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상)

  • 입력 2007-02-15   |  발행일 2007-02-15 제19면   |  수정 2007-02-15
첫 싱어송라이터, 식민지 삶을 노래하다
- 한국가요사에서 최초의 유행가수는 누구였을까
- 이런 궁금증에 대한 분명한 해답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채규엽이다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상)
채규엽 등 1930년대 국내가수들이 대거 참여한 일본 도쿄공연 포스터.
◇사진제공=최규성(대중음악평론가)

노래, 특히 가요는 시대적 애환을 가장 잘 담고 있는 대중 문화의 한 장르로 불린다. 지난날 우리 민족은 암울했던 일제식민지 시대나 혼란했던 해방공간의 삶, 6·25전쟁의 처절했던 순간들을 노래를 통해 표현하고 달래왔다. 그래서 대중가요는 일시적 유행가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대구는 특히 한국 가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영남일보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한국가요사 전문가인 이동순 교수(영남대 국문과)가 엮는 '이동순의 가요이야기'를 새롭게 마련했다. 격주 목요일 독자 곁으로 찾아가는 '이동순의 가요이야기'는 잊고 지내온 삶의 자취를 노래와 함께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日 유학 후 귀국독창회 가진 성악가·음악교사
30년 '유랑인의 노래' '봄노래 부르자'로 데뷔
대중심리·애환 알뜰히 담은 80여곡 발표 인기
남인수·백년설 등 후배 "그의 인기곡이 교본"

식민지라는 우울한 시대사를 배경으로 가요계의 위상이 점차 구체적 형상을 이루어 가던 1930년, 채규엽은 두 곡의 노래를 발표했다.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유랑인의 노래'(채규엽 작사·작곡)와 '봄노래 부르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한 장의 음반으로 채규엽은 노래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던 식민지 대중에게 최초 직업가수로서의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이 음반의 라벨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수의 이름 앞에 '성악가'란 표시가 붙어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당시 대중가요와 성악이 아직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채규엽은 1906년 함흥 출생으로 원산중학을 다녔는데, 재학시절 독일인 교사에게 음악을 배웠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하고 1년 뒤에 돌아와 귀국독창회를 열었다. 이때 채규엽은 바리톤으로 무대에 섰다. 그로부터 본격적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여 극단 토월회와 취성좌의 공연에서 막간가수로 출연하기도 했다. 강한 억양의 함경도 사투리에 완강한 이미지로 느껴지는 용모. 신장은 비교적 작은 편이었다. 채규엽은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결코 화제로 삼지 않았다. 여기엔 남에게 드러내기 힘든 개인사에 관한 어떤 열등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누구나 부러워하던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음악학교 교사의 경력을 가졌으며, 가창력 또한 뛰어나 많은 사람에게 찬탄을 받았다. 그리고 채규엽에게는 무엇보다도 흥행사로서의 남다른 자질이 있은 듯하다.

당시 조선 민중들은 식민치하에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괴롭고 숨 막히는 심정을 가슴 속에 안은 채 대책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이럴 때 채규엽이 불렀던 '봄노래 부르자'는 빼앗긴 강산에 봄이 오는 것을 꿈에 가만히 그려보는 설렘과 아련함을 담고 있었다. 인기가 워낙 높아가자 이 곡은 곧 수상한 곡으로 낙인찍혔고 발매금지가 되었다.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때 돌아 꽃은 피고/ 새 우는 이봄을 노래하자 강산에 동무들아/ 모도 다 몰려라 춤을 추며 봄노래 부르자.


이 밖에도 채규엽은 '서울노래' '눈물의 부두' '북국 오천키로' 등의 대표곡을 비롯해 80여곡의 작품을 발표했다. 당대 최고의 작사가가 노랫말을 쓴 '서울노래'(조명암 작사, 안일파 작곡)는 지금 읽어도 유구한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과 그것이 직면하고 있는 고통과 번민이 잔잔하게 깔려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한양성 옛 터에 종소리 스며들어/ 나그네 가슴에도 노래가 서립니다// 한강물 푸른 줄기 말없이 흘러가네/ 천만 년 두고 흐를 서울의 꿈이런가.


가늘고 은은한 미성의 톤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여운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눈물의 부두'(조명암 작사, 김준영 작곡)도 채규엽의 노래를 통하여 매우 특별한 반응으로 대중의 심금을 크게 울린 명곡이다.


비에 젖은 해당화 붉은 마음에/ 맑은 모래 십리 벌 추억은 이네// 한 옛날에 가신 님 행여 오실까/ 비 나리는 부두에 기다립니다// 저녁 바다 갈매기 꿈같은 울음/ 뱃사공의 노래에 눈물집니다.


'눈물의 부두'를 반복해서 듣노라면 한국인의 민족정서가 지니는 고유성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반응으로 가슴은 젖어든다. 그것은 슬픔과 애절함의 빛깔로 우리를 사무치게 한다.


한편 '북국 오천키로'(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는 또 어떠한가.


눈길은 오천 킬로 청노새는 달린다/ 이국의 하늘가엔 임자도 없이 흐드겨 우는 칸데라/ 페치카 둘러싸고 울고 갈린 사람아/ 잊어야 옳으냐 잊어야 옳으냐/ 꿈도 슬픈 타국 길.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과 논밭을 잃어버린 식민지 백성들을 대거 만주 벌판으로 내몰기 위하여 일제는 이른바 농업이민이란 명분을 내세웠다. 얼마나 많은 이 땅의 백성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갔던 것인가. 그 수는 당시 자료를 통해 보더라도 무려 200만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한다.

그들은 사실상 등을 떼밀려 고향에서 쫓겨 갔던 것이다. 일제말로 접어들수록 유랑민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북국 오천키로'란 노래는 이런 슬픈 사연을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고통의 길은 당시 식민지 백성들의 험난한 여정을 암시하게 해준다.

낯선 땅 거친 바람 속에서 꺼질 듯 꺼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서 있는 칸데라 등불은 고달픈 유랑민의 행색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누가 그들을 반겨 맞아줄 것인가? 과연 그들의 앞날은 말 그대로 '꿈도 슬픈 타국 길'이었던 것이다.

이런 노래를 채규엽이 불렀고, 대중들은 '북국 오천키로'를 너무도 처연하게 불렀던 가수를 마음 속으로 사모하고 존경심마저 품었다. 남인수, 백년설, 이인권 등의 후배가수들도 그들이 가수가 되기 전 채규엽의 인기곡을 교본으로 연습했다는 사실을 회고한 적이 있다. 이처럼 채규엽은 한국가요사 여명기의 확실한 대표가수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이동순 교수 약력

△ 1950년 김천 출생 △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 시인, 문학평론가, 충북대 국문학과 교수 역임

△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및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마왕의 잠'(1973), 문학평론(1989) 당선

△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2권 발간

△ 2003년 민족서사시 '홍범도'(전5부작 10권) 완간

△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시정신을 찾아서' 등 다수

△ 편저 '백석시전집', 산문집 '시가 있는 미국기행' '실크로드에서의 600시간'

'번지 없는 주막-한국 가요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등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상)
1930년대 전성기 시절의 채규엽.
◇사진제공=최규성(대중음악평론가)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상)
'봉자의 노래'가 실린 1930년대 채규엽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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