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대양주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2] 한국식 케이크로 뉴질랜드 입맛 사로잡은 김보연씨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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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25   |  발행일 2019-07-25 제14면   |  수정 2022-06-09 11:29
카스텔라에 반했던 산골소년, 키위가 인정한 ‘케이크 장인’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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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연·유성자씨 부부가 뉴질랜드 오클랜드시티 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인 유씨는 남편의 사업이 어려울 때마다 억척스럽게 활로를 뚫어 오늘의 김보연 케이크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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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맛과 디자인을 접목해 뉴질랜드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김보연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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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보타니 지역에 있는 ‘게토하우스’ 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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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하우스’ 빵 공장에서 작업자들이 다양한 종류의 케이크와 디저트를 만들고 있다.

1953년 12월, 안동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남자아이가 있었다. 7남매 중 넷째. 6·25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시기였다. 온 나라가 지독한 빈곤에 허덕였던 시절을 그 아이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깡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그래도 초등학생이 되자 군것질을 할 푼돈은 생겼다. 처음으로 사먹은 것이 학교 앞 ‘전빵(문방구)’에서 파는 카스텔라. 어찌나 맛있었던지 빵에 붙어있는 종이까지 싹싹 핥다 못해 씹어 먹었다. 당시 소년에게 빵은 ‘피안(彼岸)의 세계’에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6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당사자는 그렇게 회상했다. 그는 지금 뉴질랜드에서 꽤나 잘 나가는 케이크·빵 제조 및 판매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한인사회에선 ‘김보연베이커리’로 유명한 ‘게토하우스’ 김보연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한국식 케이크와 빵으로 뉴질랜드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어릴적 ‘피안의 세계’에서 맛본 빵맛의 감동을 이역만리 ‘차안(此岸)의 세계’에 전하고 있는 셈이다.

◆제빵업체서 16년 ‘성공의 자산’

김씨는 안동에서 중·고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 식품공학과에 입학했다. 1979년 대학 졸업 후 삼립식품 부산공장에 들어가면서 제빵 인생의 서막이 열렸다. 당시 그 업체는 ‘보름달’ 카스텔라나 ‘달나라’ 빵 등을 만들어 꽤나 재미를 봤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사람들의 입맛이 고급화되면서 제과점 빵을 선호하자 업체는 1981년 주식회사 기린으로 사명을 바꾸고 이듬해 ‘밀탑’이란 제과점 체인을 만들었다. 김씨에겐 행운이었다. “밀탑 브랜드를 만드는 파트에 가게 됐어요. 회사에서 제과점 체인을 만들기 위해선 외국에서 장비를 수입하고 기술을 전수해야 했는데 내가 그 일을 맡았어요. 일본,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유명하다는 제과점을 안가본 데가 없어요. 젊은 시절에 외국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경험을 쌓았죠.”


제빵업체 근무 성공가도 달리다
40대 초반에 힘든 이민생활 결단
부부 함께 런치바 운영 등 생고생
본인 이름 건 제과점 열어 ‘반전’
억척스러운 아내 배달·영업까지
오클랜드市 전역 7개 점포 확장



마흔을 갓 넘겨 밀탑사업부 부장까지 승진한 이후 식품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신제품 개발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피라미드 구조의 조직 생활에 한계를 느꼈다. 계속 승진한다는 보장이 없고 비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입사 16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뉴질랜드 이민을 결심했다. “내 사업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가진 돈이 적다보니 한국에선 성공할 자신이 없었죠. 대신 외국은 남들보다 많이 가봤기에 두려움이 없었어요. 뉴질랜드 이민을 마음먹은 건 내가 경제적으로 실패해도 자식 교육만큼은 잘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새벽 4시부터 부부가 함께 ‘생고생’

김씨는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엔 빵 관련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8t 트럭도 한 번 몰아봤지만 도저히 엄두가 안나 포기했다. 같은 안동 출신인 부인 유성자씨도 속성으로 봉제를 배우고 재봉틀도 사서 가져 갔다. 하지만 1995년 막상 가보니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결국 김씨는 슈퍼마켓 내에서 빵 만드는 영세 업체에 취직했지만 급여가 너무 박했다. 4인 가족 생계유지가 힘들어 몇달 만에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점심에 주로 샌드위치를 파는 런치바(Lunch Bar)를 차렸다. 세들어 살던 집에 딸린 조그마한 가게였다.

부부는 엄청난 고생을 했고 자녀 역시 그랬다. “영업 준비를 위해 새벽 4시에 나와야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부터 돌이 지난 막내가 우리 부부가 나오면서 문만 닫으면 귀신같이 알고 자지러지게 울더라고요. 그 이후부터는 겨울 새벽에도 나오면서 문을 조금 열어놨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해 아직도 애잔합니다.”

영어를 거의 못했던 부부가 키위(뉴질랜드인의 애칭)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에피소드도 있다. 키위 손님이 ‘뉴스페이퍼’를 달라고 한 것을 ‘페퍼’로 잘못 알아듣고 후추를 준 적도 있었다고. 그래도 부부는 열심히 일했다. 오후 3시 영업이 끝나면 한국 손님으로부터 주문받은 케이크를 만들어 직접 배달도 했다. 하지만 가게 매출은 오를 기미가 없었다. 런치바를 하면서 남편보다 고생이 심했던 부인이 먼저 나섰다. 가게를 팔고 다른 일을 하자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2년 만에 런치바를 정리하고 네덜란드인이 오클랜드 웨스트 하버에서 운영하던 제과점을 인수했다. 그 가게가 김보연 베이커리의 효시였다.

◆‘김보연’ 내건 케이크로 큰 인기

부부는 야심차게 전문 빵집을 열었지만 장사가 신통찮았다. 이때도 역시 부인이 나섰다. “우리 가게가 한국인 거주지와 멀다 보니 손님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한국 식품점 7~8곳을 뚫어 우리 빵을 넣었어요. 빵 배달도 나 혼자 승용차로 했죠. 남편은 부끄럽다고 끝내 안했어요.” 부인이 악착같이 발로 뛰었지만 매출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웨스트 하버 빵 가게는 그렇게 큰 재미를 못보고 3년 만에 접었다.

김씨는 2002년에 승부수를 띄웠다. 오클랜드 시내 도미니온 로드(Dominion Road)에 제대로된 제과점을 오픈했다. 가게 이름은 교민 상대로는 본인의 이름 석자를 내건 ‘김보연 제과’였고 현지인을 위한 상호는 ‘베이커스 프라이드’였다. 그리고 3년 후 가게 이름을 ‘게토하우스(Gateau House)’로 바꿨다. 게토(Gateau)는 케이크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도미니온점을 기점으로 김씨의 사업은 확장세를 탔다. 도심인 퀸스트리트에도 점포를 냈다. 퀸스트리트는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이 주류를 이루는 ‘대학촌’같은 곳이어서 젊은층 기호에 맞는 케이크와 빵을 만들어 팔았다. 그게 먹혔다. 김씨는 서두르지 않았다. 한개 점포가 성공하면 한개 점포를 더 내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지금은 오클랜드 전역에 7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3년 전에 보타니 지역에 새 공장도 인수해 풀가동 하고 있다. 그 공장에선 매일 20~30명의 작업자가 온갖 종류의 케이크와 디저트용 빵을 만들어 낸다.

◆“뉴질랜드 최고의 명품 케이크”

김씨가 빵 업계에 들어선 지 40년이 흘렀다. 제빵 장인(匠人)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그럼에도 한국식 케이크로 뉴질랜드에서 인기를 끌기는 쉽지 않았을터. 그 비결이 궁금했다. 김씨는 차별화를 첫째로 꼽았다. “남이 다 만드는 케이크는 의미가 없죠. 전에 없던 새로운 맛을 만들었어요. 전통적인 프랑스식 케이크에 기반을 두고 한국적인 맛을 가미했어요. 그러다보니 영국계인 이곳 키위들도 처음에는 생소하게 느끼지만 ‘이 케이크는 먹을수록 당긴다’면서 최고로 인정하더군요.” 김씨가 말한 한국적인 맛은 발효를 통해 독특한 식감을 내는 김치 맛의 원리를 케이크 제조 과정에 접목한 것. “빵의 발효과정에서 100가지 이상의 방향성 물질이 자연스럽게 생성됩니다. 그런데 팽창제를 넣거나 하면 고유의 맛이 사라지죠. 시간이 걸려도 은은한 데서 충분히 발효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한국적인 맛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이 있듯이 내가 좋아하고 느낌이 가는 맛을 남들도 좋아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김보연 케이크는 콘셉트에서도 한국적인 정서를 가미해 차별화를 이뤘다. “한국인은 케이크를 생일이나 잔칫상 가운데에 놓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저그런 케이크가 아닌 행사의 주빈이 되는, 의미있는 케이크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에 맞춰 케이크 디자인도 화려한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품격의 미를 추구한다. 명품 케이크의 또다른 비결은 식재료다. 원가를 아끼지 않고 최상품만 쓴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재료가 받쳐주지 않으면 좋은 맛을 낼 수가 없죠. 저는 20년간 밀가루에서부터 버터, 치즈, 바닐라 향까지 항상 최고의 재료만 썼어요. 그런 고집이 맛은 물론 고객의 신뢰를 쌓는 바탕이 된 것 같아요. 김보연 케이크의 마니아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여러 모로 뉴질랜드 최고의 명품 케이크라고 자부합니다.”

게토하우스의 성장세는 지속되겠지만 김씨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장남에게 억지로 사업을 물려줄 생각이 없다. 대신 본인의 은퇴 시점에 전문 경영인에게 사업을 맡길 계획이다. 물론 경영 일선에선 물러나더라도 더 좋은 케이크를 만들기 위한 그 만의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기로 이민 와서 단순히 사업으로 성공한 것보다 사람들에게 행복한 맛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게 큰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사진=이정화작가 seajip00@naver.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대양주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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