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하)

  • 입력 2007-03-08   |  발행일 2007-03-08 제19면   |  수정 2007-03-08
-앞서서 우리는 가수 채규엽의 두 얼굴 중 선한 마스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행적이 문제다.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하)
1936년 월간 종합잡지 '조광'에 실린 채규엽 음반 광고.

채규엽은 대중의 높은 지지와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상하게도 일그러진 인격으로 변모해갔다. 그 과정을 과연 무엇으로 설명해 낼 수 있을까. 자신에게 엄청난 성원을 보내준 대중에 애정 어린 보답을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인의 모습이 아닐까. 그러나 채규엽의 경우 사뭇 광기가 서린 우쭐거림과 자기도취, 자기과시로 변질되어 갔다.

1935년 매일신보에서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단연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가요계의 왕좌에 올랐으나 인간 채규엽의 처세는 점차 교만하고 방자한 꼴로 바뀌었다.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의 권위에 지나치게 의탁하여 자신의 이권과 지위를 더욱 살찌우는 추한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유창한 일본어 구사 능력은 그의 이러한 삶에 한층 친일적 관록을 보태었다.

일제말 창씨개명이 실시되기 이전에 채규엽은 이미 하세가와 이치로, 혹은 사에키란 일본 이름으로 음반을 취입하였다. 심지어는 일본의 전통음악인 나니와부시(낭화절)를 맹렬히 연습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일본 의탁은 점차 병적인 징후로 드러났다. 일본군 장교복장으로 공석에 나타나 좌중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고, 또 당시 막강한 친일단체이던 대정익찬회 소속의 명함을 돌리며 자신을 뽐내기도 했다. 일제말에는 기어이 일본군 비행기 헌납 모금 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이 무렵 채규엽이 일본 귀족의 딸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언론에서는 내선일체의 훌륭한 본보기라는 칭송이 쏟아졌다.

채규엽이 남긴 음반들을 살펴보면 일본 엔카풍 노래가 유난히 많다는 사실에 우리는 새삼 놀라게 된다. 유명 일본인 작사가, 작곡가들이 채규엽의 발매 음반에 솔선해서 작품을 제공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과정들이 단순히 채규엽의 친일적 변모로만 읽어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함이 느껴진다. 일본 엔카를 통하여 일본문화를 식민지에 강제 이식시키려던 식민통치자들의 정략적 기도는 매우 치밀하고 용의주도하였다. 채규엽은 혹시 그러한 식민지 문화정책의 희생물로 선택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내막도 모르고 줄곧 우쭐거리며 환상에 도취되었던 채규엽은 가련한 종이인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채규엽이 취입한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님 자최(자취) 찾아서' 따위의 노래들은 모두 일본인 작사가와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진 전형적 엔카를 그대로 한국어 버전으로 옮긴 것에 다름 아니다.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다카하시 타로 작사, 고가 마사오 작곡)란 노래는 일본의 인기가수였던 후지야마 이치로가 불러서 히트했던 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 채규엽에 의해서 그대로 직수입되어 식민지에 날개 돋친 듯 공급되었던 것이다.

창씨개명 전 일본 이름으로 음반 취입

엔카 번안곡·군비행기 헌납모금 앞장

해방 후 후배들 도움에도 재기 어려워

49년 가족두고 홀로 월북, 그곳서 영면

술이야 눈물일까 한숨이련가/ 이 마음의 답답을 버릴 곳장이//

이 술은 눈물이냐 긴 한숨이냐/ 구슬프다 사랑의 버릴 곳이여.

이 노래의 가사와 곡조를 유심히 들어보면 듣는 이의 마음을 비탄과 허무, 좌절 속으로 침몰시켜버리는 기묘한 중심의 해체, 혹은 파괴 작용을 느끼게 된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의 난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오로지 술에 의탁하여 눈물과 한숨으로 일관하는 비겁한 패배주의자의 어설픈 모습만이 나타나 있을 뿐이다. 식민지 백성들이 혹시라도 가질 수 있는 체제와 현실에 대한 불만을 그들은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런 엔카를 통해서라도 힘의 분산과 약화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채규엽은 식민지적 광기에 오히려 편승하여 대중들의 실망과 분노를 자아낸다.

채규엽의 방만한 여성편력과 사기행각이 신문에 자주 보도되자 가수의 명예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반성을 모르는 그의 방자함과 교만함은 극에 달하여 후배가수들의 가슴에 심한 상처를 주었다. 후배들의 연습곡을 귀 기울여 듣다가 자기 마음에 들면 마구 빼앗아 자기 곡으로 만들었다.

해방 이후 채규엽은 한동안 가요계의 표면에서 사라져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충남 논산의 시골 마을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숨어 살았다. 이것은 식민지 시절 일제와 야합했던 친일파를 척결 응징하는 반민특위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흥행사로 서울에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방만한 운영과 사기행각으로 말미암아 기어이 구속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채규엽의 정신적 파산에 대해서도 가요계의 의리는 관대했다. 후배가수 남인수, 백년설, 최남용 등이 중심이 되어 공연을 열고 무료 출연으로 채규엽 돕기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채규엽은 끝내 모범적 선배로서의 자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끝을 모르는 세속적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자주 내적 갈등과 충돌을 겪게 되자 불만족으로 인한 채규엽의 고통은 심한 탈모로 나타났다. 이 대머리를 채규엽은 몹시 수치스러워했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숯가루를 물에 개 이마에 발랐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경과하게 되면 얼굴에는 온통 땀과 함께 흘러내린 숯가루로 이상한 용모가 되곤했다.

한국가요사에서 최초의 직업가수였던 채규엽. 분단은 그의 기회주의적 처신을 기어이 파멸의 길로 빠뜨리고 말았다.

1949년 채규엽은 어린 딸과 가족을 서울에 버려둔 채 홀로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당시 북조선문예총 음악동맹위원장 직함을 갖고 있던 작곡가 이면상과 가수 이규남이 옛 친구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거물이 된 옛 친구에게 어떤 기대를 가진 월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황폐한 삶과 행적이 과연 북에서도 통했을지는 의문이다. 채규엽은 바로 그해 말, 함흥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동순(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하)
채규엽이 북한행을 선택한 직접적 계기가 된 친구 이면상. 당시 북조선문예총 음악동맹위원장이었다.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하)
북한으로 떠나기 전인 1940년대의 채규엽 모습.
◇사진제공=최규성(대중음악평론가)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하)
1941년 4월2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채규엽 음반 광고.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하)
당시 축음기 회사 상표들.

◇1935년 '삼천리'잡지사 선정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 순위

남자가수

여자가수

1위

채규엽(콜롬비아 레코드)1844표

1위

왕수복(포리돌 레코드)1903표

2위

김용환(포리돌 레코드)1355표

2위

선우일선(포리돌 레코드)1166표

3위

고복수(오케 레코드)647표

3위

이난영(오케 레코드)873표

4위

강홍식(콜롬비아 레코드)468표

4위

전옥(포리돌 레코드)387표

5위

최남용(태평 레코드)333표

5위

김복희(빅타 레코드)348표

그 외

김영길(313), 윤건영(313), 이일남(307), 임헌익(301), 김해송, 김주호, 김일송, 이상일

그 외

강석연(344), 이애리수(309), 김선초(306), 최창선(306), 손금홍(301), 나선교, 최명주, 최연연, 강남향, 김정숙, 미스코리아, 남궁선, 박부용, 한정희, 김연월, 안명옥, 윤옥선, 장일타홍, 이은파, 심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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