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호주·뉴질랜드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6부> .3] 서울대 출신의 멜버른 타일공 조춘제씨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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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1   |  발행일 2019-08-01 제6면   |  수정 2022-06-09 11:30
민주화운동했던 대학생, 호주 이민가서 소녀상 건립에도 앞장섰다

호주는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다. ‘이민 가고픈 나라’ 순위에서도 늘 열손가락 안에 든다.

호주 이민의 실패사례 중에는 특히 한국에서의 최고 학벌과 스펙만 믿고서 건너간 경우가 많다. 호주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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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멜버른에서 타일업을 하면서 한인회 발전과 현지 소녀상 건립에 앞장서고 있는 조춘제씨가 빅토리아주 한인회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의 변호사, 의사 자격증조차도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도 전문직을 갖고 싶다면 모든 과정을 호주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니면 식당, 마켓 등 자영업을 하거나 그마저도 아니면 육체노동밖에 할 게 없다. 하지만 한국 인텔리 이민자 상당수는 자존심 때문에 이도저도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직업을 못구해 돈과 세월만 축내고, 심지어 가정까지 파탄내고 되돌아 오기 일쑤다.

이런 점에서 조춘제씨(58)는 학벌을 버리고 생존한, 현명한 이민자다.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호주에서 타일공이 됐다. 처음엔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 선택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큰 돈을 벌지는 못해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수입이 짭짤하다. 하루 작업 시간도 길지 않다. 늦어도 오후 4시 전이면 다 끝나기에 생활도 여유롭다. ‘소확행’의 삶인 셈이다. 그렇다고 조씨가 안분지족의 이민생활만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호주 멜버른에 정착해 한글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빅토리아주 한인회 부회장을 맡아 현지에 소녀상 설치를 추진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몸담으면서 체화한 사회공동체 의식이 아직도 그의 내면에 살아숨쉬고 있는 것이다.

경상·전라도 경계 육십령서 출생
고교 3년 장학생에 서울대 진학
시위중 목격한 동료학생 분신자살
다함께 사는 사회공동체 일깨워

호주서 선택한 육체노동 타일공
용기 필요했지만 소확행 삶 선물
낮에 일하고 밤엔 한글학교 봉사
“道, 멜버른 소녀상 관심 가져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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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의 대학 졸업식 사진.

◆비범했던 부친 “나는 왜 임수경같은 자식 없나”

조씨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경계를 이루는 육십령(六十嶺) 자락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기는 당시 또래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형제는 9남매로 많은 편이었다. 그만큼 더 가난했다. 조씨의 누나 셋은 중학교를 못갔고, 조씨부터 이하 동생들은 줄줄이 1년씩 늦게 중학교에 갔다. 그가 1년을 꿇은게 싸움꾼이 된 빌미가 됐다. “중학교에 가니 한해 선배라고 나를 괴롭히고 시비를 거는 애들이 있었어요. 나도 맞고는 못사는 성격이라 그 애들과 치고받고 많이 싸웠어요. 가방에 몽둥이를 넣어 다닐 정도였죠. 만만하게 안보이려고 사이클 선수 생활도 했고요. 중2 때까지 그랬어요.”

조씨는 중3이 되면서 철이 확 들었다.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듯 싶은 모범생으로 변했다. 싸움과 운동을 접고 공부만 했다. 머리도 좋았던지 연합고사를 잘 봐서 장계고 3년 장학생이 됐다. 이어 서울대 농화학과(83학번)에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하자마자 후회했다. 점수에 맞춰 선택한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휴학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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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가 호주 이민을 가기 직전인 2003년에 찍은 가족여행 기념사진.

군대를 갔다.

그의 고민과 방황은 부친의 피를 물려받은 필연적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친은 평범한 농사꾼이었지만 사회에 대한 의식은 비범했다. 그 당시로선 위험할 만큼 진보적이었다. 1989년 임수경 방북사건이 알려졌을 때 그의 부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자식이 이렇게 많은데 저런 용기있는 자식이 없으니 무슨 낙으로 사나.” 아마도 조씨의 인생관도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청년기부터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추구해왔던 그의 인생궤적을 들여다보면 쉽사리 짐작이 간다.

◆학생운동 하면서 깨달은 공동체의 가치

조씨는 1986년도에 복학했다. 사회 곳곳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끓어오르던 시기였다. 조씨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86년도에 학생회관 근처에서 시위도중 학생 한명이 분신자살을 했어요. 나하고 거리는 10m밖에 안됐죠. 너무 충격을 받아 몇초 동안 멍하니 보고만 서있었던 거예요. 그때 누군가가 ‘야 이새끼들아! 사람이 불에 타는데 안끄고 뭐하냐’며 소리를 쳤어요. 아무 것도 못했던 그 몇초를 생각하면 지금도 괴로워요. 아마도 그 죄책감이 세상은 나 혼자만이 아닌 다 함께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일깨운 확실한 동기가 됐던 거 같아요.”

당시 시위는 격렬했고 정권의 탄압은 무자비했다. 그해 서울대에서만 2천명이 제적됐고 조씨도 그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6·10 민주항쟁 승리의 결과로 그 역시 복학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엔 평범한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해외에서 새 삶을 꾸리고 싶었고 호주를 택했다.

◆“타일공은 천직…촌놈으로 태어나 감사”

멜버른에서 가진 첫 직업은 노인 요양병원 청소일이었다. 근데 문제는 청소가 아니었다. 허구한 날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보는 게 고역이었다.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7개월 만에 그만뒀다. 마침 그때 한국에 있던 지인의 요청으로 귀국해 염업조합이 하는 소금 유통개선 업무를 잠시 맡기도 했다. 이후 대학 친구들과 유기질 비료 공장을 차린 게 큰 화근이 됐다. 조씨는 사업을 포기하고 다시 호주로 갔지만, 한국에서 청천벽력같은 연락을 받았다. 공장 차릴 때 빌린 정부 대출금을 후임자들이 못갚아서 조씨 선산이 가압류 당했다는 것.

조씨는 빌린 돈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먹고살길이 막막했다. 서울대 졸업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막노동이라도 할 생각에 일당이 좋은 일자리를 찾았다. 타일러(tiler)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기술을 배울 때 하루 일당이 100~120달러, 한국돈으로 10만원쯤 됐다. 이후 기술자가 돼서는 3배 이상 받았다. “3~4년간은 정말 죽기살기로 했어요. 일감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한국식 영업전략도 썼어요. 일거리를 알선해준 사람을 찾아가 포도주를 선물하고 거래처 사람들에게는 크리스마스, 부활절 때 감사 카드도 썼어요. 그게 잘 먹혔어요. 기술과 영업력을 갖추니 생각보다 수입이 좋더라고요. 빚은 벌써 다 갚았고 남부럽지 않게 삽니다. 얼마전에도 2주반 동안 하루 6시간 일하고 600만원 벌었어요. 남들과 달리 이 일을 쉽게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아마 촌놈기질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촌놈으로 태어난 게 감사할 따름이죠."

◆한인회 발전과 멜버른 소녀상 건립 앞장

그는 이제 버젓한 타일작업 회사(CJ 타일 마스터)도 운영한다. CJ는 춘제의 영문 앞글자다. 회사는 다른 작업팀에게 수수료를 받고 일감을 알선하는 업무도 한다. 조씨는 생활이 안정되자 한인 공동체를 위해 뜻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현지에 한글학교가 있는 것을 알고 찾아가 한글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또 일감 알선 수수료 수입을 한인회를 위해 사용한다. “사실 이민올 때 한국에서 학생운동, 사회운동 했다는 사람이 저 혼자 잘살겠다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한인사회를 위한 일에 앞장서고 있는 셈이죠."

조씨는 ‘멜버른 평화의소녀상건립위원회’ 회장이기도 하다. 박근혜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분노해 만든 조직이다.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자는 조씨의 외침에 교민들도 호응했다. 현재 300여명이 건립위원회에 동참했고 기금을 2만달러 모았다. 여기에다 소녀상 장학금 기금도 조씨가 기부한 1만달러를 비롯해 총 2만5천달러가 적립돼 있다. 그래도 돈이 모자랐기에 조씨는 발로 뛰었다. 지난해 초에 경기도의 한 지자체가 해외 소녀상 건립을 돕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청을 찾아가 지원을 부탁했다. 해당 지자체도 화답했다. 지난해 11월 공무원 등 4명을 멜버른에 보내 한인회 의견을 수렴하는 등 지원책을 모색했다. 마침내 3주전에 조씨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국내에서 소녀상을 제작해 멜버른에 보내 주겠다며 연락해온 것. 제작비는 시민 성금으로 충당되며 12월 초에 멜버른 한인회관에서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소녀상 건립비 마련에 애태웠던 조씨는 큰 짐을 덜게 됐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한인회관 내에 소녀상을 설치하는 만큼 한인회 회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공청회와 총회를 개최한 후 안건이 통과되면 회관 일부를 리모델링할 계획이다. 멜버른에 소녀상이 세워지면 2016년 시드니에 이어 호주에서 2번째고, 전세계에선 미국, 캐나다에 이어 5번째다.

조씨는 조심스레 취재진에게 해외 교포를 가장 잘 챙기는 경북도가 해외 소녀상 건립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사실 해외 교포의 삶을 취재하는 이 프로그램을 알고 나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상상도 못했거든요. 인터뷰 요청을 받고 처음엔 의심을 많이 했어요. 무슨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경북도가 후원한다는 말을 듣고 신뢰가 갔고 너무 감사했어요. 중앙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거 아닙니까. 멜번 소녀상 건립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글=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사진=이정화작가 seajip00@naver.com

공동 기획: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대양주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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