어요. 터키족, 둔간족, 타타르족도 함께 살았는데 고려인이 많다 보니 다들 고려말을 썼어요. 터키어, 우즈베크어, 타타르어, 러시아어는 카르마르크에서만은 소수민족 언어였죠. 한번은 고려인들이 동네버스 안에서 말고기를 먹는 타타르족을 놀렸는데, 운전기사가 타타르족 여성이었나봐요. 고려말을 할 줄 아는 그 여성 운전기사가 뿔이 나 ‘개고기는 여기에서 내리고, 말고기는 더 가세요’라고 했대요(웃음).”

◆전쟁터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다

빅토르는 1980년 소련군에 입대해 아제르바이잔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1년6개월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투입됐다.

“어느날 밤 중대장이 군장을 꾸리라고 하더군요. 야간열차를 탄 채 몇 날 며칠째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죠. 타지키스탄에서 우연히 동생을 만났는데, 동생은 내가 전쟁터로 가는지 알았나봐요.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더군요.”

그는 전쟁터에서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에 내려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총알이 빗발쳤어요. ‘전쟁터에 왔구나’라는 걸 그때 알았죠. 난 기관총사수였어요. 한 번은 총알이 베레모를 뚫고 지나간 적도 있었죠. 매일 부대원이 한두 명 죽어나갔는데, 200호 화물열차가 시신을 수송했어요. 고지탈환작전을 하다 2시간 동안 포격을 받기도 했죠. 몸의 절반이 노출된 상태로 콘크리트파이프에 은폐해 있었는데 등에 파편을 맞아 핏물이 군화로 흘러들어가는 걸 느꼈어요. 구사일생으로 생존했죠. 부대원 절반 가까이가 전사했습니다. 나중에 훈장도 받았어요.(쓴웃음)”

그는 1982년 제대를 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얼굴은 검게 타고 몸은 바짝 말랐는데 눈물의 상봉을 했습니다. 잠시 학교에서 노동과 군사훈련, 음악을 가르쳤는데 그때 첫 결혼을 했어요. 1986년에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와 무궤도전차를 몰다 1991년부터 차량 임대사업을 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차로 평양·서울까지

그는 1989년 고(故) 고송무 교수와의 만남을 계기로 민족의식을 싹틔운다. 고 교수는 핀란드 헬싱키대학에서 우랄어를 전공한 언어학자였다. 카자흐스탄과학아카데미 연구교수로 와 우연히 빅토르를 알게 됐다. 그는 중앙아시아 고려인 연구분야의 선구자였다.

“고 교수랑 정말 친했어요. 1993년 교통사고로 46세 때 돌아가셨는데, 고려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해 준 분이었지요. 1992년 한국과 카자흐스탄 수교를 기념해 고 교수가 자동차로 중앙아시아·시베리아·중국을 거쳐 북한 평양·서울로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했어요.”

그는 고 교수의 뜻을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자신의 전 재산을 털다시피 해 자동차 8대를 구입했다. KGB요원 3명을 포함해 총 57명이 17대의 차로 알마티~캅차가이~띠어리쿠르간~알타이공화국~노보시비르스크~이르쿠츠크~울란우테~하바롭스크를 경유해 2주간을 달려 두만강 조·중 국경에 도착했다. 여정에 동행했던 김미라와 애정이 싹터 결혼에까지 이른다.

“정말 힘들었어요. 원래 북한 입국이 8월15일 광복절이었는데, 하루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입국이 거절됐어요. 황망하고 허탈했죠. 결국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야만 했어요. 일부는 차를 버리고 비행기로 다시 왔습니다. 나중에 한국의 한 TV방송국이 시베리아횡단 자동차팀을 방영했어요. 그걸 본 이삼수(가명)란 사람이 팀원 전체를 2차에 걸쳐 초청해 열흘간 한국여행을 시켜준 적도 있지요.”

◆영국으로 이민

자동차로 대륙을 달려본 경험 때문이었을까. 빅토르는 카자흐스탄이란 울타리가 좁다고 생각됐다. 게다가 고려인에 대한 차별감 같은 걸 느낀 적도 여러번 있었다.

“아들이 10세 때였어요. 경찰이 아들의 주머니를 뒤지며 소지품을 검사하는 걸 멀리서 보게 됐는데 ‘아이의 미래를 위해 이 나라를 떠나자’는 생각을 굳히게 됐습니다.”

그는 1999년 아내와 함께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자동차기술 컬리지에 입학했다. 졸업 후엔 버밍엄 근교에 있는 랜드로버공장에 입사, 조립라인 팀장으로 근무하며 16년간 일했다. 하지만 영국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건강이 악화됐어요. 지팡이가 있어야 걸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카자흐스탄에만 오면 몸이 회복되는 거예요. 결국 카자흐스탄으로 와 살고 있습니다. 아내는 음악을 전공해 영국에서 음악교사로 있어요. 방학 때 제가 영국으로 가거나 아내가 오기도 합니다.”

그는 세 아내로부터 아들 넷을 얻었다. 장남 막심은 웨일즈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카자흐스탄 내 한국계 회사에서 일하다 독립해 알마티에서 전선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둘째 게니지는 경기도 안산에서, 셋째 안드레이는 영국 명문 케임브리지대에서 IT를 전공하고 현재 모스크바에 있는 IT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막내 알렉세이는 영국 사우샘프턴대 제약학과를 나와 프랑스의 한 제약회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처음엔 ‘한국으로 갈까’라는 생각도 했는데 영국으로 갔죠. 밥, 된장, 김치는 어릴 때부터 먹은 거라 지금도 늘 먹어요. 개고기는 지금도 잘 먹습니다.(웃음)”

그는 재작년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고려인 젊은이들이 자동차로 런던에서 로마를 거쳐 모스크바·카자흐스탄으로 와 그가 갔던 코스로 서울까지 가고 싶다고 해 자문을 한 적도 있다.

“남북이 통일돼 자유왕래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 자동차로 평양·서울도 맘대로 갈 수 있잖아요. 돈을 더 벌어 다시 유럽 리스본에서 아시아대륙을 지나 평양·서울까지 갈 거예요. 그땐 전 세계에 있는 고려인 자동차마니아를 다 모을 겁니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준비하겠습니다. 고송무 교수의 꿈이기도 하고 저의 희망이기도 하지요.”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공동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대구·경북인 2018-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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